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고발자 보호는 현행 법률로 충분하다.”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은 지난 12월12일 국회 국정원개혁특별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야가 국정원 개혁 방안으로 합의한 ‘내부고발자 신분 보장’에 대해 거부 의사를 밝히면서다. 내부고발자 신분 보장이 국정원 개혁 요구에 들어간 이유는 국정원 직원 정아무개씨가 민주당에 국정원의 여론 조작 댓글 활동을 제보했다가 공무상 비밀을 누설했다는 이유(국정원직원법 위반 등)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공익침해 없다며 공익신고 아니라는 법원남재준 원장이 말한 현행 법률이란 ‘부패방지법’과 ‘공익신고자보호법’이다. 2002년 생긴 부패방지법(부패 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은 공공 분야의 부패 신고를 대상으로 했다. 민간 분야의 내부고발도 활성화해야 한다는 공감대에 따라 2011년 공익신고자보호법이 시행됐다. 남 원장의 호언대로 내부고발자 보호가 잘되고 있을까. 올해 나온 사법부의 판결을 보면 아직 먼 얘기다.
2011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 이벤트는 이해관(50)씨의 폭로로 진상이 드러났다. 외국의 한 민간단체가 주관하는 이벤트에 KT가 “제주도를 7대 자연경관에 올리자”며 전화투표를 독려했고, 당시 이명박 대통령까지 투표하면서 과열 양상이 벌어졌다. KT는 국제전화라고 홍보했다. KT 새노조 위원장인 이씨는 지난해 2월 “전화투표가 사실은 국내전화이고, KT가 비싼 요금을 받아 부당이득을 취했다”고 폭로했다.
고발의 대가는 인사조치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근무하던 이씨는 석 달 뒤 연고가 없는 경기도 가평으로 전보됐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지난해 8월 공익신고자에게 불이익을 줬다며 KT에 ‘보호조치’(원상복귀)를 하라고 결정했다. KT는 이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냈다.
지난 5월16일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재판장 이승한)는 KT의 손을 들어주고 권익위의 보호조치를 취소한다고 판결했다. 공익신고자보호법 적용에 관한 사법부의 첫 판단은 “공익신고가 아니다”였다.
재판부는 이 신고가 공익신고가 아니라는 근거로 “신고와 관련한 조사 결과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무혐의 결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신고 당시의 상황을 기준으로 판단한 게 아니라, 신고 뒤 이 사건이 실제 공익침해로 확인됐는지를 따진 것이다. 사후적으로 공익침해가 확인된 경우에만 공익신고에 해당하고 공익침해 여부가 불분명한 경우는 공익신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논리다.
권익위는 “보호조치 결정은 공익신고 때문에 불이익을 받을 경우 하는 것이지 공익신고 내용이 사후적으로 공익침해 행위로 인정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공익신고 내용이 명백한 거짓이 아니므로 공익신고자를 보호해야 할 법적 실익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보통 내부고발을 하면 행정기관이나 수사기관이 조사해 고발 내용을 확인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사이 내부고발자는 조직으로부터 보복을 당하고 버림받는다. 이 때문에 공익신고자보호법을 만든 것인데, 사법부가 이런 취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반면 이씨는 별도로 전보가 부당하다는 행정소송을 냈는데 1심 재판부는 이씨의 손을 들어줬다.
보호요청 180건, 보호조치 66건내부고발자 보호에 대한 몰이해는 두 달 뒤 대법원에서도 나타났다. 이번에는 부패방지법 적용에서다. 경기도선거관리위원회가 2008년 3월 화장장 유치 문제로 하남시장 주민소환이 추진될 때 “투표 청구 서명부가 조작됐는데도 선관위 직원들이 이를 묵인했다”고 권익위에 신고하고 언론 인터뷰를 한 하남시선관위 직원 박아무개씨를 전보했다. 권익위는 부패 신고로 불이익을 당했다고 보고 징계 절차를 취소하라고 권고했지만 소송으로 이어졌다. 2009년 경기선관위는 박씨를 파면했다. 박씨가 힘겹게 복직소송을 벌이는 동안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지난 7월 “권익위가 부패 신고자를 보호 결정한 것은 부당하다”는 확정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행정소송에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행정처분의 적법성은 행정청(이 사건의 경우 권익위)이 주장·증명해야 한다”며 “경기도선관위가 박씨에 대한 징계를 요구한 것은 방송 인터뷰를 통해 선관위 입장과 다른 허위 사실을 진술했다는 이유일 뿐, 권익위에 신고했기 때문이라고 인정할 아무런 자료가 없다”고 밝혔다. 권익위는 신고와 방송 인터뷰를 같은 맥락에서 하나의 행위로 보고 이로 인해 불이익을 받았다고 봤지만, 대법원은 공식적인 징계 사유가 ‘방송 인터뷰’라는 이유로 ‘권익위 신고 때문에 징계한 것이 아니다. 부패 신고 때문에 불이익을 당했다는 사실의 입증은 권익위가 해야 한다’는 논리를 편 것이다. 내부고발자에 대한 보복은 대부분 은밀하고 교묘하게 이뤄진다. 이 때문에 부패방지법이나 공익신고자보호법은 보복 징계가 아니라는 입증을 해당 기관이 하도록 규정한다. 대법원은 이런 취지를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다.
대법원 판결 이후 권익위의 내부고발자 보호조치에 관한 소송이 두 건 더 있었다. 1심에서 모두 권익위가 승소했지만 해당 기관의 보복성 징계라는 정황이 비교적 명확히 입증된 경우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내부고발자는 불이익을 당해도 법적 보호를 받는 경우가 드물다.
국민권익위원회 자료를 보면, 2002년 이후 12월18일 현재까지 내부고발자의 보호 요청 건수는 총 180건이었다. 이 가운데 실제 보호조치가 이루어진 것은 62건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신분보장 요청 145건 가운데 48건만 인정됐고, 신변보호 요청은 22건 중 14건만 받아들여졌다. 내부고발자 신분을 공개한 데 따른 징계 요청도 13건 중 4건만 이뤄졌다.
KT 이해관씨의 판결문에는 공익신고자보호법 자체가 지닌 한계도 드러난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사기 국제전화’에 대해 KT에 전기통신사업법 위반으로 과태료 350만원을 부과했지만, 전기통신사업법은 공익신고자보호법이 공익침해 행위로 지정한 180개 법률의 위반 행위에 해당하지 않아 공익신고로 인정받지 못했다. 공익신고자보호법 입법예고 당시에는 465개 법률 위반 행위를 공익침해 행위로 지정했지만 각 정부 부처의 반발로 169개로 축소됐는데 이 과정에서 전기통신사업법이 제외된 것이다.
참여연대·권익위 개정안 추진이런 문제를 보완하고자 참여연대 공익제보지원센터는 지난 12월12일 국회에 내부고발자 보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부패방지법과 공익신고자보호법 개정안을 청원했다. 개정안은 공익신고 대상 법률을 현행 180개에서 사실상 모든 위법행위로 확대하고, 신고 당시 합리적 의심이 인정된다면 공익제보로 인정한다는 명문 규정을 두는 것을 비롯해, 공익제보자에게 불이익을 줄 경우 처벌을 강화하고 권익위의 보호조치 결정을 따르지 않으면 이행강제금을 부과하는 방안 등을 담고 있다. 국민권익위원회도 비슷한 내용의 개정안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
심사위원 20자평▶김보라미 힘내라, 이해관! 고마워요, 이해관!
김성진 공익신고보호법제 미비+법원의 보호 의지 부족
홍성수 이것이 공익신고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 공익신고일 수 있나?
이경미 사회부 법조팀 기자 kmlee@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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