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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미답의 길

문재인의 미래
등록 2019-07-07 13:01 수정 2020-05-03 04:29
6월30일 문재인 대통령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포옹하고 있다. 이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6월30일 문재인 대통령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포옹하고 있다. 이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군사분계선 앞에서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만난 6월30일 오후 3시46분, 문재인 대통령은 남쪽 자유의집에 있었다. 3시51분 자유의집 문을 열고 나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무위원장을 맞이한 문 대통령은 “오늘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한 것 같고, 좋은 결실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3분간 대화한 뒤 북-미 정상은 2층 회의실로 올라가 이야기를 나눴고, 문 대통령은 뒤로 빠져 별도의 대기실에서 두 사람을 기다렸다.

남쪽 자유의집에서 회담 지켜봐

앞서 이날 오전 11시14분, 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소인수 정상회담에서 “오늘 대화의 중심은 미국과 북한 간 대화가 중심이므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사이 대화가 큰 진전을 이루고 좋은 결실을 맺기 바란다”고 했고, 오후 1시께 열린 한-미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도 “저도 오늘 판문점에 초대를 받았다. 그러나 오늘 이 중심은 북-미 간 대화이다. (중략) 그래서 오늘은 북-미 간 대화에 집중하도록 하고 남북 간 대화를 다음에 다시 또 도모하게 될 것이다”라고 거듭 몸을 낮췄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주인공, 한반도의 피스메이커”라며 트럼프 대통령을 치켜세웠다. 정전협정 뒤 66년 만에 처음으로 북-미 정상이 분단의 상징을 넘나들었던 역사적인 하루, 문 대통령은 철저하게 ‘조연’을 자처했다.

판문점 회동 다음날, 정치권은 문 대통령 앞에 놓일 ‘수식어’를 두고 공방을 벌였다. 7월1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이 ‘운전자’로 시작해 ‘중재자’를 자처하더니 이제는 ‘객’(客)으로 전락한 것 아닌가 싶다”고 했고,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는 “이번 회담에서 대한민국 대표는 역할도, 존재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에 여당은 “시간이 갈수록 (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은 동북아 평화의 설계자로 발전하고 있다”(7월3일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고 받았다. 각자의 위치와 이해관계에 따라 정의한 문 대통령의 ‘존재감’은 극과 극을 달렸다.

하지만 문 대통령과 청와대는 이러한 평가에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판문점 회동을 둘러싸고 얽히고설킨 남·북·미의 이해관계를 들여다보면 정치권의 평가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다. 지난 2월28일 2차 북-미 정상회담(베트남 하노이 회담) 이후 교착상태에 빠졌던 북-미 대화가 ‘깜짝 이벤트’로 숨통을 틔우는 과정에서 한국은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한발 뒤로 물러나 ‘조연’을 맡고 ‘판’을 까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지난 1년 동안 ‘북-미 대화’라는 열차가 궤도를 이탈하지 않도록 온힘을 쏟아온 문 대통령 역시 열차를 다시 달리게 하기 위해 기꺼이 조력자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판문점 회동은 하노이 회담으로 시계를 다시 돌린 것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 앞에 놓일 수식어가 무엇이 될지는 문 대통령과 청와대의 행보에 달렸다.

영변, 안 쓰는 것만 못하게 된 카드

판문점 회동에서 문 대통령의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월 하노이 회담 이후 최근까지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문재인 정부의 입지가 줄어든 과정을 짚어야 한다. 하노이 회담이 빈손으로 끝난 것은 영변 핵시설과 제재 완화를 바꾸려던 김 위원장과 “영변만 가지고 제재를 완화할 수 없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거래 조건’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평창 겨울올림픽 이후 북-미 대화를 ‘중재하고 촉진했던’ 문 대통령의 노력이 하노이 회담을 계기로 한순간에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에 이렇게 설명했다. “하노이 회담 이후 북한은 노골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중재자 역할에 불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북한 입장에서는 남쪽을 믿고 영변 핵폐기를 협상 카드로 썼는데 하노이 회담(노딜)으로 그 카드를 안 쓰는 것만 못하게 돼버렸다. 한국 정부의 ‘내용적 중재’에 강한 불만을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남북 정상은 지난해 9월19일 평양에서 발표한 평양공동선언(9월 선언) 제5조 ②항에서 “북측은 미국이 6·12 조(북)-미 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 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고 선언했다.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이 이 조항을 지렛대로 미국을 설득한 것으로 믿었지만 실제 협상장에서 예상했던 결과를 얻지 못해 리더십까지 타격을 입었고, 이에 대한 책임을 남쪽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하노이 회담이 깨진 것은 사실상 평양선언 전체가 깨진 것으로 봐야 한다. 김 위원장 입장에서는 문 대통령이 중재자라고 하면서 미국의 메신저 역할만 한 거 아니냐는 실망감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문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4월11일)을 거친 뒤 북-미 대화를 향하는 징검다리로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4월15일)”는 입장을 꾸준히 피력하며 남북·북-미 대화 복원에 힘썼지만 북한의 반응은 차가웠다. 김 위원장은 4월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문재인 정부를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돼야 한다”고 비난했고, 북한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6월28일)를 계기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다시 시동을 걸려던 문재인 정부를 향해 “조-미 대화의 당사자는 우리와 미국이며, 조-미 적대관계의 발생 근원을 봐도 남조선 당국이 참견할 문제가 전혀 아니다”(북한 외무성 미국 담당 권정근 국장)라는 담화를 6월27일 발표하기도 했다.

이에 진보 진영 일부에서 남북관계 개선 요구와 인도적 대북 지원을 사실상 막아온 한-미 워킹그룹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지만, 문 대통령은 “북-미 대화를 재개해야 길이 열린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의 분석이다. “비핵화는 북-미 문제고 이 문이 열려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문 대통령의 생각인 것 같다. 그런 인식에서 북한과 미국을 만나게 하는 방법론적 중재를 계속 밀고 온 것이다. 문 대통령이 하노이 회담 결렬 뒤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고 남북 정상회담을 요청한 것은 (북한과 미국이) 다시 만나면 대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방법론적 중재가 이번 회동에도 맞아떨어진 것이다.”

문 대통령은 판문점 회동 나흘 전인 6월26일 , 세계 6대 통신사와의 합동 서면 인터뷰에서도 “한반도 비핵화 추진과 관련해서 한국 정부가 앞으로 어떤 구체적인 조치와 노력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밝혔다. “하노이 정상회담 후 공식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동안에도 북-미 양 정상의 대화 의지는 퇴색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중략) 양국 (북-미) 간에는 3차 정상회담에 관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노이 회담을 통해 서로의 입장에 대한 이해가 선행된 상태의 물밑 대화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화, 그리고 대화를 위한 노력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핵심 요소다.”

6월30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경기도 파주 캠프 보니파스의 최북단 ‘오울렛 초소’를 찾아 북한 쪽을 바라보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6월30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경기도 파주 캠프 보니파스의 최북단 ‘오울렛 초소’를 찾아 북한 쪽을 바라보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북한 체면은 살리고 한발 물러서서

결국 문재인 정부는 판문점 회동에서 남쪽을 비난해온 북한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만나는 데 방점을 찍고 한발 물러서기로 입장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는 “북한과 미국이 대화의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문 대통령이 집중적으로 노력해왔다. 대화를 통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선순환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피력했다. 이번에도 실제로 북-미 회담이 이뤄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은 “하노이 회담 이후 어렵게 만난 자리인데 우리 정부가 껴서 북한이 거부하는 상황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판 깔아주는 역할만 하고 한발 물러나는 게 북한 체면을 살려주는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북-미 대화가 재개되면 남북대화 재개 여건이 마련되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판문점 회동이 꺼져가던 북-미 대화의 불씨를 살렸을 뿐이니 장밋빛 전망만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조성렬 위원은 “우리 정부가 일정 역할을 한 것도 맞고 회동도 의미가 크다”면서도 “핵심 이견이 좁혀졌다는 증거는 없다”고 평가했다. 김동엽 교수도 “북-미 대화 재개로 정체됐던 남북관계가 자동으로 따라가서 풀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희망적이다. 북쪽이 남쪽에 면죄부를 줬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 역시 당분간 신중한 태도를 가질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7월2일 국무회의에서 “적대관계의 종식과 새로운 평화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을 선언했다”고 판문점 회동의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남북 정상회담을 언급하지 않고 “제가 평소에 늘 강조해왔던 것처럼 남북관계 개선과 북-미 대화의 진전이 서로 선순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곧 진행될 북-미 실무협상을 지켜보며 남북관계 개선 시기를 가늠해보겠다는 것으로 읽힌다.

물론 문 대통령은 영원히 ‘중재자’에 머무를 수 없다. 비핵화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남쪽은 상황에 따라 당사자, 중재자, 촉진자 등을 오갈 수밖에 없는 게 ‘숙명’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도 문 대통령이 북-미 대화 틀을 만드는 데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주문한다. “향후 남북관계에서 반걸음 물러서서 북-미 대화를 촉진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도 남북대화 공간을 만드는 노력도 같이 끌고 가야 할 것이다.”(홍민 실장) “앞으로 북-미 대화는 하노이 회담 플러스알파가 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영변 핵폐기 플러스알파, 북한은 제재 완화 조정 등을 원할 것이다. 결국 하노이 회담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한국이 적극적으로 나가야 한다.”(김준형 교수) “비핵화 대상과 범위 등 북-미 합의점을 만들어내게 하는 게 한국 정부의 과제다.”(조성렬 위원)

이제 북-미 합의점 만들어내야

1년 전 자신이 밝힌 대로 문 대통령은 “가보지 않은 미답의 길”(2018년 3월21일 ‘남북 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제2차 회의’)을 여전히 가고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핵을 포기하면 지원하겠다”는 입장만 내세우며 남북관계를 사실상 방치한 것에 견줘, 문 대통령은 북한과 미국을 오가며 ‘대화’라는 그릇이 깨지지 않게 하는 데 노심초사하고 있기도 하다. 문 대통령이 처한 상황과 심경은 6월30일 한-미 정상 공동 기자회견의 발언으로 엿볼 수 있다. 그를 수식하는 말은 당분간 계속 ‘협상가’가 될 것 같다. “똑바로 나아갈 때도 있지만 구불구불 돌아갈 때도 있고, 때로는 멈출 때도 있고, 때로는 후퇴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화 외에는 평화를 이룰 방법이 없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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