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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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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은 ‘싸구려’로 출발했다

등록 2000-09-06 00:00 수정 2020-05-02 04:21

일본 B급문화 개척한 전공투 출신들… 진정 하고픈 일을 값싸게 해낸 로저 코먼

일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 하나. 어지간한 비디오숍이나 비디오 판매점을 방문하면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할리우드영화에서 유럽영화, 그리고 일본영화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그런데 좀 색다른 점이 있다. 웬만한 매장엔 에로영화, 그것도 우리 식으로 하자면 ‘일반’ 에로영화에서 소프트포르노 수준까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좀더 전문적인 상점도 있다. 도쿄 아키하바라나 시부야 근처를 뒤져보면 하드코어 수준의 성인영화를 판매하는 점문 상점이 따로 있다. 뿐만 아니다. 아예 B급영화 전문점이 따로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도 에로영화로 출발


(사진/로망포르노로 영화연출을 시작한 일본의 유명감독 수오 마사유키와 와카마쓰 고지(위쪽부터) )

미국과 일본 등의 공포영화와 에로영화, 그리고 특수촬영물에 이르기까지 B급영화만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이런 곳들은 항상 마니아들이 모여 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영화 표지를 꼼꼼히 체크하면서 물건을 고르고, 상점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감탄스런 얼굴로 쳐다보곤 한다. 그들에겐 폭력과 선정성, 그리고 싸구려 전통이 대중문화의 자연스런 일부분인 것이다.

얼마 전 국내에서 열렸던 한 영화제에서는 이색적 프로그램이 선보였다. ‘로망포르노 걸작선’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에로영화들이 소개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국내 관객에겐 좀 낯선 영화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눈길을 끄는 점은 구마시로 다쓰미, 와카마쓰 고지, 제제 다카히사, 수오 마사유키 등 로망포르노의 감독들이 모두 일본의 유명감독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로망포르노에서 영화연출을 시작한 이들이다. 그렇다면 과연 로망포르노는 뭘까. 포르노의 일종인가?

일본영화에는 로망포르노라는 독특한 장르가 있다. 어떤 견지에서 보면 로망포르노는 일종의 소프트포르노라고 할 수 있다. 특별하게 영화 장르를 규정하는 점이 있다면, 출연배우들의 섹스장면이 영화에 빠짐없이 들어있는 정도랄 수 있는 대표적인 B급영화다. 이 로망포르노는 1960년대부터 일본에서 자리잡았는데 당시 일본 영화시장에서 40%가량을 점유하는 기현상을 빚기도 했다. 일본영화계에선 닛카쓰(日活)라는 회사가 당시부터 로망포르노 계열의 영화를 꾸준하게 만들었다. 흔히 말하는, 저질영화이자 싸구려영화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제작사였다. 그런데 이 닛카쓰를 통해 영화계에 발을 딛은 감독 중에선 현대 일본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장들이 꽤 있다.

이같은 현상은 당시 일본사회의 분위기와 연결돼 있다. 전공투 등의 학생운동권에 몸담고 있던 젊은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했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운동권 출신을 기꺼이 받아주는 곳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답답한 분위기에서 이들에게 일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 싸구려 영화판이었다. 주류이기를 포기한 이들은 비주류에 몸담음으로써 자신의 억압된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었다. 당시 닛카쓰사가 초짜 감독들에게 요구한 것은 간단했다. “섹스장면이 영화에 꼭 포함돼야 할 것”뿐이었다. 이외에는 따로 간섭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성과 폭력, 그리고 정치적 회의주의가 자유롭게 배어든 작품들이 만들어졌고, 이는 역설적으로 일본영화에 새로운 활력으로 작용했다. B급문화판이 젊은 영화인들에게 터놓고 사회에 대한 공격성을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위에 언급한 감독들 외에도 최양일, 구로사와 기요시, 모리타 요시미쓰 등 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들은 로망포르노에서 출발하거나 에로영화 전문제작사를 통해 대부분 배출되었다. 섹스장면을 뺀 다른 영화장면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다양한 영화적 실험을 하며 저마다 자신의 영화어법을 담금질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한 장면을 뺀 ‘나머지’에서…

1970년대를 기점으로 닛카쓰의 로망포르노는 점차 하향곡선을 그렸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일본영화 감독들은 싸구려영화를 만드는 것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공한 뒤 각광받는 주류문화판으로 갈지, 주목을 덜 받지만 자유로운 비주류로 남을지는 각자 선택할 수 있으니까.

로망포르노 외에도 일본 대중문화에선 B급의 전통이 꽤 길다. 음악 분야에선 1969년 일군의 록 음악인들이 거리공연을 펼치고 스스로 제작비를 투자하는 이른바 ‘자주음반사’ 전통이 생겨났다. 일본만화에서도 일본영화와 비슷한 양상이 전개됐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학생운동으로 퇴학당한 이들이 갈 곳이 없자 살 길을 찾은 것이 포르노만화 출판사였다. 이들은 출판만화에서 새로운 점을 체득했다. ‘야한 장면이 80%만 차지해도 만화의 판매부수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야한 장면을 뺀 나머지 부분에서는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온 가장 걸출한 B급만화스타가 바로 일본 성인만화의 거장 야마모토 나오키(山本直樹)였다. 야마모토 나오키는 원래 ‘모리야마 토’라는 필명으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포르노만화를 그리기 시작해 이후 점차 작품성 높은 성인만화를 그려 필명을 날렸다. 지금은 라는 저예산 하드코어 만화잡지를 만들어 책임 편집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한마디로 일본만화에서 성인용 B급시장을 개척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일본 대중문화는 로망포르노에서 언더그라운드 문화, 성인만화, 그리고 특수촬영물의 전통에 이르기까지 B급문화의 전통을 굳건하게 하는 것을 기반으로 스스로 문화적 다양성을 갖춘 셈이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의 B급문화는 어떨까. 미국의 경우, B급영화의 제왕이 있다. 바로 로저 코먼이다. 원래 영화사의 일반 사원으로 일했던 로저 코먼은 직접 영화제작사를 설립한 뒤 싸구려 장르영화들을 제작했다. 이나 , 그리고 등 공포와 SF, 액션 계열의 장르영화를 순전히 조잡한 방식으로 만들어냈다. 그는 심지어 영화 한편을 만든 뒤 영화가 성공하면 찍다 남은 필름을 편집해 속편이라고 포장해 시장에 내놓기도 했다. 그런데 이 괴짜 같은 인물이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났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시즈, 피터 보그다노비치 등 이후 쟁쟁한 거장이 된 감독들을 직접 양성하고 배후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면서 미국영화의 틀을 견고하게 한 인물이 로저 코먼이다.

로저 코먼의 끔찍한 공포!

그가 영화를 만드는 원칙은 단순했다. 저예산으로 만들되, 충분히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 영화를 만들 것. 로저 코먼이 능력이 없고 영화적 안목이 뒤떨어지기 때문에 이런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다. “난 제도권 밖에서 능력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류에 편입되면 내 자율성을 상실하게 될 테니까.”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로저 코먼은 주류문화의 획일성과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것을 값싸고 경제적인 방식으로 해냈을 따름이었다. 동료였던 바버라 보일은 로저 코먼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의 머리 위에 누군가 있고, 무엇인가를 의식하며 일하는 것에 끔찍한 공포를 갖고 있었다.” 로저 코먼이 ‘창조적인’ B급문화의 전통으로 미국영화계에 뿌리내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김의찬/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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