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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호 생존자 “모두가 죽기 전에 결론을 내려주십시오”

우키시마호 생존자 86살 장영도 옹 인터뷰

“사죄가 일본의 미래를 위한 길”
등록 2019-08-14 00:43 수정 2020-05-03 04:29
우키시마호 생존자인 장영도 옹이 8월6일 광주 자택에서 우키시마호 사건과 관련된 자료를 보여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김진수 기자

우키시마호 생존자인 장영도 옹이 8월6일 광주 자택에서 우키시마호 사건과 관련된 자료를 보여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김진수 기자

“육지가 보인다.”

갑판 위에서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12살 소년 장영도(창씨명 나카야마 미쓰오)는 두 눈을 번쩍이며 갑판 위로 뛰어 올라갔다. “올라가지 마, 위험해.” 어머니(정복남)는 소리쳤지만 소년은 바닥층 선실이 답답했다.

1945년 8월22일 밤 10시께, 일본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구를 떠난 우키시마호의 항해가 이틀이 지나면서 공기는 더욱 뜨겁고 습해졌다. 선실은 조선인 수천 명이 포개지듯 앉아 흡사 콩나물시루 같았다. 온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한 영도는 뱃머리 갑판 위에 있는 아버지(종식)와 형(영문)을 보러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빠, 나도 따라갈래. 바깥 구경하고 싶어.” 여동생 옥성이가 따라나섰지만 소년은 단념시켰다. “어머니 말처럼 위험할지 모르니까 일단 내가 나가보고 올게. 넌 여기에 있어.” 그렇게 누나(옥남)와 어머니, 여동생을 선저에 남겨놓고 영도는 갑판 위로 올라갔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너는 조선 사람이니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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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4일 오후 5시께, 교토현 마이즈루항이 300여m 앞에 보이는데 배가 천천히 멈춰섰다. 아버지와 형이 있던 자리에는 아버지가 틀어놓은 축음기만 덩그러니 있었다. ‘왜 배가 멈추는 거지?’ 의아한 생각이 드는 순간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쾅’ 하고 울리면서 영도의 몸이 허공에 솟구쳤다.

갑판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짐이 허공에 떠올랐는데 일부는 배 밖으로 튕겨나갔다. “쾅, 쾅!” 두 번의 폭발음이 더 울렸고, 길이 100m에 이르는 갑판 한가운데가 크게 갈라졌다. 갈라진 부분이 물에 잠기면서 사람들도 바다로 떨어졌다. 영도는 본능적으로 기울어진 갑판을 기어올랐다. 사람들은 부둥켜안고 매달려 있다가 맨 윗사람 손에 힘이 빠지면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비명과 울음소리가 한데 뒤섞이면서 아비규환이 됐다. 배가 침몰하면서 탱크에서 새어나온 중유가 마이즈루 앞바다를 새까맣게 물들였다.

1945년 8월15일 수요일 정오. 여름방학 중이던 오미나토 국민학교 5학년생 영도는 한 친구 집에서 놀던 중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방송을 들었다. NHK 라디오에서 기미가요(일본 국가)가 나온 뒤 일왕의 음성이 들리자, 친구 집은 울음바다가 됐다. “이렇게 허망하게 대일본제국의 군대가 패하다니….” 침통해하는 친구 부모님을 보며 영도도 눈두덩이가 뜨거워졌다.

그때 친구 아버지가 영도에게 말했다. “미쓰오, 너는 조선 사람이니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조선은 해방이다. 독립국가가 됐다. 집에 가봐라.” ‘해방’ ‘독립’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소년은 동네 변두리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영도 집 분위기는 친구 집과는 딴판이었다. 온 가족이 환희에 찬 표정으로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누나는 “조선을 강제 합병했던 일본이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우리는 해방돼 정부를 새로 세우게 될 것”이라고 설명해줬다. 그제야 소년은 일왕의 항복이 자신에게 좋은 일임을 깨달았다.

영도의 아버지 종식은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자랐다. 같은 지역 출신인 어머니와 결혼해 큰딸을 낳은 뒤, 돈을 벌기 위해 일본행을 택했다. 북해도 기타미시에서 먼저 일하며 자리잡은 뒤, 고향에서 아내와 딸도 데려왔다. 종식은 처음에는 농사를 짓다가, 토목공사 하청업으로 업종을 바꿨다. 태평양전쟁(1941∼45년) 후반부로 가면서 북해도는 연합군 폭격 대상이 됐는데, 탄광이나 공사장에서 탈출하는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가 많았다. 종식은 함께 일하던 김동연(영도의 고종사촌)과 조선인 노동자 70여 명을 데리고 1944년 초 시모키타반도로 향했다.

시모키타반도는 당시 일본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오미나토항에는 북방 경비를 담당했던 해군사령부가 있었다. 일본 정부는 시모키타반도에 철도 건설을 결정했으나, 대부분 산악지대고 지형이 험난해 공사가 쉽지 않았다. 겨울이면 안개 섞인 칼바람이 불었다. 이렇게 힘든 일은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와 종식 같은 자유노동자들이 맡았다.

1945년 1월, 미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태평양전쟁 전세가 기울자 본토 결전 체제가 선포됐다. 오미나토항에 해군 병력 5만 명이 주둔했는데, 이 병력이 외부 보급 없이도 3개월은 적의 공격에 버틸 수 있는 ‘요새화’ 작전이 시작됐다. 무기·화약·식품 등을 비축하고 철도 건설과 더불어 1만t급 배가 들어올 수 있는 부두, 해군비행장, 터널 등 대형 공사를 하기 위해 조선인 수천 명을 강제로 동원했다. 당시 시모키타반도에는 조선인 7천여 명이 있었다. 그중 3천여 명이 자유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이었고, 강제징용 노동자는 4천여 명에 이르렀다.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삶은 처참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충북 영동의 박이용(1911년생)은 의 저자 사이토 사쿠지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으로 끌려갈 때 징용에 따르지 않으면 가족을 괴롭혔기 때문에 징용을 피할 수 없었다. 비행장 공사장에서 일하면서 이유 없이 맞았고 추위와 배고픔에 고통받았다”고 했다. 어린 영도도 강제징용 노동자들을 봤다. 그들은 남루한 누더기를 걸치고 일했으며, 상해서 일본 사람들이 먹지 않고 버린 사과를 주워 먹기도 했다.

장영도 옹이 1999년 10월28일 우키시마호 피해자 대표로 일본 교토지방법원에서 현지 언론과 인터뷰하고 있다. 장영도 제공

장영도 옹이 1999년 10월28일 우키시마호 피해자 대표로 일본 교토지방법원에서 현지 언론과 인터뷰하고 있다. 장영도 제공

<font size="4"><font color="#008ABD">‘배에 안 타면 조선으로 못 돌아가’ 소문이 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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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가족과 떨어져 강제로 끌려온 이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며 고된 노동에 시달렸으나, 일본인은 이들을 멸시했다. 강제징용 노동자들을 ‘다코’(문어)라고 불렀다. 강제징용 노동자는 수십 명이 좁은 방에서 새우잠을 잤고 24시간 감시당했다. 감옥과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숙소를 ‘다코방’이라 하며 어린이들이 근처에 가지 못하게 했다.

이역만리에서 숨죽여 일했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이 전쟁에 패하면서 목소리를 되찾았다. 시모키타반도 곳곳에서 조선 노동자들의 “만세” 소리가 울려퍼졌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을 그만두고 일본인 감독관에게 저항했다. 기세가 오른 일부 사람은 술을 마시고 조선말로 노래를 불렀다. 조선인들을 무시했던 오미나토(현 무쓰시) 주민들은 패전 직후를 ‘혼돈’으로 기억했다. 일부 조선인이 일본인을 폭행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런 상황을 보고받은 해군사령부는 8월18일 귀항한 우키시마호에 조선인들을 태워 돌려보낼 것을 결정했다. 우키시마호에 타지 않으면 이후 식량 배급을 받을 수 없고 나중에는 교통편이 없어 한반도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영도의 가족도 귀국을 결심했다. 대여섯 개의 짐보따리를 아버지와 형, 그리고 동료 노동자들이 나눠 들고 간이부두, 기쿠치부두로 나섰다. 부둣가에는 수천 명의 조선인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뤘다. 광복의 환희가 채 가시지 않은 듯 곳곳에서 수시로 “만세” 소리가 들렸다.

조선인들을 태울 4730t급 우키시마호는 웅장했다. 길이가 108.43m에 이르렀다. 오사카 상선 소속의 민간 배였다가,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1941년 9월 일본 정부에 징발됐다. 패전 이후 오미나토항에 들어왔다. 배가 워낙 커서 간이부두에 정박하지 못했고, 작은 나룻배를 타고 우키시마호에 사람과 짐을 옮겨 태우는 데 하루가 꼬박 걸렸다. 우키시마호에 오른 조선인들은 여성과 어린이들을 갑판 아래 선실에 태웠고, 어른 남자들은 갑판 위에 자리를 잡았다. 가족이 일본에서 모은 돈을 보자기에 싸서 몸에 두른 영도의 어머니는 두 딸과 영도를 데리고 가장 낮은 층의 선실로 내려갔다.

배는 8월22일 밤 10시께 항구를 출발했다. 일본 서해안을 따라 항해하던 우키시마호는 24일 오후 갑자기 부산항이 아니라 마이즈루항에 간다고 했다. 미군의 “24일 오후 4시 이후에는 100t 이상의 배는 항해를 금지하니 가장 가까운 항구로 일단 들어가라”는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항로를 안내하는 작은 경비함 두 척의 안내에 따라 항구에 들어서 속도를 줄이던 우키시마호는 5시20분께 폭발음과 함께 침몰했다.

배가 폭발할지 몰라 불안했던 영도는 검은 기름이 가득한 바다로 뛰어들어야겠다 결심했는데, 그때 누군가 뒤에서 목덜미를 강하게 붙잡으며 “바다에 뛰어들지 마” 소리쳤다. 아버지였다. 부서진 부분이 가라앉았던 배는 다시 균형을 찾더니 옆으로 비스듬히 잠겨갔다. 갑판 위에서 최대한 버텼던 영도와 아버지는 구조하려고 다가온 민간 어선의 도움으로 뭍으로 갈 수 있었다. 폭발음을 듣고 달려온 마이즈루의 민간 어선들이 물에 잠기는 우키시마호의 승선자들을 구조했지만 3757명(유가족 추정 8천여 명)을 모두 구할 수는 없었다. 시커먼 기름을 뒤집어쓰고 눈동자만 하얗게 보이는 사람들이 뒤엉켜 바다에 삼켜졌다.

장영도 옹(가운데 모자 쓴 작은 소년)의 한 장밖에 남지 않은 가족사진.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은 모두 마이즈루 앞바다에 가라앉았다. 장영도 제공

장영도 옹(가운데 모자 쓴 작은 소년)의 한 장밖에 남지 않은 가족사진.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은 모두 마이즈루 앞바다에 가라앉았다. 장영도 제공

<font size="4"><font color="#008ABD">“아이고 아이고” 통곡 소리 가득한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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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으로 올라온 영도와 아버지는 나머지 가족을 찾아헤맸다. 마이즈루 바닷가의 풍경은 처참했다. 중유를 뒤집어쓴 사람들 중 일부는 기름을 너무 많이 먹어 구조된 뒤에도 쓰러져 목숨을 잃었다. 소년은 극적으로 형을 만났다. 수영을 잘했던 형은 바다에 뛰어든 뒤 옆에 사람들이 붙잡길래 아예 바다 밑으로 잠영해서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은 찾지 못했다. 해가 지자 세 부자는 어쩔 수 없이 일본 해군의 임시 수용소로 향했다. 이튿날 동이 트자, 주검과 짐들이 파도에 밀려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닷가로 나갔다. 아버지는 며칠 동안 해가 뜨면 해안가 주검들을 헤집고 다녔다. 날이 지날수록 주검이 크게 불어났다. 마이즈루 해변에는 “아이고, 아이고” 통곡 소리가 가득했다. 일부 조선인은 “왜놈들이 우리 조선 사람을 죽이려고 폭탄 장치를 했다”고 외쳤다.

조선인의 울음도 며칠이 지나자 잦아들었고, 바다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결국 가족의 주검을 찾지 못한 영도 부자는 일본 해군의 안내에 따라 시모노세키항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시모노세키항으로 가는 길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폐허가 된 히로시마 인근을 지났다. 폐허가 된 도시의 모습을 목도했다. 시모노세키항에서 연락선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한 영도의 아버지는 곧장 로 달려가 우키시마호 침몰로 조선인 수천 명이 수몰된 사실을 제보했다. 9월18일치 2면에 ‘음모이냐? 과실이냐? 귀국동포선 폭발’ 제목의 기사로 보도됐다.

아내와 딸들, 그리고 전 재산을 마이즈루 앞바다에 두고 온 영도의 아버지는 차마 고향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아 두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향했다. 광복 뒤 서울은 어수선했다. 종로구에 있던 해외동포 구제소에서 며칠을 묵은 이들은 회현동1가 적산가옥으로 들어갔다. 당시 서울에선 시계가 귀했는데 일본에서 온 부자는 손목에 시계를 하나씩 차고 있었다. 시계들을 팔아서 말아 피우는 궐련을 샀다.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담배들과 함께 궤짝에 담아 매고 다니면서 남대문시장 일대에서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1946년 8월13일(음력 7월17일) 영도와 형은 담배를 팔아 번 돈으로 고기와 과일을 사 제사상을 차렸다. 유해를 찾지 못한 어머니의 첫 기제사였다. 집 현관에 앉아 남산을 보며 형제는 목놓아 울었다.

“재판장님, 재판을 시작한 지 7년이 지났습니다. 생존자 원고는 1년에 몇 명씩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모두가 죽기 전에 결론을 내려주십시오. 피고 쪽(일본 정부)에서 배를 운항하면서 승선자 명단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내 고종사촌형(영도)이 배에 탈 때 아버지와 함께 일하던 인부의 명단을 제출했습니다. 승선자 명단을 꼭 공개해주세요.”

1999년 10월28일 교토지방법원에 원고인단 대표로 나선 이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66살에 머리 희끗한 노인이 됐다. 교토지법 1심 재판부는 일본의 안전 배려 의무를 인정하며 우키시마호의 승선과 피해가 확인된 원고 15명에게 300만엔을 지급하도록 부분승소 판결했다. 하지만 장영도 옹은 만족할 수 없었다.

정확한 침몰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고, 사망자 명단도 확인되지 않았으며, 돌아가신 어머니 유골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 검찰이 항소하면서 2심과 3심에선 잇달아 패소했다. 참담한 마음을 달래며 그는 마이즈루항에서 가져온 자갈로 어머니의 묘를 썼다.

1945년 9월18일 <부산일보> 2면에 실린 우키시마호 침몰 기사. 장영도 제공

1945년 9월18일 <부산일보> 2면에 실린 우키시마호 침몰 기사. 장영도 제공

<font size="4"><font color="#008ABD">협정은 해방 이전에 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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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살 되던 해에 후두암 판정을 받으면서 우키시마호 진상 규명 활동을 그만둔 장영도 옹은 올해로 86살이 됐다.

“최근 한-일 관계가 경색됐는데, 아베 정부는 1965년 양국이 체결한 한일협정을 언급한다. 한일협정은 1945년 8월15일 이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만 협정을 체결한 것으로 우키시마호 침몰은 포함되지 않는다. 배(상)보상의 책임이 아직 남아 있다. 일본 정부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그것이 일본의 미래를 위한 길이다. 아베 정권은 과거사를 무조건 덮으려고만 하는데 일본의 많은 시민단체의 비판에 직면하지 않았나. 일본의 양심 있는 시민의 목소리를 꼭 새겨듣길 바란다.” 육성으로 우키시마호 침몰을 증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생존자 장영도 옹이 마이즈루항의 사진을 보여주며 담담하게 말했다.

<font size="2">*이 8월6일 우키시마호 생존자 장영도 할아버지와 한 인터뷰와, (사이토 사쿠지 지음, 1996), ‘해방귀국선 우키시마호 폭침의 의혹’ 보도(, 이종각 기자, 1985) 내용을 종합해 재구성했습니다. </font>

<font color="#A6CA37">유족회 한영용 회장 인터뷰</font>


“74년 동안 우리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김진수 기자

김진수 기자

“제가 3살 때 아버지가 강제징용돼 일본에 가셨다가 우키시마호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제가 올해 77살입니다. 정부는 우키시마호 희생자와 유가족이 모두 세상을 떠나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면 지금 바로 나서줘야 합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희생자에 대한 배상·보상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보내는 우키시마호 유족회 한영용(77·사진) 회장은 조속한 정부의 움직임을 강조했다.
그의 아버지 고 한석희씨는 26살 되던 해인 1945년 4월 강제징용돼 일본 아오모리현으로 갔고, 비행기 격납고 만드는 일에 동원됐다. 일본이 패전국이 되고 1945년 8월24일 부산항으로 올 예정이던 우키시마호를 탔다가 마이즈루항에서 수몰됐다. 한 회장의 가족은 함께 징용됐다가 우키시마호를 같이 탔던 유아무개씨로부터 아버지의 부고를 들었다. 유씨는 “배가 침몰하는데 가방을 가지러 갔다가 바다에 빠졌다”고 했다. 일본 정부는 우키시마호 침몰로 사망한 524명의 명부를 발표했지만 한 회장의 아버지는 포함되지 않았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골도 찾지 못한 채, 한 회장의 가족은 유씨의 증언과 징용 명부에 이름이 오른 사실만으로 사망신고를 했다.
이는 일본 정부가 발표한 내용보다 사망자가 많음을 방증한다. 유족회와 학계는 배에 탔던 인원이 8천 명에 이르고 5천 명이 실종되거나 사망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2004년 11월 국무총리 직속 독립기구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했지만 우키시마호 진상 규명에는 한계가 컸다. 보고서조차 내지 못한 채 위원회가 활동을 마치자, 한 회장은 2012년 직접 잠수부를 데리고 마이즈루항을 찾았다. 바닷속을 수색했지만 인양되지 않은 우키시마호의 반쪽은 토사에 덮여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니시마쓰 건설은 강제동원 희생 중국인 183명에 대해서는 1억엔 넘는 화해금을 내고 사죄하지 않았나. 반면 한국에는 사과하지 않는다. 우리 국력이 약하고, 정부가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한 회장은 탄식했으나,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한 조선에 대한 강제동원은 1938년 제정한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것으로 중국과는 사정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일본 정부가 우키시마호 침몰 후 배를 인양하고 주검 수습부터 해야 했는데 그대로 내버려뒀다가, 1950년 한국전쟁에 고철로 쓰려고 인양에 나섰다. 민간업체가 배 반쪽을 인양하는데 수습하지 않은 유골이 쏟아졌다. 한국 정부가 이런 반인륜적인 일본의 행태를 전세계에 알리고 희생자 유골 수습에 나섰어야 했다. 74년 동안 우리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한 회장은 우키시마호의 정확한 침몰 원인 규명과 유골 송환을 촉구했다. 일본 정부는 우키시마호가 미군이 설치한 기뢰가 폭발하면서 침몰한 것으로 보지만, 유족회는 ‘자폭’ 가능성을 제기하며 맞서왔다.
최근 한국과 일본이 과거사 문제를 놓고 갈등하는 것에 대해 한 회장은 “우리가 피해당했던 사실을 명백하게 밝히고 알렸더라면 일본이 이렇게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전국 각지에 흩어진 강제동원 피해자의 유해를 한곳에 모아 추모공원을 만들고 일본 총리가 와서 사과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족회는 우키시마호가 침몰했을 때 3천 명이 살아남았다고 파악했지만 현재 참사 생존자는 장영도 옹을 포함해 손으로 꼽을 정도다. 더 지체하면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야 할 생존자와 그 유족들까지도 남지 않을 것이다.
거창=이재호 기자
광주=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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