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형극의 길에서 신념을 지켜낸 시대의 거목을 추모하며

큰 인물이 세상을 뜰 때마다 ‘이로써 한 시대가 갔다’고 추모하는 수가 있다. 본받을 만한 행적을 통해 그 분야의 권위를 상징하던 분에 대한 헌사이자 아쉬움의 직절적 술회다.
고인으로 대변되던 시대의 일각이 그렇게 막을 내리고 남은 사람들끼리 새 시대를 꾸려간다는 뜻이 아니다. 이정표 같은 존재로 당자를 과거에 귀속시키기는커녕, 그가 남긴 업적을 더욱 발전적으로 이어가자는 의지의 한 표현이다.
청암 송건호 선생의 별세를 당하여 또다시 그런 감회에 젖는다. 민국일보, 경향신문, 동아일보, 한겨레신문을 거치며 보고 겪은 선생의 모습 앞에 늘 부끄러웠던 자의 심정으로 하는 말이다. 역사를 산 듯 언론인을 산 선생의 타계는 그러므로 당신이 살아낸 시대와의 고별 이상의 느낌으로 와닿는다. 지식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동시에 묻는 것 같다.
시대의 시험에 언제나 당당하게 맞서
언론인으로 일관한 선생의 성품이나 언행은 그러나 고담(枯淡)하고 조용했다. 호걸스럽지도 담대하지도 않았다. 지난 시절의 ‘지사형’ 논객을 마음먹기보다는 평범한 생활인에 가까운 저널리스트였다. 두주불사는 어림없고, 맥주 반잔에도 얼굴이 붉어져 주스나 우유를 즐겼다. 담배와도 거리가 멀었다. 신문사를 떠나 살길이 막막할 때, “담배나 술을 할 줄 아는 사람 같으면 술이나 마구 퍼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자고 싶은 생각”에 빠질 정도로 소안(素顔)의 일상을 보냈다.
때문에 선생의 티내지 않는 기개가 한층 친근하게 돋보이는 것이다. 시대가 선생을 시험하지 않았다면 심상한 언론인으로 끝났을 일생이었다. 고은 시인이 에서 읊은 ‘송건호’가 바로 그렇다.
시대는 착실한 세대주를
지조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시대는 속절없는 독서인을
거리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시대는 조심스러운 언론인을
역사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착실하고 조심스러운 언론인이 어떻게 자신을 절제하고 다그처 거목으로 풍요로웠는가를 암시하는 음운(音韻)의 역설적 장치 아니겠는가.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보라. 인권이 간데온데없고 처처에서 양심이 깨지고 배반이 죽 끓듯 하는 마당에, 끝끝내 줏대를 세우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자기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는 상황에서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그때 무너져내렸다. 처음부터 정치적 야심이 있었다면 별문제다. 큰소리 탕탕 치다가도 어느새 권력의 품안에 드는 축들이 많았다. 하나 선생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켰다. 오십 줄에 무직자가 되어 이력서를 들고 구직운동을 나서는 걸음걸음에, ‘아 괴롭다’를 소리없이 외칠 망정 유혹의 손길을 단호히 뿌리쳤다. 그리고 글쓰기에 매달렸다.
“무엇을 할까. 한참 동안 궁리를 하다가 남산의 국립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거의 매일같이 나갔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한창 글을 쓰다 피로해진 눈으로 서울을 내려다보면 참으로 상쾌했다. 멀리 신문사도 보였다. 인생만사가 모두 부질없게만 보였다. 이런 때 담배라도 한대 물어봤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화갑기념문집·‘苦行(고행) 12년, 이런 일 저런 일’)
책더미에 묻혀 대중가요 사회사도 살펴

직장을 그만둔 직후에 나가기 시작한 도서관에서는 물론, 고난의 세월을 견디며 쓰고 또 썼다. 십여권 책의 대부분이 그렇게 나왔다. 사는 재주가 붓대 쥐는 일밖에는 달리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선생은 생활의 보람을 거기서 찾았다. 아니 생애를 통틀어 쓰고 읽는 데 모두 바쳤대서 과언이 아니다. 편집국장을 지낸 기간은 아주 짧다. 시종 사설과 단평을 썼다. 선생의 글씨는 ‘지배(紙背)를 뚫는다’는 옛말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종이의 뒷면이라는 풀이 외에 문자 이상의 함의(含意)가 문면에 넘나든다는 뜻으로 더 많이 쓰는 말인데, 논객 송건호의 원고는 지배에 울퉁불퉁 자국이 날 정도였다. 원고지 칸칸에 꽉 차도록 크게 쓰는 한자 한자를 어찌나 힘을 주어 꾹꾹 눌러 쓰는지, 자칫 ‘빵꾸’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다.
독특한 필치가 기억에 새롭거니와, 글을 쓰기 위해 들이는 공력 또한 대단하고 단단했다. 중학생 때부터 시작한 책방 드나들기, 특히 고서점 순례의 못 말리는 버릇이 종생토록 이어졌다. 함께 점심을 먹고 난 뒤에도 따로 뒤처지기 일쑤였다. ‘최형 먼저 가쇼’ 하는 식으로 동료와 떨어져 기어코 책방에 들렀다. 귀한 책이라도 건진 날의 파안(破顔)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쓰인 글이 고리타분할 리 있나. 박봉을 무릅쓰고 사 쟁인 책더미와 더불어 쌓고 길들인 사고 덕일까, 시대를 앞서가는 논설이 당당했다. 남북문제에 대한 남다른 해석이나 주장, 그리고 한국 현대사 탐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해방 직후의 인물을 중심으로 파들어간 현대사는 동원된 자료의 면밀·광범함 때문에도 그 방면의 지식이 부족한 젊은이들의 주목을 끌고, 새로운 인식의 터전을 넓히는 데 공헌했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 이동녕, 안창호, 이광수, 최남선 등을 다룬 은 이런 측면에서 매우 깐깐한 역작이다.
정치·사회적인 것만을 소재로 삼지 않았다. 대중가요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글도 있다. 초창기의 에서 육이오 전후에 이르는 유행가의 사회사적인 배경을 일일이 설명했다. 자신은 조명암 작사 이봉룡 작곡인 을 즐겨 불렀다. 이 노래의 1절 후반은 ‘인생이 철길이냐 철길이 인생이냐. 아득한 지평선에 달이 뜬다 해가 뜬다’로 끝맺거늘, 당신의 일생에 뜨고 진 해와 달은 얼마일까. 아무려나 의식이 살아 있던 순간에 해가 반짝 빛났기를 바란다.
언론 자체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그만 못지않은 비판·질타의 글은 더 말할 나위 없다. 활자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실천한 셈이어서 말과 글에 더욱 체중이 실리고 진정이 넘쳤다. 무엇보다도 그런 언행일치에 꾸밈이 없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깟번에 언급한 성품의 연장선상에서 회상컨대, 선생은 걸음이 느린 만큼 세속적인 눈치 지수 또한 무척 낮았다. 누구는 그 걸음을 오리걸음에 빗대어 놀려먹고, 누구는 그토록 눈치코치 없는 양반이 어떻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을 만치 바쁜 신문사 분위기를 견뎠을까 염려했다.
그러나 선생은 걱정 말라고 거꾸로 웃었을지 모른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일 텐데, 그게 무엇이었는가를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거창하게 늘어놓을 것이 없는, 자기 직분에 대한 신념이다.

“진실 보도는 일반적으로 수난의 길을 걷게 마련이다. 권력에 저항하여 진실을 위해 살기는 어렵다. 양심적이고자 하는 신문 또는 언론인이 때로 형극의 길과 고독의 길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선비다운 선비는 뜻을 남기고 떠났다
기자의 샐러리맨화 현상은 굳이 나무랄 것이 못 된다. 세상이 옛날 같지 않고 기자직에 대한 의식 또한 판이한 터에 ‘형극의 길’은 무엇이고 ‘고독의 길’은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어디가 달라도 달라야 할 고전적 사명감 하나는 잊지 말아야 할 게다. 사서 고생할 것까지는 없어도 마음 한구석에 그만한 다짐이 있고 없고 차이가 결코 작지 않다. 송건호 선생이 온몸으로 일러주고 간 뜻이 거기 있다고 믿는다.
겉으로는 만만해 보일지언정, 웬만한 벼락에도 끄떡 않는 항심을 지킨 선비다운 선비가 그렇게 갔다. 하나 깊이 새겨 마땅한 뜻마저 함께 가지고 간 건 아니다. 그것은 남은 자들의 몫이다.
최일남/ 언론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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