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탄으로 시작해 감동으로 끝났다. 4월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나 이뤄진, 2018 남북 정상회담은 전세계로 생중계되는 드라마였다.
해맑은 청년과 온화한 ‘아빠미소’오전 9시30분.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의 프레스센터를 가득 채운 내외신 기자 3천 명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북쪽 판문각을 나와 처음 모습을 드러내자 “오오~” 소리가 나왔다. 두 정상이 악수하는 순간 환호와 박수가 울려퍼졌다. 이어 예상치 못하게 두 정상이 군사분계선을 도로 넘어서자 외마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올백머리에 검은 인민복이 풍기는 이질감은 이내 사라졌다. 북한 매체에선 늘 사열대 위에서 눈을 내리깔고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던 김정은 위원장도, 이날만큼은 해맑은 웃음을 띤 35살 청년이었다. 돌발행동도 하고 농담도 던지며 인간미를 한껏 뿜어냈다. 문재인 대통령은 시종일관 온화한 ‘아빠미소’로 지켜봤다.
군사분계선에서 두 정상이 손을 맞잡은 뒤 회담장인 평화의집으로 이동하는 길, 의장대 사열에서 중요한 대화가 오갔다. 청와대로 초청하고 싶다는 문 대통령의 제안을 김 위원장이 덜컥 받아들인 것이다. 문 대통령은 “외국 사람들도 우리 전통 의장대를 좋아한다. 그런데 오늘 보여드린 전통 의장대는 약식이라 아쉽다. 청와대에 오시면 훨씬 좋은 장면을 보여드릴 수 있다”고 완곡하게 초청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김 위원장은 “그런가요, 대통령께서 초청해주시면 언제라도 청와대에 가겠다”고 답했다.
‘엄근진’(엄격근엄진지)가 될 줄 알았던 남북 정상회담은 의외로 웃음 포인트가 있었다. 평화의집으로 가는 길에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동선을 착각해 김 위원장의 뒤에서 걷다가 주변의 지적으로 화들짝 놀라 황급히 물러나는 모습은 프레스센터에 큰 웃음을 줬다. 북한 사진기자가 전세계로 송출되는 생중계 카메라 앞을 가려, 두 정상의 모습 대신 북한 기자의 엉덩이만 보게 된 것도 황당했지만 ‘깨알재미’였다.
‘탈북자·연평도’ 언급한 김 위원장두 정상은 오전 10시15분부터 11시55분까지 100분간 회담을 했다. 점잖고 솔직한 지도자와 활달하고 솔직한 지도자가 만나, 속 시원하게 대화했다. 김 위원장은 머리발언에서 ‘탈북자’와 ‘연평도 주민’을 입에 올렸다. 북한 지도자가 입에 담기 쉽지 않은 단어들이었다. 남과 북의 상처를 정면으로 건드리고 치유를 기원한 것이다.
“원래 평양에서 문 대통령님을 만날 줄 알았는데 여기서 만난 것이 더 잘됐습니다. 대결의 상징인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오면서 보니 실향민들과 탈북자, 연평도 주민 등 언제 북한군의 포격이 날아오지 않을까 불안해하던 분들도 오늘 우리 만남에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이 기회를 소중히 해서 남북 사이에 상처가 치유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 위원장은 북쪽이 남쪽보다 교통이 불편하다고도 말했다. 문 대통령이 “백두산에 가보고 싶다”고 하자 나온 발언이었다. 늘 체제의 우월성을 자랑하던 북한이 자신을 낮추는 모습은 생경함을 넘어 신기했다.
“문 대통령이 오시면 솔직히 걱정스러운 것이, 우리 교통이 불비해서 불편을 드릴 것 같습니다. 평창올림픽에 갔다온 분들이 말하는데 평창 고속열차가 다 좋다고 했습니다. 남측의 이런 환영에 있다가 북에 오면 참으로 민망스러울 수 있겠습니다. 우리도 준비해서 대통령이 오시면 편히 모실 수 있게 하겠습니다.”
남북 정상회담의 생생함도 인상 깊었다. 앞서 두 차례 북한에서 이뤄진 남북 정상회담은 첫 만남과 회담 결과 발표 장면 정도만 볼 수 있었다. 이번 회담은 처음부터 끝까지 생중계로 진행돼 국민 모두가 지켜볼 수 있었다. 두 정상이 회담에서 발언하는 모습, 함께 ‘도보다리’를 천천히 산책하고 벤치에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까지 카메라에 잡혔다. 1953년생 소나무에 한라산과 백두산에서 가져온 흙을 뿌리고 한강과 대동강에서 길어온 물을 뿌리는 섬세한 이벤트도 생동감을 더했다. 청와대는 두 정상이 비공개 회담에서 나눈 대화를 언론에 브리핑했다.
“존경하는 남과 북의 국민 여러분”대미를 장식한 건 공동선언문 발표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존경하는 남과 북의 국민 여러분, 해외 동포 여러분!”이라고 말하는 순간 프레스센터가 다시 한번 술렁거렸다. 남쪽 지도자가 북한 인민들을 향해 말을 건넨다는 사실은, 30대 초반의 기자에게도 진한 감동을 줬다.
투명함과 자연스러움. 이번 남북 정상회담은 북한이 더 이상 철조망과 핵무기로 둘러싸인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사는 평범한 이웃 국가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고양(경기)=변지민 기자 dr@hani.co.kr김정은 위원장의 '말말말'
"그럼 지금 넘어가볼까요"
“그럼 지금 넘어가볼까요”
오전 9시29분 판문점 군사분계선(MDL)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나 악수했다.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온 김 위원장에게 문 대통령이 “나는 언제쯤 넘어갈 수 있겠나”라고 하자, 김 위원장이 “그럼 지금 넘어가볼까요”라며 문 대통령의 손을 이끌고 도로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
“멀다고 말하면 안 되갔구나?”
오전 회담의 머리발언에서 김 위원장은 “오늘 저녁 만찬 얘기 많이 하는데, 평양에서부터 냉면을 가지고 왔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멀리서 온 평양냉면”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다가 남북이 멀다는 의미로 들릴까봐 이내 “멀다고 말하면 안 되갔구나?”라고 김여정 부부장을 보며 웃었다. 남북 양쪽에서 웃음이 터졌다.
“새벽에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셨겠다”
오전 회담에서 두 정상이 각각 서울과 평양에서 아침 일찍 출발했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 김 위원장이 “대통령께서 우리 때문에 NSC(국가안전보장회의)에 참석하시느라 새벽잠을 많이 설쳤다는데, 새벽에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셨겠다”고 농담을 던졌다. 문 대통령이 “앞으로 발 뻗고 자겠다”고 하자 김 위원장은 “대통령께서 새벽잠을 설치지 않도록 내가 확인하겠다”고 화답했다.
“분단선이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김 위원장은 “불과 200m를 오면서 왜 이리 멀어 보였을까, 또 왜 이리 어려웠을까 생각했다”면서 “분단선이 높지도 않은데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보면 없어지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만리마 속도전을 통일의 속도로”
김 위원장은 “김여정 부부장의 부서에서 ‘만리마 속도전’이라는 말을 만들었는데, 남과 북의 통일의 속도로 삼자”고 말했다.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살얼음판을 걸을 때 빠지지 않으려면 속도를 늦춰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고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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