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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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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해도 희망

새 시작점에 선 #노동 이야기
등록 2019-12-26 13:29 수정 2020-05-07 10:00
지난 5월 전북 군산 수송동 상가에 임대 표지가 붙어 있다. 박승화 기자

지난 5월 전북 군산 수송동 상가에 임대 표지가 붙어 있다. 박승화 기자

움직씨(동사). 속도를 더해 변해가는 세계 속에서 움직이기도, 움직여지기도 하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움직일 수 있는 속도가 저마다 달라 북적임 어딘가 비애가 녹아 있다. 플랫폼, 4차산업, 혁신 같은 현란한 단어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어리둥절 선 사람들, 자세는 초라하고 표정은 쓸쓸했다. 그들을 두고 우리는 다시 민첩하게 움직였다. 떠밀려 달리느라 부쩍 늘어난 노인과 다양한 민족을 향해 충분히 손 내밀지 못했다. 편리함과 환경 사이 끝내 편리 쪽으로 기울고 마는 마음을 다잡을 여유도 없었다. 이대로는 이상한데, 싶어도 멈출 수는 없었다. 움직임을 재촉하는 미래와 움직이느라 놓쳐버린 사람과 가치 사이에서, 적당한 움직임의 속도는 얼마인 걸까.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무언가 움튼다
제1269호와 제1271호 표지이야기 ‘공장이 떠난 도시 군산·울산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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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전북 군산과 울산 동구, 우리 경제가 처한 질문의 최전선에 선 도시. 믿으며 성장했던 모든 기반을 잃어버려서, 한국 경제의 미래를 가늠할 실험장으로 적합하다. 불행인 걸까, 다행인 걸까. 4월과 5월 머무른 두 도시(제1269호·제1271호)는 이후 세 계절을 지내는 동안에도 꾸준히 분투했다. 다른 질서를 모색한다. 무언가 움튼다. 그것을 일단, 희망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노조 대신 ‘지역 공동협의체’ 채택한 군산

10월24일 문재인 대통령이 옛 한국지엠 군산 공장에 섰다. 폐쇄되던 그날(2018년 5월31일)까지, 2천여 명 노동자와 그 가족, 1만여 명 협력업체 노동자와 그 가족, 이들 씀씀이에 좌우되던 가게 주인과 그 가족이 생명줄로 여겼던 공장. 문패는 이제 전기차 공장 ‘명신’으로 바꿔 달았다. 대통령은 공장에 서서 당연히 ‘아픔’ 먼저 말했다. “군산은 아픈 손가락이었습니다.” 군산의 아픔은 군산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국 경제의 미래를 향해 아픈 질문을 쏟아낸다.

세계 생산 체계에서 제자리를 잃는 한국 제조업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 충격을 최소화하며 변할 만큼 유연한가? 그 변화가 4차 산업 같은 것이라면, 혁신 역량은 수도권으로 몰아준 채 가진 것이라고는 생산공장뿐인 지역은 어떻게 살아남나? 지역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힘이 있나? 무엇보다, 비용 절감에 골몰하며 두텁게 쌓아온 원청과 하청,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은 치유될 수 있나?

군산의 위기는 ‘경제가 성장하려면 마땅히 이래야 한다’고 믿어온 질서 자체를 흔드는 것이었다. 위기 이후, 이전 질서가 회복되면서 으레 있을 법한 ‘V자형 반등’(위기 뒤 가파른 회복) 같은 것도, 그래서 찾아보기 어렵다. 회복될 질서가 더는 없으니까. 공장 폐쇄 이후 1년여 지난 2019년 3분기에도 군산이 포함된 전북의 광공업 생산은 한 해 전 같은 기간보다 5.4% 감소했다.

도리 없이 새로운 질서를 실험한다. “아무것도 남은 게 없고 절실해서”(최재춘 민주노총 군산지부장)다. ‘군산형 일자리’가 등장했다. ‘지역 공동교섭’이라는 낯선 개념이 담겼다. 원청·하청 구분 없이 전기차 클러스터 내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엇비슷하게 맞춘 적정임금 가이드라인을 노·사·민·정 지역 공동협의체가 제시한다. 정규직, 비정규직, 원청, 하청 노동자 사이 격차 없는 산업단지를 꿈꾼다. 우리사주제, 노동자 이사회 참관제로 노동자의 경영 참여도 보장하려고 한다.

아직 큰 그림만 있다. 지역 공동협의체는 지역 산별 노조와 엄연히 다르다. 교섭이 생각처럼 안 되면 노동자가 저항할 무기(파업 등)는 마땅치 않다. 노동 격차를 낳는 근원인 하청 단가 같은 세부적인 문제에 대한 얘기는 아직 시작 못했다. 우리사주제는 ‘언젠가 이들 전기차 기업이 상장할 때’ 시행하기로 모호하게 합의했다. 노동자가 이사회에서 표를 던지는 노동이사제 수준까지 이르지 못했고, 그저 이사회를 노동자가 참관하는 정도에서 타협 봤다. 갈 길이 멀다. 그래도 의미는 크다. 한 지역이 자기가 품고 있던 노동자와 기업 사이 격차를 고민하며 합의한 건 “전에 없던 가장 진일보한 타협”(청와대 관계자)이다. 산업단지도 함께 들뜬다. “그래도 산단 작은 기업들에 기대는 있어요. 맞는 방향이고 이렇게라도 토대를 닦아놓기 시작한 건 잘하는 일이니까.”(이정권 전 한국지엠 협력사 창원금속공업 이사)

도시가 기대에 차도 모든 삶이 공평하게 기쁘지는 않다. “잘 못 지내.”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김성우(49·가명·한국지엠 실직자) 목소리에 시무룩한 표정이 묻어 있는 듯하다. “왜요? 대통령도 오시고.” 애써 힘내라고 묻는다. “젊은 사람들 얘기지.” 새 공장이 새 노동조건을 가지고 들어와도, 한국지엠 중년 실직자들에게까지 그 자리가 열려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올해 초 지인들과 청소업체를 차리고 새 출발을 다짐했었다. 채 1년을 못 채우고 동업자에게 업체를 남기고 떠났다. “도저히 수지가 안 맞았다.” 대신 취직했다. 직원 10명 안팎, 함께 실직했던 동료가 먼저 취직해 있던 작은 공장으로 갔다. 노동환경은 지엠 공장에 견줄 바 못 된다. 고되다. 다감한 그는, 그래도 밝은 목소리를 힘주어 낸다. “그래도 친한 동료랑 같이 있고, 무엇보다 아침에 출근하는 건 역시 기분 좋아.”

정규직-비정규직 같은 노조로 묶인 울산

5월31일, 울산 동구를 떠나오던 날 노동자들은 한마음회관에서 울부짖었다. 현대중공업 법인(물적) 분할에 항의했다. 현대중공업을 분할해 만드는 중간지주회사(한국조선해양) 본사를 서울로 옮기면 울산 동구에서 전문 인력이 유출될 거라고 했다. 남겨진 현대중공업은 그저 생산기지로 전락할 거라고 걱정했다. 자기 삶 걱정이 곧 회사 걱정이고 지역 걱정이었다. 회사의 결정은 걱정 따위 아랑곳없이, 계획대로였다. 예정된 한마음회관이 아닌 다른 주주총회장에서 법인 분할 안건은 일정대로 통과했다.

고소와 고소가 맞부딪쳤다. 6월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등은 주주총회 효력 무효를 주장하는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다. 7월 현대중공업은 노조와 노조 간부 10명을 상대로 30억원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노조가 불법 파업을 벌이면서 기물을 파손하고 생산을 방해해 92억원의 피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정규직 노조와 회사가 다투는 사이, 하청업체를 둘러싼 흉흉한 소식은 ‘죽음’ ‘목숨’ 따위 좀더 고통스러운 단어를 동반했다. 9월 하청 노동자 박아무개(61)씨는 액화석유가스(LPG) 저장 용기 제작 현장에서 절단 작업을 하다가 대형 철 구조물에 몸이 끼여 숨졌다. 임금체불에 시달리다가 울산 동구청에 드러누워 항의하던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 최남형(44)의 얼굴이 스쳤다. 10월 한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대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세한 사정은 전해지지 않았다. 계약서 없이 일단 일하고, 하도급 대금을 지급받지 못하며 빚을 쌓는 절망을 얘기했던, 지난봄 변성운(43) 같은 마음이었을 거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12월18일 “현대중공업이 하도급 업체에 제조를 위탁하면서 미리 계약 서면을 발급하지 않고 대금을 부당하게 결정했다”며 과징금 208억원을 부과했다. 죽음, 그리고 또 죽음이 이어진 뒤였다.

그래도 변화의 싹이 튼다. 갈려 있던 현대중공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하나의 노조 안에 묶였다. 같이 회사에 요구했다. 150개 하청업체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1만4천여 명 임금을 25% 인상하라고 주장했다. 하청 노동자의 학자금, 명절 귀향비, 휴가비, 성과급 등을 원청 노동자 수준으로 맞춰달라고 했다. 조선소 역사 4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지금도 6 대 4 정도로 하청 노동자가 많은 상황에서 정규직 조합원만으로 회사의 법인 분할을 막아낼 수 없었을 테니 비정규직 힘이 필요했죠. 하청 노동자도 임금체불을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컸고.”(이형진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사무장) 절망과 절망이 쌓여 움튼 변화, 씁쓸해도 희망이다.

회색지대 ‘플랫폼노동’은 무슨 색이 될까
제1288호 표지이야기 ‘플랫폼에 노동권은 도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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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간접고용 비정규직은 물론 특수고용노동자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원래 모든 노동자를 기간의 정함이 없는 정규직으로 고용했던 기업들은 사업을 쪼개 하청업체에 외주를 주거나, 노동자 개인과 근로계약이 아닌 위탁·용역 계약을 맺어 비용을 절감했다. 제조업 대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부터, 마트 계산원, 위탁 집배원, 골프장 경기보조원, 택배노동자, 학원 강사, 미용실 헤어디자이너 등 고용관계는 갈수록 파편화됐고 이들이 권리를 주장해도 받아줄 곳이 없었다. ‘나는 당신과 아무런 계약을 맺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입니다.’ 노동자들은 ‘인정투쟁’을 시작한다. ‘나는 당신의 요구에 따라 보수를 받고 일하는 노동자입니다. 나를 당신의 노동자로 인정하십시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이른바 ‘플랫폼기업’이 등장하면서, 노동이 온라인에서 거래되고 중개되는 시대가 열렸다. 노무 서비스를 원하는 이가 있고 제공하는 이가 있는데, 이를 플랫폼기업이 연결해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파편화된 고용관계는 더욱 누가 사용자인지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특히 플랫폼기업들은 사회에 남아도는 유휴자원을 공유해 사회 혁신을 이룩하겠다는 ‘공유경제’를 내세웠다. 인격이 내재된 노동을 ‘상품’으로 만들었던 자본은 노무를 제공하는 것을 ‘즐기는 것’으로 규정하고, 여기에 참여하는 이들을 ‘힙한 사람’ ‘성실한 사람’으로 포장했다.

누가 노동자고, 누가 사용자인가 답할 때

그러나 플랫폼기업의 진짜 속내는 이렇다. “인터넷을 사용하기 전에는 누군가를 찾아 10분 동안 앉아서 일하게 한 다음 그 10분 후에 해고하는 것이 정말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기술을 통해 여러분은 아주 적은 액수로도 그들을 찾을 수 있고, 필요 없을 때 해고할 수 있습니다.”(루카스 비월드 크라우드플라워 창업자)

노동자와 자영업자 사이 회색지대에 있는 ‘플랫폼노동’의 문제는 ‘노동 가치’가 낮게 평가되는 대한민국에서도 2019년 내내 주된 이슈로 떠올랐다. 일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제대로 안전교육조차 받지 못한 배달대행 노동자가 계속 산업재해로 죽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을 줬다. 또한 사실상 노동자에 해당하면서 ‘프리랜서’ 계약을 맺은 배달대행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의 노동자로 인정되는 사례도 있었다. 택시를 넘어서는 ‘혁신’이라 칭송받았던 기사 포함 렌터카 호출 서비스 ‘타다’ 기사들도 노동자성 문제와 위장도급 의혹이 제기돼, ‘진정한’ 혁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촉발됐다. 한 해 동안 정부와 연구자 사이에서도 플랫폼노동이 계속 화두였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4차산업혁명위원회·일자리위원회 등 대통령 직속 위원회에서도 플랫폼노동에 대한 연구와 토론이 지속됐다.

2019년이 플랫폼노동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면, 2020년부터는 이에 대한 해답을 하나씩 내놓아야 할 것이다. 플랫폼노동자의 노동을 어떻게 존중하고 보호할지, 그 노동으로 이득을 올리는 플랫폼기업에 어떤 책임을 부과할지, ‘전부 아니면 전무’인 현재의 노동관계법 체계를 어떻게 손질할지에 대한 물음에 우리 사회가 답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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