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문화를 압도하는 B급 문화의 활약상… 틀을 깨는 키치미술·차브족 문화판을 접수한다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B급 예술가를 자처하는 강홍구(48)씨를 ‘작가연’하는 사람쯤으로 판단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로 6년을 보낸 뒤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들어가 정식으로 미술수업을 받았다. 대중적 미술 소개서 를 펴내면서 일상의 언저리에서 발생하는 미술현상을 평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게 10년 전의 일이다. 지난해 펴낸 에는 웨이터들의 광고와 이발소 그림, 거리의 플래카드 등에 나름의 문화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너무나 일상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은 전통적인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유배당한 반항아의 ‘일상 재발견’
전통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으레‘반항아’라는 닉네임을 얻는다. 문화적 주류의 관점에서 일정한 ‘격리’를 꾀하는 탓이다. 자의든 타의든 일상으로 유배당한 ‘반항아’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것들을 재발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기존 상식을 거꾸로 보면서 개인의 욕망과 역사를 다시 읽는 것이다. 심지어 일상의 것들에 숨겨진 권력의 의도를 파헤치기도 한다. 예컨대 웨이터들의 광고를 통해 우리 시대의 유명인을 다시 발견하고, 초등학교 운동장에 내걸리는 만국기에서 권력의 노련한 침투를 살피는 식이다. 그의 눈에 들어온 대한민국은 ‘키치의 제국’이라 하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그렇게 묵묵히 일상의 이면에 의미를 부여하는 강씨. 그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다져나가고 있다. 물론 그는 ‘B급 예술’일 뿐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그의 주특기는 디지털로 조작된 사진을 렌즈로 주무르는 것이다. 애당초 이미지의 흔적은 어딘가에 숨어 있고 작가의 의도만 살아남은 이미지다. 처음에 ‘가짜 사진’을 만들 때는 고가의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할 수 없어 일일이 필름 스캔을 받아 장난을 쳤다. 누군가는 예술이라는 말이 흔해빠진 증거라 치부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의 B급 사진은 전시회로 관객을 끌어모으고 내로라 하는 미술관의 소장품 목록에 오르기도 한다.
아무리 강씨의 사진이 가짜라 해도 엄연히 현실이 녹아 있게 마련이다. 강씨는 옛 서울 거리를 재현한 방송 드라마 등의 기이한 세트 풍경을 전시하기도 했다. 동대문 따위의 조작된 이미지가 있는 서울 거리에 슬리퍼를 끌고 있는 아가씨의 모습을 합성해 넣었다. 과거의 재현이 향수와 감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A급을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박물관과 미술관에 종속된 게 사실 아닌가. 예술가로서 창작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욕망에 주눅들 이유도 없다. 창조적 영감이 모자란다는 것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작업을 하려고 한다.”
애당초 지구촌의 변방 국가에서 ‘A급 문화’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자유로운 에너지를 B급 문화의 저력으로 삼는 게 중요하다. 오는 11월13일 폐막을 앞둔 광주비엔날레 출품작들은 A급 문화에 대한 ‘신화’를 여지없이 깨뜨린다. 이번 비엔날레는 ‘먼지 한 톨, 물 한 방울’이라는 철학적 주제에 걸맞게 상상력과 관념의 세계를 다양한 시각으로 형상화한 작품들이 대거 출품됐다. 광주비엔날레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들은 미술가 박불똥씨의 에서 충격적인 경험을 한다. 연탄을 잔뜩 쌓아놓고 군데군데 나무가 있는 그의 작품은 처절한 삶의 막장에서 유토피아까지 삶의 간극을 표현했다.
박불똥의 키치미술, 잽을 날리다
이제는 박씨의 작품을 키치로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B급 문화에 가두기는 힘들다. 이미 지난 5월 ‘일상의 연금술전’이 열린 경기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3500장의 연탄을 쌓아올려 고급화된 미술을 통렬하게 풍자했다. 산업사회의 동력 구실을 했던 연탄으로 시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그가 가벼움과 유치함을 무기로 주류 미술계에 ‘잽’을 날린 것은 1980년대 초반 ‘20대 힘전’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동안 꾸준히 풍자적 비판정신을 담아낸 그는 B급 문화의 참신한 창의력으로 답보 상태에서 허우적대는 주류 미술의 폭을 확장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우리가 지레짐작했던 B급의 문화적 경계가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자리엔 예술적 코드로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들이 채우고 있다. 광주비엔날레만 해도 B급 코드의 화려한 등극을 여실히 보여준다. 중국 작가 쑨위엔과 펑위는 라는 제목의 뼛가루 기둥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기다란 회색 원통을 비스듬히 세웠는데 사람의 뼈를 갈아 만들었다. 여기에서 삶과 죽음에 관한 담론을 떠올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영국의 마크 퀸의 은 양고기와 토끼를 얼린 다음 석고로 떠서 만든 작품으로 유전자 조작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읽을 수 있다. 키치적 감성이 예술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셈이다.
이런 양상에 따라 주류 문화에서 격리됐던 B급 문화의 개념조차 모호해졌다. 오랫동안 자본으로부터 소외돼 변방에서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극적 표현에 익숙했던 B급 문화가 자체의 동력을 활용해 창조적 세계를 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A급과 B급의 혼성모방 단계를 지나 상생의 주류에 편입됐는지도 모른다. 문화평론가 전형선씨는 B급 문화가 주류 문화를 압도하는 추세라고 말한다. “B급의 미학이 예술적 자양분 구실을 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영화만 해도 B급 영화의 제왕이라 불리는 에드가 울머의 작품이 영화 입문 교과서 구실을 한다. 대중문화에서 B급 코드는 상품성을 충분히 인정받고 있다.”
대중적인 B급 문화의 원형은 패션에서 찾을 수 있다. 1970년대 초반의 전설적 록그룹 ‘섹스 피스톨스’가 입었던 찢어진 티셔츠나 가죽옷 등은 반항적 젊은이의 상징으로 통했다. 바로 펑크룩으로 패션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디자인한 것이었다. 도시의 변방에 머물던 펑크 스타일은 1980년대 주류 문화에 편입됐다. 펑크룩을 창시한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화가들의 작품을 변형해 패션 디자인에 활용했고, 펑크룩을 대표하는 패턴이 있는 찢어진 데님, 패턴과 구호가 섞인 콜라주 티셔츠, 라이크라 소재의 운동복 등은 B급 패션의 놀라운 성취를 보여주었다. 또 벽면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로 그린 ‘그래피티’(graffiti)를 이용한 디자인을 선보이기도 했다.
신조어 ‘차브’… 촌스러움이 첨단 유행?
최근 (The Language Report: Larpers and Shroomers)를 펴낸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부의 수지 덴트는 올해 가장 주목해야 할 신조어로 ‘차브’(Chav)를 꼽았다. 애당초 차브는 하류 계층의 문화적 취향을 포괄하는 집시어 ‘차비’(Chavi·로마어로 어린이를 뜻함)에서 유래한 말로 촌스러움의 상징으로 통했다. 싸구려 금붙이를 주렁주렁 달고 야구모자에 트레이닝복을 입은 젊은이를 지칭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차브는 유행의 첨단을 일컫는 말로 변모하고 있다. B급 문화라는 말조차 버거워 보였던 뒷골목의 양아치 패션이 디자인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차브족이 들끓는 ‘차브녀석들’(www.chavscum.co.uk)에 들어가면 자신의 뒷골목 패션 감각을 평가받을 수 있다.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유명인사들도 수두룩하다. 여기에선 영화 에서 리처드 기어와 호흡을 맞춘 제니퍼 로페스, 세계적 축구 스타 웨인 루니, 영국 왕실의 해리 왕자 등을 차브의 시선으로 만날 수 있다. 사실 우리에게도 ‘차브 스타’는 익숙하다. 가수 이효리는 트레이닝복 패션으로 ‘이효리 스타일’을 만들었고 전지현·김정은·보아 등도 비슷한 차림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들도 넓은 의미에서 차브족 대열에 섰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낡은 것에 생기를 넣는 차브족은 ‘쿨’의 상징적 구실을 하고 있다.
이처럼 비주류로 변방에 머물던 문화 혹은 문화현상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문화 생산자와 소비자의 간격도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주류의 시각은 서서히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고 있다. 진화하는 B급 문화가 원형질의 재가공을 통해 문화적 수혈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딱지치던 골목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 에세이 의 행간에서 현대사를 읽고, 이미지와 도상으로 문화를 탐험하는 에서 문화의 원형질을 발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지금 B급 문화는 미시적인 것들의 재발견 속에서 몸집을 불려 문화판을 접수하는 형국이다. ‘B급’이라는 꼬리표를 떼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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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사진에서 끝내 선택되지 않은 ‘B컷’들. 서울 종로구 대림미술관이 마련한 ‘패션사진 B- B컷으로 본다’(2005년 1월16일까지)에 전시된 작품들은 B컷의 멍에가 남아 있는 것들이다. 국내의 30대 패션작가 8인의 미공개작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패션’이라는 관점에서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예쁘지 않은 모델의 엉성한 포즈, 얼굴을 가린 모델, 노출이 맞지 않는 사진, 모델을 가린 사진 스태프들 등 패션사진의 꼼꼼한 눈에는 엉성함 투성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B급이 아니었다.
일단 전시장에 들어서면 김우영씨가 찍은 배우 고수와 가수 듀크(김석민·김지훈), 김윤아 등의 밀착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관객이 10여장의 사진 이미지만으로 A컷을 골라내려면 적지 않은 고민을 해야 한다. 다행히 최종적으로 선별된 사진에 테두리가 있어서 A컷을 살펴도 B컷들의 잔영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보는 이에 따라 너무나도 자유로운 표정을 담은 사진에 높은 점수를 줄 수도 있다. 사진촬영 현장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김현성씨의 사진은 소품을 렌즈에 넣고, 평상복을 입은 모델 등으로 자유로운 스타일을 그대로 드러낸다.
패션사진이 선택한 A컷과 외면한 B컷의 차이는 백지장 하나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B컷에서 패션사진의 미래를 발견할 수도 있다. 변순철씨의 B컷은 감각적이고 실험적인 이미지로 눈길을 모은다. 뉴욕 첼시 호텔에서 잡지 표지 사진으로 찍었지만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B컷에 머문 사진은 미적 감각이 돋보인다. 그는 상반신을 드러낸 모델을 통해 패션사진의 실험적 면모를 확실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패션사진의 경계를 넘나들면 최종 컷의 고정된 이미지를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대림미술관 조재희 큐레이터는 “최종 컷은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기 힘들다. 작가는 어떤 식으로든 예술성과 창조성을 담으려고 한다. 그래서 B컷은 완성도가 떨어지는 사진이 아니라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사진이다”고 말한다. B컷은 현실적인 시스템의 논리에서 밀린 사진일 뿐이라는 얘기다.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사람에게는 B급으로 보여도 작품의 완성도는 A급을 넘어서는 사진들. B컷을 보면 멀지 않아 최종 컷이 될 패션사진의 경향을 예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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