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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자금은 이렇게 ‘진화’했다

등록 2003-08-21 00:00 수정 2020-05-02 04:23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챙기다 권력기관으로, 다시 가신으로 역할 이양

문희상 청와대 비서실장은 가끔씩 김대중 정부를 ‘칼과 코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곤 했다. “역대 정부는 코란에 해당하는 국정철학은 물론, 칼에 해당하는 권력기관을 동원해 통치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는 칼을 포기했다. 국세청, 국정원 등을 통해 통치자금을 조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민의 정부가 무능해 보이기도 하지만 역사의 발전이다.”

민주당 권노갑 전 고문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문 실장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권력기관을 동원하지는 않았지만, 권 전 고문이 그 역할을 대신 떠맡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드러난 선거자금 충원 형태를 보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다 챙기는 경우에서, 대통령은 빠지고 권력기관이 앞장서는 경우, 그리고 이번처럼 권력기관을 대신해 ‘가신’이 나선 경우로 ‘진화’해왔다. 그 액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세무조사와 사찰이라는 양 칼날을 동원해 기업인들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게 해놓고’ 돈을 뜯어냈다.

전 전 대통령은 검찰조사에서 7년 동안 재임하면서 7천억원을 수수했다고 실토했다. 여기에다 이미 5공청산 과정에서 드러난 새마을 성금 1495억원, 일해재단 기금 598억원, 새세대육영회 찬조금 223억원, 심장재단 기금 199억원까지 합치면 재임 중 500억원이 빠지는 1조원을 기업들로부터 거둬들인 셈이다. 노 전 대통령은 모두 4500억~4600억원을 조성해 이 가운데 1988년과 92년 총선 지원금으로 1400억원을 썼다.

전 전 대통령은 13대 대선을 앞둔 87년 10월 안무혁 안기부장, 사공일 재무장관, 성용욱 국세청장, 이원조 은행감독원장 등을 통해 대선자금을 모금했다. 성용욱 국세청장의 경우 롯데 신격호 회장에게 그룹의 세무조사를 위한 내사 사실을 알려주면서 무마 명목으로 50억원을 청와대에 제공하도록 유도한 것으로 나타나는 등 5공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긁어모았다.

92년 대선 당시 정주영 국민당 후보는 자신이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추석 등 명절에 갖다준 떡값만 각각 20억, 30억, 50억, 100억원으로 모두 200억원이라고 폭로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이돈을 받은 사실을 시인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로 돌아가면, 대통령은 빠지고 권력기관이 직접 나섰다.

안기부 선거자금 지원 사건의 경우 안기부는 일반예산과 옛 재정경제원의 예비비에서 1157억원을 조성해, 이 중 217억원은 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자당의 계좌에 입금했으며, 940억원은 96년 15대 총선 직전 강삼재 당시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개인적으로 관리하는 계좌로 모두 입금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이는 국민의 혈세를 빼돌렸다는 점에서 비난받을 소지가 더 크지만, 그만큼 기업들로부터 돈을 뜯어내기 어려워진 세태를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97년 국세청을 이용한 한나라당의 대선자금 불법모금 의혹사건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관련 여부가 쟁점이 되기는 했지만, 청와대 개입은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권 전 고문의 자금 조달에서는 대통령도 권력기관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는 김대중 정부가 과거 정권에 비해 통치기반이 허약한 만큼 권력기관을 수족처럼 부릴 수 없는 한계 때문으로 보인다. 다른 재벌 기업에게도 손을 벌리기가 그리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정가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그나마 대북사업을 통해 배짱을 맞춰온 현대에 일방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관측된다.

그런 점에서 선거자금 조달 방법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조금씩 ‘진화’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비록 그 은밀함은 더해가지만….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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