창작뮤지컬 10돌무대에서 불꽃 연기 대결하는 두 남자 오만석과 엄기준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거침없이 국경을 넘나든다. 검증된 상품과 풍부한 자본력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럽이나 아시아의 극장을 장악하고 있다. 등의 블록버스터 뮤지컬을 완벽하게 복제해내고 있는 것이다. 틈새가 보이면 같은 영국산 ‘제품’이 브로드웨이의 빈자리를 채우기 일쑤다. 이들의 스펙터클 공세와 문화적 감수성에 물들다 보면 눈요깃거리가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토종 창작물은 한없이 작아 보일 게 틀림없다.
하지만 국내의 뮤지컬 무대에서도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작품이 있다. 지난 1995년 초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230회라는 놀라운 공연 기록을 세운 뮤지컬 가 대표적이다. 요즘 는 창작 뮤지컬의 자존심으로 자리 잡아 ‘사비타’라는 애칭으로 마니아층을 넓혀가고 있다. 대단위 코러스와 화려한 볼거리도 없이 강산이 바뀔 세월을 버텨온 가 12월3일부터 창작 뮤지컬 2천회 공연이라는 대장정을 향해 ‘오픈 런’(Open Run)에 들어간다.
남경주·최정원 낸 ‘스타 사관학교’
뮤지컬 는 고작 3명의 출연진만으로 20만 이상의 관객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출연진은 좌절과 갈등 속에서 형제애를 깨닫는 형과 아우 그리고 실수투성이의 귀여운 아가씨 유미리가 전부다. 이들이 엮어내는 넉넉한 감동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비가 내리는 창을 배경으로 형과 아우가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며 서로를 감싸안는 모습은 우리 정서를 간직한 창작 뮤지컬에서만 느낄 수 있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물론 진부해 보이는 소재에 감동을 입힌 것은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였다.
그동안 사비타는 ‘뮤지컬 스타 사관학교’ 구실을 톡톡히 했다. 지금은 이름만으로도 관객을 끌어모으는 남경주와 최정원도 를 통해 뮤지컬 스타로 거듭났다. 뮤지컬계에서 활약하며 를 입문기에 한줄씩 얹는 것은 기본이다. 그만큼 뮤지컬의 전형적 인물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리라. 이번 공연의 연출을 맡은 이동선씨는 “사비타가 10년을 이어온 힘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있으면서도 한국적 이야기 구조가 탄탄해 배우의 색깔을 확연히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해마다 의 캐스팅은 세간의 관심을 모은다. 이번 공연에서는 10명의 배우가 형(3명), 동생(4명), 유미리(3명)의 역할을 맡는다. 배우에 따라 다른 맛을 내는 사비타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초연 10주년을 맞아 우리의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 있는 김성기·김정민·김장섭(이상 동욱)과 엄기준·최성원·정찬우(동현), 노현희·윤공주(유미리) 등을 다시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전방위 배우 오만석과 백민정이 새롭게 합류해 ‘사비타 신화’를 이어갈 예정이다.
여기에서 ‘포스트 남경주’를 노리는 오만석과 엄기준이 동현 역을 맡아 불꽃 튀는 대결을 벌인다. 이들은 30대 초반으로 어떤 배역이든 무리 없이 소화한다고 평가받는 뮤지컬계의 대들보다. 이미 의 주역을 차례로 맡은 다음 지난해 에서 대니(엄기준)와 두디(오만석)로 분해 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이번에는 함께 동현 역을 맡아 오르는 무대는 다르지만 각자의 기량을 맘껏 발휘하기 위한 경쟁은 벌써부터 치열하다. 무대를 좁게 하는 비범한 카리스마가 지하 연습실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섬세한 정통 연기 vs 진한 현장경험
일단 오만석이 ‘엄동현’으로 불리는 엄기준에 도전하는 형국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 1기 졸업생인 오만석은 대학로에 뿌리를 두고 뮤지컬과 방송, 영화, 무용까지 넘나들고 있다. “모든 것을 보듬을 줄 알아야 진정한 배우”라 믿으며 여러 장르에서 활약하는 것이다. 1997년 군에서 제대한 뒤 소극장에서 보았던 사비타의 가슴 따뜻한 감동을 기억하는 오만석은 “우산 없이 거리를 걷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 사발면 하나로 충분히 배부른 사람”이고 싶어한다. 그에게선 가슴을 파고드는 섬세한 내면 연기를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이전에 사비타에서 보았던 동현의 모습은 지웠다. 처음 무대에 오르는 공연이라 생각하면서 내 안에 있던 동현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동현이 나오지 않겠는가.” 나이 예순에도 무대에 오르고 싶다는 오만석은 무대를 다양한 방식으로 즐기려 한다. 올해만 해도 연극 , 뮤지컬 , 가극 , 영화 등을 통해 관객을 만났다. “아직은 배울 게 많아서 서둘러 무대에 오르고 있다”는 그는 객석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만끽할 줄 아는 배우다.
무려 200여 차례나 동현으로 분했던 엄기준이지만 무대 밖에선 예나 지금이나 순박한 청년이다. 코러스로 뮤지컬 무대의 한켠을 지켰던 그에게선 ‘잡초의 힘’이 느껴진다. 그가 ‘배역 속으로 철저히 사라지는 배우’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고단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무대에 올라 다른 인물 속으로 사라지길 꿈꾼다. 그가 를 기대하는 것은 한 무대에서 성격이 서로 다른 2명의 인물을 연기하고 싶은 열망 때문이다. 그런 강렬함을 추구하기에 ‘엄동현’은 더욱 짙은 색깔을 드러낼 것이다
“그동안 무대에서 분위기에 취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형의 일과 사랑, 미래를 위해 가출했으면서도 그 마음을 확연히 드러내지 못한 것이다. 웃기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진실한 동현을 보여주고 싶다.” 오만석이 정통 연기 수업을 받고 연극을 중심으로 뮤지컬에 다가선다면 엄기준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뮤지컬을 중심으로 연극에 다가서고 있다. 올해 봄 연극 에서 동생 유정으로 분해 충분히 가능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어떤 배역이든 백지 상태에서 빨아들이는 능력이 탁월한 그로 인해 무대는 더욱 풍요해질 것이다.
올해 뮤지컬 무대는 어느 해보다 풍성했다. 해외 뮤지컬이 장기 흥행을 주도하는 흐름에서도 창작 뮤지컬이 끊임없이 관객을 찾았다. 최근에는 CJ엔터테인먼트가 쇼케이스를 통해 작품을 선정하기도 했다. 창작 뮤지컬 제작 선진화를 위해 ‘인큐베이팅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 10년을 이어온 것은 놀라운 일임이 틀림없다. 해외 뮤지컬이 10여년 가까이 자국 무대에서 검증받은 걸 생각하면 는 이제 시작인지도 모른다. 10주년 무대의 배우들을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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