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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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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등급 매기다 사람 죽는다

심상정·유승민, 부양의무제 폐지 공약…

근로능력평가제 개선 공약 내놓은 후보는 없어
등록 2017-03-09 22:01 수정 2020-05-03 04:28
<font color="#006699">2012년 8월7일 아침 경남 거제시청 직원이 시청 화단에서 이아무개(87·여)씨가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씨 옆에는 유서와 제초제가 든 작은 손가방이 놓여 있었다. 그동안 한 달 50여만원의 생계급여로 살아온 이씨는 부양의무자인 사위가 시급 6천원짜리 조선소 협력업체에 취직하면서 수급이 중단됐다. 이후 이씨는 몇 번이나 시청을 찾아가 사정했지만 다시 수급을 받을 수 없었다. 유서에는 “살기도 힘든데 기초생활 지원금 지급이 중단된 게 원망스럽다” “법이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font>

한국에서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자가 되려면 부양의무자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부양의무자가 없거나, 있어도 부양받을 수 없는 상황이어야 한다. 부양의무자는 수급자의 부모와 자녀, 그들의 배우자다. 부양의무자의 소득이 적어 ‘부양능력 없음’으로 평가되면 생계급여를 받을 수 있다.

‘부양능력 없음’의 기준 소득은 한 달 165만원(2017년 기준)이다. 부양의무자가 월 165만원 이하를 번다면 부양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부양의무자가 월 165만원 이상 231만원 이하를 벌면 액수에 따라 생계급여가 차등 지급된다. 부양의무자의 월급이 231만원 이상이면 생계급여는 지급되지 않는다. 월소득 231만원 이상을 버는 사람은 부모를 부양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부양능력 있음’ 기준 월소득 231만원 </font></font>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인한 사각지대에는 117만 명(2010년 기준)이 있다. 통계에 드러나지 않는 사각지대까지 포함하면 그 수를 가늠할 수 없다. 부양의무자의 소득과 재산이 적어 수급자가 될 가능성이 큰 사람들도 부양의무자로부터 금융정보 제공 동의서 등의 서류를 받는 것이 부담스러워 신청을 포기하는 이가 많다. 부양의무제는 가난으로 인해 가족관계가 단절되거나 복잡한 가족관계를 가진 사람들에게 수급 신청조차 포기하게 만드는 높은 장벽으로 작용한다.

통계청의 ‘2016년 사회조사 결과’를 보면, ‘부모 부양을 가족이 해야 한다’는 의견은 30%로 나타났다. 2008년 40%에서 하락한 수치다. ‘부모의 생계는 부모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수치는 11.9%에서 18.6%로 늘었다. 이런 사회 인식의 변화 속에 가난의 책임을 가족에게 떠넘기는 복지 시스템은 이미 낡은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size="4"><i><font color="#991900">가난의 책임을 가족에게 떠넘기는 복지 시스템은 이미 낡은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font></i></font>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부양의무제 전면 폐지에 필요한 예산은 7조8천억원이다. 기존 기초생활보장제도 예산과 합하면 15조원이다. 이는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1% 수준이다.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해결 가능한 수치다. 빈곤사회연대는 3년 동안 시기별로 3단계(1단계 주거급여, 2단계 의료급여, 3단계 생계급여)에 걸쳐 폐지하는 방안을 내놨다.

이번 대선에서 부양의무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건 대선 후보는 정의당 심상정 후보와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다. 지난 2월19일 유 후보는 “부산의 한 아버지는 이혼 후 만나보지도 못한 딸이 연봉 2천만원의 일자리를 구한 것 때문에 수급 탈락 통보를 받고 자살했다.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송파 세 모녀’도 수급 대상이 될 수 없었다”며 부양의무제 폐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반면 근로능력평가제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대선 주자는 눈에 띄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질병 등으로 인해 일할 수 없는 많은 이들이 근로능력평가제 때문에 노동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9조 5항을 보면, 근로능력이 있는 수급자에게 자활에 필요한 사업에 참가할 것을 조건으로 해 생계급여를 실시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근로능력평가는 의학적 평가와 활동능력 평가의 두 단계를 거쳐서 진행된다. 의학적 판정은 의사의 근로능력평가용 진단서에 따른다. 활동능력 평가는 국민연금공단 소속 조사원이 집을 방문해 대상자를 조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점수를 종합해 ‘근로능력 있음 또는 없음’에 대한 판단이 내려진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근로능력평가에 건당 2분 할애 </font></font>
일할 능력이 없는데도 자활근로를 하다가 사망한 고 최인기씨(오른쪽)의 진단서. “계단을 오르는 등의 신체활동시에는 호흡곤란 증상이 발생함”이라고 적혀 있는데도 국민연금공단은 최씨에게 ‘근로능력 있음’ 평가를 내렸다. 빈곤사회연대 제공

일할 능력이 없는데도 자활근로를 하다가 사망한 고 최인기씨(오른쪽)의 진단서. “계단을 오르는 등의 신체활동시에는 호흡곤란 증상이 발생함”이라고 적혀 있는데도 국민연금공단은 최씨에게 ‘근로능력 있음’ 평가를 내렸다. 빈곤사회연대 제공

문제는 평가 과정이 지나치게 허술하다는 점이다. 2012년 12월부터 근로능력평가의 주체가 지자체에서 국민연금공단으로 바뀌면서 ‘근로능력 있음’ 판정은 기존 5%에서 2013년 15.2%, 2014년 14.2%로 3배가량 증가했다. 2015년 1월27일 방송된 KBS 시사프로 은 국민연금공단의 근로능력평가에 대한 허술함을 지적한 바 있다. 이 프로그램은 국민연금공단이 한 해 20만 건가량의 평가를 내리면서 한 건당 겨우 2분을 할애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이에 대해 국민연금은 “2016년 기준 활동능력평가는 건당 2시간 30분이 소요되고 있다”고 전해왔다.

두 번의 심장수술 뒤 생계급여를 받고 지내던 최인기씨가 근로능력평가의 주체가 국민연금공단으로 바뀐 뒤부터 갑자기 ‘근로능력 있음’ 판정을 받은 것도 국민연금공단의 허술한 평가 방식을 잘 보여준다. 그는 일할 수 없는 몸으로 두 달 정도 아파트 주차장 청소일을 하다가 수술 부위의 염증으로 결국 사망했다.

수급자들은 국민연금공단이 허술한 판정을 내려도 쉽게 이의제기를 하지 못한다. 최인기씨는 갑작스레 ‘근로능력 있음’ 판정을 받게 된 과정이나 근거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나 정보를 받지 못했다. 판정 결과에 대해 연금공단에 재평가를 요청하거나 지자체에 행정심판 등을 청구하는 절차는 있지만 판정 근거 자체를 알 수 없으니 이의제기도 하기 힘들다. 최씨 사망 뒤 유가족들은 최씨의 근로능력평가 판정 기준 등에 대해 해당 지방자치단체(경기도 수원시), 보건복지부, 국민연금공단에 문의했으나 답을 주는 기관은 아무 데도 없었다. 수원시는 담당 업무가 아니라고 질의 자체를 다른 곳으로 이송했고, 복지부는 ‘정보부존재’ 처리했다. 국민연금공단은 개인정보 보호라는 이유를 들어 ‘비공개’ 처리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평가 기준 현실 반영 못해 </font></font>

근로능력평가 기준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은 “근로능력 유무를 과학적 잣대만으로 평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누군가의 노동능력을 평가하려면 단순히 장애 여부나 신체의 건강 상태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연금공단은 일괄적 기준만 적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근로능력 판정 기준을 보면, 수급자가 원하는 직종에 대한 조사나 어떤 근로에 적합한지에 대한 평가가 없다. 육체적 근로에 적합한지, 사무직에 적합한지, 근로 시간이나 강도 등 개인 사정에 대한 평가 없이 단순히 ‘근로능력 있음 또는 없음’의 판정만 내려진다. ‘근로능력 있음’ 판정이 내려지면 수급자가 갈 수 있는 일자리는 대부분 쌀배달이나 청소 등 육체노동을 하는 곳이다.

‘근로능력 있음’ 평가를 받고 일할 의지가 있다고 한들 일자리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정부에서 이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자활 일자리가 부족해도 일하지 않는 책임은 오롯이 수급자 개인에게 돌아간다. 일하고 싶은데 일자리가 없어도 생계급여는 나오지 않는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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