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대응에서 ‘모범 사례’로 자주 꼽히는 미국은 장애인·노인 등 ‘재난 약자’의 대응 시스템 체계도 비교적 잘 짜놓았다. 이는 하루아침에 만든 것이 아니다. 재난을 겪은 뒤 문제를 파악하고, 재난 약자들의 의견을 들어 개선하는 ‘기본’을 지키며, 재난 발생시 ‘없는 존재’로 다루었던 재난 약자에게 ‘시민권’을 부여해왔다.
“브레이크를 잠그고, 머리와 목을 보호하라”
미국의 재난 약자 지원 제도는 2001년 9·11 테러,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을 통해 개선돼왔다. 미국은 9·11 테러 때 세계무역센터 안에 있는 장애인들을 대피시키고 구조할 때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미국 재난 기관은 장애인 등 재난 약자에게 심층면접 조사를 한 뒤, 휠체어 장애인들을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대피시킬 수 있는 ‘피난 의자’ 구비, 시각장애인을 위한 양방향 비상대피 통신시스템, 비상 전원 확충 등을 새 건물에 의무화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재난 때 뉴올리언스 지역의 피해가 흑인·히스패닉, 고령자·장애인 등에게 집중된 것이 통계로 드러나자 이후 각 지방정부는 재난 약자를 위한 정보 전달체계를 개선하고, 재난 약자 리스트·긴급연락망 작성, 무료 공공 운송수단 확충, 정기 교육·훈련 실시 의무화 등의 대책을 추진했다.
재난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 재난 약자 시스템을 개선한 국가들을 보면 통합된 플랫폼에 구체적이고 표준화된 장애인 재난 매뉴얼을 구비하고, 다양한 장애 유형을 가진 이들이 재난 매뉴얼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놓은 게 눈에 띈다. 미국 연방재난관리청 누리집에는 수어통역, 자막이 동시에 제공되는 재난 상황별 행동요령 영상자료가 올라 있다. 수어통역사가 화면의 작은 원 안에서 수어를 통역하는 게 아니라, 비장애인과 함께 내용을 전달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미국 국토안보부와 지진 빈발 국가의 연구단체로 구성된 지진국가연합(ECA)의 ‘장애인을 위한 지진 대비 가이드’를 보면 지진 발생시 휠체어 이용자에게 “휠체어 브레이크를 잠그고, 머리와 목을 보호하라”며 그림을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탁자 밑으로 들어가라”는 국내 재난 매뉴얼보다 구체적이고 알기 쉽다.
8차례 교육이 끝나자 요령 인식하기 시작
재난 매뉴얼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교육·훈련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미국에서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마을에서 지내본 박서진씨는 “1년에 한 번 화재 대피 훈련을 할 때 비장애인 중 누가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을 이동시킬 것인지, 각각의 방을 누가 확인할 것인지를 먼저 결정한다. 대피 훈련 기준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 훈련해야 했다”고 경험을 전했다.
지난해 SK행복나눔재단이 SK 대학생 자원봉사단 ‘써니’(SUNNY)와 함께 진행한 ‘세이프 투게더’ 프로젝트 결과를 보면, 장애 특성에 맞는 구체적인 매뉴얼 마련과 교육·훈련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지진 대피 훈련에서 장애인이 배제된다는 청와대 청원을 보고 지진 매뉴얼 작성과 발달장애인 재난 교육 프로젝트를 기획한 심인집(27)씨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아 발달장애인 특성에 맞는 교재(그림·스티커)를 개발해 교육과 체험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방식으로 했다. 8차 교육이 끝난 뒤 설문조사를 해보니 발달장애인들이 재난 특성과 대피 요령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참고문헌
<대규모 재난시 재난약자 지원방안>(재해구호협회·2017)
국회 ‘장애인 안전종합대책 이행을 위한 정책 간담회’ 자료집(2019)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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