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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하지만 확실한 실천

독자들이 먼저 준비한 후원제… 안착 단계로 들어선 한국 저널리즘 후원
등록 2019-03-19 11:11 수정 2020-05-03 04:29
후원제를 하는 국내 언론사들의 누리집 갈무리.

후원제를 하는 국내 언론사들의 누리집 갈무리.

류이근 편집장이 비밀처럼 간직하고 있던 후원제를 수면 위로 올린 것은 김민식(가명) 독자였다. 그는 지난해 10월30일 ‘묻고 싶습니다’라는 제목의 전자우편을 류 편집장에게 보냈다. 2009년 검찰 수사를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뒷모습을 담은 ‘굿바이 노무현’(제756호) 표지가 묵직한 질문과 함께 담겨 있었다. “한겨레는 노무현에게 왜 이리 잔인하게 굴었는지요? 선명성으로 순결함을 증명하고 싶었을까요? 그렇게 해서라도 권력과 광고주(재벌)와 적당한 타협을 하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묻어가고 싶었나요?”

광고 논란이 후원제 제안으로

류 편집장과 서너 통의 전자우편을 주고받은 뒤 그는 그해 11월27일 “후원금제 도입은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3월12일 과 한 통화에서 김민식씨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의문이 후원제 도입 제안으로 이어진 맥락을 이렇게 설명했다. “진보 매체들이 진보 쪽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어려워질 때 조·중·동이랑 똑같이 물어뜯는 이유가 뭘까. 광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대기업에서 광고 받아서 회사를 운영하다보니까 자립을 하지 못하고, 결국 그렇게 되는 것 같다. 후원을 해서 광고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면 눈치 보지 않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지 않겠나 생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보도가 광고주의 눈치를 본 결과라는 김민식씨의 결론은 소통 부족이 낳은 오해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한겨레의 높은 광고 의존도가 낳은 현상으로 보기에는 무리다. 하지만 구독 기반이 무너지고 광고 의존도가 심화되는 시대에 언론이 처한 본질적인 위기를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한 언론사들의 물적 기반을 자처하는 ‘저널리즘 후원자’라는 새로운 유형의 뉴스 소비자들이 나타난 배경이 바로 여기 있다.

“후원은 작은 힘이지만 제가 할 수 있는 (확실한) 실천이에요.”

소확행이 아니다. 소확실이다. 충북 옥천군 이원면에 사는 박미정(46)씨는 3월13일 과 한 통화에서 자신의 저널리즘 후원 행위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행복’을 뜻하는 소확행에서 ‘행복’이 ‘실천’으로 변주됐다. 박씨는 와 에 다달이 2만원씩 후원한다. 박씨에게 후원은 “언론이 자신을 대신해 올바른 목소리를 내도록 돕는” 실천이었다. 2012년 해직 언론인들이 를 처음 만들어 회원을 모집한 게 계기가 됐다. ‘광고와 협찬을 받지 않고 시민들의 후원으로 제작, 운영된다’는 에 박씨도 후원자로 동참했다.

‘언론사 기부할 수 있다’ 답변에서 1위

저널리즘 후원은 박씨가 사는 옥천군에서 발행되는 군 단위 지역언론인 으로도 이어졌다. 1988년 이 국민의 모금으로 만들어진 국민주 신문이라면, 은 군민의 모금을 통해 ‘군민주’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은 어느 정도 이상의 지분을 특정 개인이나 단체가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원칙을 세웠다. 박씨는 자신이 언론사의 ‘연대 구독 회원’이 된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부당한 일이 벌어져도 학연, 지연, 혈연에 얽힌 지역언론은 잘못을 덮어주려 했다. 은 연고에 매이지 않고 올바른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규모가 작아 재정적으로 취약하고 인력도 부족할 거라고 생각했다. 언론이 광고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올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믿음에 을 후원했다.”

지난해 1∼2월 한국인 2010명을 포함해 37개국에 사는 7만4천여 명을 조사한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18’(한국언론진흥재단·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를 보면, ‘내가 좋아하는 언론사가 비용을 충당하지 못하면 기부에 참여하겠느냐’는 질문(22개국 응답)에 한국의 긍정 비율은 29%로, 조사 대상국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김선호 한국언론진흥재단 선임연구위원은 “언론사의 광고 매출이 급감하고 있다. 기존 광고 수익만으로는 순수한 저널리즘 활동을 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고품질 뉴스를 안정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대안 언론이나 새로운 산업 기반이 필요한 때다. 이번 조사 결과는 한국인들이 큰돈이 아니어도 자신과 사회·경제적 가치를 공유해온 언론사가 위기에 처한다면 기꺼이 도와줄 의사가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저널리즘을 후원하는 행위는 실험 단계를 넘어 안착 단계에 들어갔다. 말고도 등 여러 언론사가 후원제를 하고 있다. 뉴스 콘텐츠는 무료로 개방하고, 운영자금은 후원금 등으로 충당하는 방식이다. 매체별로 보면 광고와 협찬을 받지 않고 후원금으로만 운영하는 가 있고, 등은 광고와 후원을 받는다. 시사주간지 가운데서는 이 지난해 캠페인으로 후원제를 본격적으로 시행하면서 선발 주자가 됐다.

은 ‘정기후원’ ‘정기구독’ ‘평생 독자’ ‘소액 후원’의 매체 후원 말고도 개별 기사에 대한 ‘소액 결제’ 등 후원제와 관련해서는 비교적 다양하고 적극적인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 2013년 협동조합으로 전환한 은 후원자가 조합원도 될 수 있는 독특한 형태다.

“전망과 가치를 공유한다면”

지난해 ‘창간 30년, 한겨레신문 창간주주들이 바라본 신문의 정체성과 당면과제’라는 논문을 발표한 홍성철 경기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교수는 의 후원제 전망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독자들이 꼽은 한겨레의 브랜드 가치는 정권에 대한 견제와 비판, 진보 정치와 통일, 노동 분야에서 어젠다를 선점해온 것이었다. 이 앞으로도 정직한 보도, 성역 없는 보도를 하겠다는 전망과 가치를 후원자들과 공유한다면 과거 창간 당시 창간주주들처럼 자신을 대신해 이 한국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기꺼이 참여하는 후원자가 나타날 것이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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