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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 살 불효자는 웁니다

시민단체 도움으로 만든 다큐영화 <우키시마호>
등록 2019-08-14 00:48 수정 2020-05-03 04:29
이정우 선임기자

이정우 선임기자

“30여 년 전에 찍은 우키시마호 생존자들의 증언 영상이 없었다면 이 영화()를 만들지 못했을 겁니다.”

8월5일 서울 잠원동에 있는 영화사 메이플러스에서 만난 김진홍 감독(사진)은 다큐멘터리영화 (9월 개봉) 막바지 편집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일본 아오모리현 군사시설에서 강제노동했던 조선인 노동자와 가족을 태우고 귀국길에 올랐다가, 1945년 8월24일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로 침몰한 우키시마호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1990년도 초중반 생존자 촬영 영상이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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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우키시마호 사건을 다룬 영화로는 첫 극장 개봉작이다. 일본에서 1995년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을 다룬 영화 를 제작해 상영하고, 북한에서는 2001년 을 만들었다. 은 2003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했지만 국내 개봉은 못했다.

영화 의 뼈대는 우키시마호 생존자 80여 명의 증언이다.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전재진 회장이 1990년도 초중반에 생존자들을 만나 찍은 영상을 제공한 것이다. 영화 자문을 맡은 전 회장은 전화 인터뷰에서 “생존자 82명을 만났는데 그중 98살 최석준 할아버님만 살아 계셔요”라고 말했다.

영화에는 살아 있는 우키시마호 생존자로 86살 장영도 할아버지가 나온다. 장씨는 12살 때 가족과 함께 우키시마호에 탔다. 그 배에 함께 탄 어머니, 누나, 여동생을 잃었다. 김 감독은 “장영도 할아버님이 ‘내가 아흔이 다 돼가는데 아직도 (우키시마호) 진상 규명이 안 돼서 어머니에게 불효하는 것 같다고 하셨어요. 한 맺힌 세월을 보낸 할아버지의 아픔이 느껴졌어요”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그동안 몰랐던 우키시마호 사건에 대해 알아갔다. 그는 애초에 이 작품을 극영화 (가제)으로 제작하려 했다. 2017년 초반 우키시마호 진상 규명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들과 ‘​우키시마호 영화 전략 포럼’을 열었다. 하지만 제작비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도 우키시마호 사건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그동안 모은 우키시마호 자료와 생존자·유가족 인터뷰를 바탕으로 저예산 독립 다큐멘터리영화를 제작한 것이다.

우키시마호희생자유족회에서 이 영화 제작에 도움을 줬다. 유족회에서 2012년 우키시마호가 침몰했던 바다에 가서 찍은 수중촬영 영상을 제공했다. 당시 바닷속에 잠겨 있을 유해와 선체 잔해 발굴 작업을 위해서 그곳에 간 거다. 과 전화 인터뷰한 유족회 한영용(77) 회장은 “정부에서 진상 조사를 안 하니 우리가 사비를 들여 스쿠버다이버들과 함께 일본에 갔어요. 안타깝게도 펄이 두껍게 쌓여 수색을 제대로 할 수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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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배우들이 우키시마호가 침몰당한 그날을 재현했다. 하지만 진상 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 70여 년이 지난 사건을 면밀히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다. 당시 영상 자료, 사진 등도 턱없이 부족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영화 에 들어가는 노래다. 이 곡은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우키시마호 희생자들을 위한 이다. “우키시마호의 진실은 바다 깊은 곳에 여전히 묻혀 있어요. 영화를 통해 우키시마호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김 감독이 말했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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