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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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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계 살생부, FP를 아십니까

등록 2002-01-23 00:00 수정 2020-05-02 04:22

459종이나 되는 민간자격증, 무턱대고 땄다간 돈 날리고 헛고생하기 십상

FP? 이런 자격증도 있나 싶게 낯설기 짝이 없다. 하지만 2층 상담실을 찾은 시험 준비생이라면 “아직도 FP가 없습니까”라는 말을 듣기 일쑤다. 지난 1월17일 낮 서울 보신각 뒤편 공평학원. ‘투자상담사(1·2종), 금융자산관리사(FP) 겨울방학 대특강’이라는 포스터가 계단 곳곳에 큼지막하게 나붙어 있었다.

열풍 불자 AFP·CFP 자격시험까지

FP(Financial Planner·금융자산관리사)는 한국증권업협회가 주관하는 것으로 요즘 가장 인기있는 민간자격증이다. 증권사, 은행 등 금융기관에서 일하는 직장인이라면 이 자격증을 따는 데 목을 맬 정도다.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도 FP 취득 열풍에 휩싸인 지 오래다. 증권업협회가 주관하는 민간자격종목으로 FP, 재무위험관리사(FRM), 투자상담사 1종 및 2종이 있는데 증권회사 영업직원은 모두 따도록 의무화됐기 때문이다. 그 전에 증권업계는 내부에서만 일정한 연수 뒤에 시험을 치러 100% 합격시키는 식으로 자격증을 자기네들끼리 주고받았다. 일종의 진입장벽을 쳐온 셈인데 이 장벽을 걷어내라는 민원이 빗발치자 협회는 지난 99년 자격증을 일반에 개방했고, 이어 자격증이 없으면 증권거래 업무를 볼 수 없도록 했다. 요즘 ‘사오정’(45살 정년)이란 말이 유행이지만 자격증이 없으면 이보다 먼저 직장을 그만둬야 할 판이 된 것이다. 언제 회사에서 잘릴지 모르는 신세가 된 증권사 직원들은 자연히 퇴근 뒤에 학원으로 달려가야 하는 상황이 됐다. 증권업협회쪽은 “투자상담사 자격증이 없으면 올 4월부터 당장 영업을 할 수 없게 된다”며 “아직 자격증이 없는 증권사 직원이라면 절박한 상태”라고 했다. 이날 열린 ‘FP특강’ 강사인 김승호씨 역시 “증권사 등 금융권에서는 이 자격증을 땄느냐 못 땄느냐로 명예퇴직 대상이 갈리는 판”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도입된 지 2년 만에 벌써 FP가 증권사에서는 ‘살생부’로, 금융쪽 취업준비생에게는 ‘필수 자격증’ 노릇을 하고 있다. FP특강을 듣는 대학생 지윤(23·여)씨는 “금융회사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FP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고 해 방학 중에 수강하고 있다”며 “이미 딴 친구들도 여럿”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4월 치러진 FP 3회 시험의 응시생은 2만3474명(합격자 7655명)으로 지금까지 총합격자는 1만3920명에 이른다. 투자상담사 1종 및 2종의 총자격증 취득자는 각각 1만8390명과 4만1381명이다. 증권업협회 등록자(FP 6401명, 투자상담사 2종 8841명, 투자상담사 1종 8628명)를 뺀 나머지 자격증 소지자는 대부분 대학생이나 취업준비생이다.

FP 취득 열풍이 불자 증권업협회에 이어 한국FP협회도 FP 관련 민간자격증을 신설했다. 준재무설계사(AFP) 및 국제재무설계사(CFP) 자격시험이 그것이다. 지난해 4월 1회 시험 이후 지금까지 AFP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은 1477명에 이른다. AFP는 CFP 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전 단계로, 한국FP협회는 올 하반기에 CFP 1회 시험을 치를 예정이다. 한국FP협회쪽은 “증권업협회에서 주관하는 FP는 주로 증권 관련 분야에 필요한 것이지만 CFP는 국제적인 전문 자격증”이라며 “외국 자본과 제휴하는 국내 은행들의 경우 외국 자본쪽으로부터 ‘거기 CFP가 몇명이나 있냐’는 질문을 받고나서 우리 협회쪽에 ‘CFP가 뭐냐’고 물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생 지윤씨는 “친구 중에 FP와 비슷한 CFP 자격증을 따기 위해 준비하는 부류도 많다”고 말했다.

공인받은 민간자격증은 28종뿐

FP를 비롯해 금융쪽 민간 자격시험을 시행하고 있는 기관은 한둘이 아니다. 한국금융연수원도 따로 FP 자격증을 주관하고 있고 곧 신용위험분석사(CRA)까지 도입할 예정이다. 증권업협회도 올해 증권분석사(CIA)를 새로 시행하기로 했다. 민간자격증이 이처럼 봇물터지듯 쏟아지고 있는 건 지난 97년 자격기본법이 제정되면서부터다. 자격기본법은 ‘국가 외에 법인, 단체 또는 개인은 누구든지 민간자격을 신설하여 관리운영할 수 있다’(15조)고 규정해 국가 주도의 자격제도에 민간이 참여하는 길을 터줬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조사 결과 민간자격은 현재 459개 종목(시행기관 189개)으로, 이 가운데 시험을 몇 차례 이상 치른 121개 자격증만 보더라도 총취득자는 91만7천명에 이른다. 무려 21만명이 딴 종목도 있다. 물론 민간자격증이 우후죽순 난립하는 데는 고용불안과 취업난이 한몫 거들었다.

민간자격에 대해 국가가 공인해주는 일종의 ‘품질인증제도’도 있다. 그러나 공인받은 민간자격은 현재 28종에 불과하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김현수 연구원은 “민간 자격시험 시행기관 중 필요성이나 수요에 대한 전문성이 약하고 응시료 수입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곳이 상당수”라며 “협회, 학회 등의 기관 명칭을 쓰고 있지만 직종에서 대표성을 갖는 기관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물론 증권업협회처럼 민간자격증이라도 국가자격 못지않은 공신력을 갖췄기 때문에 “우리는 굳이 국가공인자격화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종목도 있다. 자격기본법의 취지에 비춰볼 때도 국가자격이냐 민간자격이냐 여부가 중요한 건 아니다. 그러나 민간자격증은 일부 종목을 빼고는 국가자격과 달리 취득이 곧 취업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면허성 자격’이 아닌, 일정 교육을 마치고 검정을 통과했다는 ‘능력인정형’ 자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민간자격 시행기관은 “공부하면서 그 분야를 알게 되고 자기에게 맞는 진로를 찾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절박하게 자격증에 목매다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은 한가롭기만 할 뿐이다. 민간자격증을 따려는 사람이 이것저것 따져보고 ‘잘 골라서’ 따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FP협회가 주관하는 CFP의 경우 증권회사에서는 자격증으로 쳐주지 않는다. 자격증 정보 사이트인 윈즈닷컴의 이재열 대표는 “CFP는 은행·보험업계에서 관심을 두는 분위기”라며 “그쪽이 아닌 증권사쪽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증권업협회의 FP를 따야 한다”고 말했다. 거꾸로 증권업협회의 FP는 은행·보험쪽에서는 ‘취업의 보증수표’가 되지 못할 수 있다. 자격증 이름이 비슷하다고 아무 거나 따게 되면 먼지만 켜켜이 쌓이는 ‘장롱 자격증’이 될 수 있다.

자격증에 속고 돈에 울고…

무턱대고 땄다가 돈 날리고 헛고생하는 등 낭패보기 십상인 게 부동산 관련 민간자격증이다. 부동산쪽은 ‘00연합회’가 주관하는 부동산경매분석사를 비롯해 부동산권리분석사, 공·경매사, 부동산투자분석사 등 신종 자격증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게 그것 같아’ 헷갈릴 뿐 아니라 시행기관도 제각각이다. 단순 수료증에 불과한데도 ‘부동산펀드매니저 과정’ 같이 자격증과 혼동하기 딱 알맞은 전문교육과정도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어떤 곳은 애초 부동산재산관리사로 종목을 개발했다가 나중에 ‘재산’을 슬쩍 빼고 부동산관리사로 종목을 바꿔 시험날짜를 연기하기도 했다.

주택관리사쪽도 각종 민간자격이 난립하고 있다. 국가자격인 주택관리사(보) 시험을 주관하는 건교부는 “빌딩관리사니 시설관리사니 하는 민간자격증이 생겨나고 있지만 주택관리사와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도 잘 모르겠다”며 “민간자격증에 대해 우리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어려움을 털어놨다. 자동차 분야도 마찬가지다. 건설교통부 자동차관리과는 “자동차관리사니 자동차중개사니 하는 민간자격증이 생기고 있지만 창업이나 취업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고 한마디로 필요없는 자격증”이라고 잘라 말했다. 정비, 매매, 폐차 등 각 분야 자격증이 이미 다 있는 데도 그럴듯하게 광고한 뒤 비싼 교재를 팔아먹고 있다는 얘기다. 별 생각없이 민간자격증에 손댔다가는 취업은커녕 ‘자격증에 속고 돈에 우는’ 피해를 볼 수도 있다.

오는 3월 첫 시험을 치르는 공·경매사자격 교육기관쪽은 “첫 시험이 가장 따기 쉽다”며 “지금 따놓으면 나중에 공인자격화될 때 똑같이 인정된다”고 말했다. “공인자격화되면 시험이 어려워진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에 대해 노동부 자격기준과는 “일정기간이 지나거나 그 종목에 대한 국가자격이 신설되면 자동적으로 국가자격으로 바뀐다는 건 허위광고”라며 “나중에 국가공인을 받더라도 그 전에 취득한 자격까지 소급해서 자동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둬야 한다”고 당부했다. 모든 민간자격증이 교재를 팔거나 학원수강비를 챙기기 위한 상술에서 비롯된 건 아니지만 국가자격인지 여부가 혼동된다면 자격포털사이트(Q-net.or.kr)를 참고하면 된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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