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저렇게 손잡고 소성리에 오면 되겠네.”
4월27일 오전 9시30분, 판문점 군사분계선 앞에 마주 선 남북 정상이 손을 잡자 소성리 할매들의 얼굴에 엷은 웃음이 돌았다.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마을회관에 모인 할머니 6명은 350여km 떨어진 곳에서 펼쳐지는 역사적인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잘 만났다.” “아유, 눈물이 나네….” 어떤 이는 박수 치고, 어떤 이는 눈물을 찍어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주한미군과 박근혜 정부 국방부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장비를 성주 골프장(롯데스카이힐 성주 컨트리클럽)에 실어온 지 1년하고도 하루가 된 날이었다.
하지만 할매들은 한반도에 불어온 봄바람을 즐길 수 없었다. 나흘 전인 4월23일 국방부는 성주 사드 기지에 공사 장비와 자재 이동을 재개했다. 27일 새벽에도 공사 장비가 차량에 실려 들어갔다. “북한의 핵위협 때문에 배치를 미룰 수 없었다”는 정부의 명분이 약해진 시기에 벌어진 상황에 할매들은 당황했고 분노했다. “딴거 없다. 사드 뽑아내고 경찰놈들 지발 좀 가고… 우리는 그게 소원이오.” 도금연(80) 할머니의 목소리가 격앙된 뉴스 앵커의 말을 잘랐다. 텔레비전을 향하던 시선은 정부와 경찰에 대한 분노와 ‘예전처럼 살 수 있다’는 기대감이 교차하는 소성리라는 현실로 돌아갔다.
할매의 소원은 사드 철수
할매들은 나흘 전 기억에 화를 삭이지 못했다. 1년 전에도, 8개월 전(2017년 9월7일 문재인 정부 사드 발사대 4기 추가 배치)에도 주민들을 끌어내던 경찰을 맨몸으로 막아섰던 임순분(65) 소성리 부녀회장은 “할매들이 밤만 되면 죽겠답디다”라고 말했다. 4월23일 아침 사드 기지가 있는 달마산(해발 680m)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인 진밭교를 막던 주민들과 시민단체 활동가 150여 명은 22개 중대 1700여 명의 경찰에게 강제로 끌려나갔다. 주민들은 이 과정에서 부상자 20여 명이 생겼다고 밝혔다. 당시 경찰은 커터칼로 주민들이 몸에 두른 녹색 그물을 자르기도 했다. 임 부녀회장은 “이 할매 저 할매, 밤만 되면 그 상황이 떠올라 잠을 못 이룬다. 얼마나 놀랐겠냐”고 했다. 신경안정제를 삼키고 잠을 청한다는 할머니도 있었다.
국방부는 성주 사드 기지에 공사 장비와 자재를 들인 것은 비가 새는 군인들의 숙소 지붕 수리와 오수 처리 시설 설치 등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난해 사드 발사대 4기를 추가 배치한 다음날(9월8일) “사드 배치는 안보의 엄중함과 시급성을 감안한 임시 배치”라고 강조한 문재인 대통령의 말을 또렷이 기억하는 주민들은 당황했다. 1년 전 이맘때 대선을 앞두고 기습 배치한 박근혜 정부의 ‘사드 알박기’에 대한 기시감에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임 회장은 “정상회담을 앞두고 굳이 할 필요가 없지 않나. 북-미 정상회담까지 잘되면 동작 그만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북한이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하면 사드가 필요 없지 않나”라며 “사드가 박근혜 알박기로 들어왔는데, 이번에도 알박기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까지 든다”고 말했다.
남북 두 정상이 판문점 평화의집 2층 회담장으로 들어가자, 할매들은 마을회관에서 700m 떨어진 진밭교로 가기 위해 봉고차에 올랐다. 남북 정상이 군사분계선에서 손을 맞잡고 남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시간, 진밭교에선 사드 기지로 가는 도로를 막는 경찰들과 평화지킴이(시민단체 활동가), 원불교 성주성지수호비상대책위원회 관계자들 사이에 고성이 오갔기 때문이다. 나흘 전부터 날마다 진밭교에서 사드 기지 방향으로 400여m 떨어진 경찰 출입통제선까지 올라가 기도회를 열던 이들을 이날 아침 경찰이 막아섰기 때문이다. 전날도 출입을 허용했던 경찰은 “피켓을 들고 여러 명이 올라가면 집회가 될 수 있다”며 3m 남짓한 진밭교 길목을 방패를 든 채 막아섰다.
남북 군사분계선이 허물어진 순간에 소성리는 작은 ‘대치선’을 두고 갈등하고 있었다. 김성애(62) 원불교 교무는 “한쪽은 평화협정을 맺자는데 한쪽은 전쟁하자고 한다. 소성리는 대한민국이 아니냐”고 소리쳤다. 김 교무는 “국방부에 오늘은 좀 쉬자고 했는데…”라며 고개를 저었다. 현장의 경찰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어 “출입 인원을 제한하고 이동 인원을 보고하라”는 경찰의 요구에 평화지킴이와 원불교 관계자들은 항의하며 연좌시위를 했다.
진밭교에 도착한 할매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남북 정상회담을 하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남북 정상회담 반대하는 사람이냐.” 이들은 “사드 뽑고 평화 심자”라는 구호를 외친 뒤 봉고차에 올랐다. 모두 나흘 전 경찰에게 끌려나간 뒤 몸이 성치 않아 한의원으로 가야 했다. 1년 전 경찰 팔꿈치에 인중을 맞아 이빨을 뽑은 임 부녀회장은 손수건을 마스크 삼아 입을 가리고 다닌 지 1년이 됐다. 제때 치료를 못 받아 지금도 상태가 좋지 않다.
“대통령님 요번에는 살펴주이소”
할매들에게 지난 1년의 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앞으로의 시간은 어떻게 견뎌낼까. 임 부녀회장이 할매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들 생각이 어떠냐면… 지난해에는 농사를 못 지어서 조바심을 냈어요. 결국 수확할 게 없습디다. 사드 뽑으려면 한 해 농사 못 지을 수 있다 싶었는데…. 올해도 못자리 준비도 못하고 있어요. 소성리 사람들은 정부에 원하는 거 아무것도 없어요. 옛날대로 살도록 가만히 두면 돼요.”
물론 할매들은 앞으로의 시간이 지난 1년과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도 조심스럽게 품고 있었다. “문 대통령이 요번에는 우리를 살펴줘야 한다. 국민들이 찍어서 됐지 않았냐”는 도 할머니의 말에 박아무개(68) 할머니는 “믿어야지, 저렇게(남북 정상회담) 하는데”라며 “믿어야지”라는 말을 되뇌었다. 남북 정상이 손잡은 모습에 눈물을 흘린 그는 “믿는다”는 말을 반복했다. “믿고 있죠. 그나마 믿으니까 생활하지, 안 그러면 스트레스 받아서 못 살아.”
한반도에 사는 모두가 평화에 대한 기대로 들뜬 이날, 소성리는 ‘섬’이었다. 박 할머니의 ‘믿음’에 정부는 어떤 답을 내놓을까.
성주(경북)=글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