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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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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의 문화유산, 처가살이

등록 2001-09-27 00:00 수정 2020-05-03 04:22

부계-모계 함께 존중했던 우리 민족… 다시 부계제 이데올로기가 저항에 부딛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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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부모의 승낙을 받아 약혼이 성립되면 신부집의 본채 뒤에 작은 별채를 지어두고 기다린다. 별채의 이름은 ‘사위의 집’. 드디어 결혼식 날이 되면 해질 무렵 신랑은 신부집 문 앞에 나타난다. 신랑은 이름을 알리고 절을 한다. 아무쪼록 신부와 더불어 잘살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사람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며 신부집 앞으로 몰려든다. 신랑은 “신부와 잠자게 해달라”고 거듭 청하고, 신부 부모는 마지못해 허락한다. 마침내 신랑은 신부집에서 마련해둔 사위의 집에 들어간다. 신부와 첫날밤은 이렇게 이뤄진다. 신랑이 가져온 돈과 폐백은 집 곁에 쌓아둔다. 결혼한 부부는 이 ‘사위의 집’에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다 자란 뒤에 따로 집을 마련해 나갈 수 있다.

‘장가간다’는 “장인집에 간다”

우리 역사 속의 한 장면이다. 처가살이의 원형을 보여주는 고구려의 이 결혼제도는 ‘서옥제’(서屋制)라고 불렸다. 우리나라에서 처가살이는 2천년의 역사를 지닌 유구한 문화유산인 셈이다.

원래 시집살이는 중국의 전통이다. 중국은 철저한 부계친족 중심으로 가계를 계승하고 아들에게만 재산을 상속했다. 결혼하자마자 시집살이가 시작되는 구조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 고대 우리 민족은 원래 부계-모계를 함께 존중했다. 그래서 아들딸에게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했고, 처가살이라는 고유한 혼인풍속을 오랫동안 지속했다. 요즘에도 결혼한다는 뜻으로 ‘장가간다’는 말을 흔히 하는데, 이는 ‘입장가’(入丈家)에서 나온 말로 사위가 장인집에 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결혼한다는 것은 곧 처가에서 사는 것을 의미했다.

권순형(이화여대 강사·사학)씨는 <우리 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청년사 펴냄)에서 “처가살이는 길고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도 고구려의 서옥제와 비슷한 풍속이 있었다. 고려의 결혼풍속은 ‘서류부가혼’(서留婦家婚) 또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으로 불렸다.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사위가 아내집에 머무르는 혼인’과 ‘남자가 여자집으로 가는 혼인’이라는 뜻이다.

권씨는 “이같은 결혼제도가 가능했던 것은 고려가 중국과 달리 부계와 모계가 모두 중시되는 양측적 친속제도(兩側的 親屬制度)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고려 때의 여성은 남성 못지않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예를 들어 여자쪽으로도 계보를 따질 수 있었다. 조선 초기 만들어진 족보들을 보면 손자로 이어지는 부계만이 아니라 사위나 외손자까지 함께 기록하고 있어, 부계만을 기록한 오늘날의 족보와는 전혀 다르다. 호적을 올릴 때도 아들 먼저 쓰고 딸을 나중에 쓰는 게 아니라 출생순서대로 올렸다. 장성한 아들이 있어도 어머니가 호주가 되기도 했다.

딸이 상속받은 재산은 시집간 뒤에도 남편 재산으로 흡수되지 않고 자기 몫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고려시대에 절에 기증한 토지를 보면 남편 소유와 아내 소유가 따로따로 명시돼 있어 이를 잘 보여준다. 명지대 박부진 교수(인류학)는 “이같은 상속제도는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했다”면서 “신사임당이 아들인 이율곡을 처가에서 키웠고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다는 재산분할기록이 이를 입증한다”고 말했다. 꼭 아들이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어 딸이 친정제사를 지낼 수도 있었다.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장인’과 ‘장모’ 대신 ‘어머님’,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는 게 박 교수의 설명이다.

처가살이, 조선왕조에 공격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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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사회분위기 때문에 처가의 영향력은 무척 강했다. 처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처가살이혼의 특성으로 인해 남성들은 결혼을 부와 권력을 잡는 기회로 이용했다. 사위도 아들과 마찬가지로 음서의 혜택으로 관리가 되거나 공음전을 지급받았고, 장인의 공에 따라 상을 받는 상황에서 부잣집이나 세력가의 딸을 아내로 맞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했다. 조선의 건국 공신인 정도전이 “처가살이 혼속 때문에 여자들이 자기 부모세력을 믿고 남편을 무시하고 교만하게 군다”면서 중국과 같은 친영제, 즉 시집살이로 결혼제도를 바꿀 것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 또 조선시대 궁중정치에서 외척을 극도로 경계한 이유도 아이들이 외가에서 자라나 정서적으로 외삼촌 등 외척들과 상당히 가까워져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가살이는 조선왕조가 성리학과 주자사상을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확고히 굳히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다. 조선 초기부터 유학자들은 처가살이 결혼제도가 ‘양이 음을 따르는 것이므로 불합리하다’면서 이데올로기 공세를 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던 친정과 처가식구와의 관계가 하루아침에 끊어질 수가 없어 심리적인 저항이 많았다.

그러던 것이 17세기 중반 이후 시집살이 형태가 보편화하면서 여성의 지위 하락도 함께 이뤄졌다. 재산상속 방식이 자녀균분제에서 장자단독제로, 신혼부부의 살림살이도 시집살이로 바뀌면서 남녀 사이의 불평등 관계가 급속도로 형성됐다. 사회심리적으로는 남아선호사상과 고부갈등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냈다. 또 ‘겉보리 서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안 한다’거나 ‘처가와 뒷간은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좋다’는 등의 속담도 널리 퍼졌다. 결국 우리 역사 전체를 놓고 보면 온전한 시집살이의 역사는 최근에야 등장한 셈이다.

전문가들은 “결혼의 형태가 처가살이냐, 시집살이냐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위상”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때문에 최근 우리 사회의 가족제도가 모계 중심으로 급격히 재편되는 것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의 결과라는 데에는 이론이 별로 없다. 특히 여성이 자신이 원하는 가족구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흐름으로 이끄는 주체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이화여대 함인희 교수(사회학)는 우리 사회에 아직 남아 있는 남자 친족 중심의 ‘민족대이동’ 현상은 빈 껍데기뿐이라고 지적한다. “추석이나 설날 등 큰 명절 때마다 남성 친족 중심의 행사가 이뤄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례적인 차원의 부계제일 뿐이다. 생활이나 정서적 유대라는 측면으로 볼 때 가부장적인 부계제는 이미 유명무실화했다. 우리 사회는 밑바닥에서부터 급속도로 양계제로 가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부계제가 요구하는 규범의 허구성이나 강요된 이데올로기가 생활적으로 저항과 반란에 부닥친 것 같다.”

외국에선 장모-사위 불화가 큰 이혼사유

함 교수는 또 시집보다 친정의 영향력이 커지는 현상과 관련해 “육아를 위해 젊은 맞벌이 부부가 부모와 가까운 거리에 살며 도움을 주고받는 수정확대가족이 새로운 가족형태로 보편화하고 있는 현실과 맞물려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가족간 정서적 유대와 결속이 여성을 중심으로 강화되고 있는 현실과 뿌리깊게 남아 있는 가부장적인 관념 사이에 생겨나고 있는 갈등과 충돌을 치유할 수 있는 사회적 논의가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장모가 사위의 관계가 좋지 않다고 알려진 외국에서는 이혼의 주요한 이유가 장모가 사위 사이의 불화다. 장모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우리의 경우도 장모가 딸을 통해 사위를 통제하려고만 한다면 고부갈등만큼이나 큰 갈등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사위 역시 장모시대의 과실만을 따먹으려고 해서는 안 되며, 딸은 지혜로운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 함 교수는 장모시대를 열어나가는 각 주체들의 노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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