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실상부의 마흔한 살(만 마흔 살)이 됐는데 나는 게임을 한다. 주로 하는 것은 건설 시뮬레이션인데, 수확하고 집을 짓고 땅을 넓힌다. 스마트폰 게임들이다. 1년 내내 해도 질리지 않을 만큼 게임은 많고 요즘 게임일수록 재밌다. 게임을 하다 보면 건물 가격은 높아지고수확시기는 늘어나고 게이머를 안달복달하게 하던 ‘미션’은 줄어든다. 이제 게임은 시들해진다. 곧 만렙(滿level)이다. 모든 건물을 세웠다. 모든 건물을 업그레이드했다. 모든 영토를 확장했다. 모든 영토에 사람이 가득 찼다. 돈을 들여가며 찬란하게 꾸며놓은 마을을 미련 없이 버린다. 마흔 살은 만렙이다.
“꺾였네.” 등산 중 선배가 말했다. 가끔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아, 마흔 살이었지’ 하는 생각이 든다. 고맙게도 1년에 한 살씩 먹기 때문에 마흔 살이라는 나이는 갑작스럽게 오지 않는다. 지난해 우리 나이로 마흔 살이 됐을 때도, 새해 첫날 박근혜 당선 다음날 번쩍 눈이 떠지던 것과 같은 충격은 전혀 없었다. ‘서서히 마흔’은 서른 살부터 한살씩 마흔이 돼가는 것이다. 30대에도 노래방에서는 ‘내 나이 마흔 살에는’을 즐겨 불렀다.
새해를 맞아 고등학교 친구들이 ‘카톡 방’에 모였다. 이런저런 안부 인사가 오갔다. 자연스럽게 민지(가명)나 유빈(가명) 등 아이들의 안부가 오갔다. “벌써 그렇게 됐어?” “세월 정말 빠르지.” 궁금해? 궁금하지 않다. ‘채팅방 나가기’를 눌렀다. 문자가 왔다. “지금 이야기 중인데 많이 바쁘니?” 많이 바쁘지 않다.
“나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이미 다 끊었잖아.” 같이 살다가 지난해 가을 헤어진 친구가 말한다. “하나 남은 고등학교 친구는 상황이 복잡한 애.” 사람들과의 관계는 강남과 강북처럼 나뉜다. 모든 사람과 잘 지내려고 안달하지 않는다. 마음을 나누기 위해 필요한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을, 빛나는 청춘은 다시 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알게 됐다. 그들의 안부 인사가 호들갑스러울 때면 반갑기보다 쓸쓸해진다.
(마스다 마리 지음, 이봄 펴냄)의 수짱은 겨우 서른다섯 살이다. 제목에 ‘결혼’이라는 말이 들어가지만 수짱의 미래 계획에 결혼이 들어 있지는 않다. 수짱은 한 달에 돈이 얼마가 필요할 텐데 노후 대비 연금 보험을 들어놓는 게 좋을까 하다가 “미래는 보이지 않지만 내일은 바로 코앞에 있어” 하고 만다. 이런 귀여움도 좋다. 하지만 사와코의 독백에는 가슴이 철퍼덕한다(아래에서 그 가슴 확인).
수짱이 요가학원에서 만난, 예전에 레스토랑에서 같이 일한 사와코는 곧 마흔이다. 사와코의 독백은 이렇다. “지하철의 자리 쟁탈전에 참가하게 되었다.”(책을 읽어도 정수리 뒤 고등학생이 앞에서 두번째 창가 자리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고 이제 내린다는 것을 알아챈다.)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가 엎드리기가 편안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얼마 전에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출근하다가 다시 집으로 갔다. 브래지어 없이 점점 편안해질 것 같다.) “버석버석해진 발뒤꿈치가 눈에 들어오고 말았다.”(제주도에서 물에 뜨는 돌을 샀다. 나이적은 동료는 돈 아깝다 했다. 안 쓸 거라 했다. 내가 목욕탕에서 그걸 유용하게 쓰는 걸 모른다.) “어느새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예전에 쓴 칼럼을 보고 ‘선배, 왜 이런 글을 쓰는 거예요’ 한다. 침 흘리는 이야기였다. 아, 내가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듣는 사람 생각 참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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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는 사진을 앨범에 정리하지 않게 되었다”. 빛나던 청춘은 다시 올 수 없고 그게 마음을 아프게 하지도 않는다. “정신분석학에서도 마흔 살이 되면 정신분석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해.” 정신분석에 일가견이 있는 동료가 이야기한다. 그렇다. 점(点)집에 가면 나는 무얼 물어볼까. 물어볼 게 없다. 예전에는 고등학교 일기장을 공터에서 태운 게 그렇게 아깝더니, 있어도 안 읽어보려니 한다. 대학교 때의 일기장은 술이 모자라 마음이 침침한 날, 1년에 한 번은 새벽 2~3시까지 읽고는 했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걸 읽고 나를 알 필요가 없을 만큼 나는 나를 알고, ‘아, 이런 생각을 하다니’ 기특해하며 나를 북돋지 않아도 될 만큼 나는 우울에 허덕이지 않는다.
만화 (세스 지음, 애니북스 펴냄)의 주인공 세스는 에서 본 카툰의 만화가를 애타게 찾는다. 추적 끝에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 부동산업을 했다는 것을 안다. 그는 이미 죽은 뒤다. 그의 딸은 카툰을 그렸다는 것도 모른다. 어머니가 살아 있다. ‘카툰에 대한 미련이 없었나요?’ 물어본다. “인생은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의 연속이 아니야.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이 방향으로 간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방향으로 간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그냥 끌려다니는 거지.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면 ‘좀 다르게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게 마련이지만, 그건 정말 보통 의지로는 안 되었을 걸세. 그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러려면 정말 어마어마한 의지가 필요했을 거야.”
큰 의지가 없는 게 좋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만화만 보고 있다. 게임으로 건물 세우고 업그레이드하느라 시간이 나지 않는다. 시간 낭비? 그건 10대나 20대에게나 하는 말이다. 40대는 게임하기에 참 좋은 시절이다. 오늘의 시간만큼이 내일도 남아 있으니, 여유롭게 시간을 낭비해도 된다. 지난해 전세가 없어서 집을 샀고 하우스푸어가 되었다. 많지도 않은 월급의 3분의 1 넘게 부어야 한다. 일이 적성이 맞는지 혹시 다른 회사로 옮기는 건 어떤지 고민할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은 축복이다. 빚을 다 갚게 할 것이고 게임을 하게 한다.
오, 젊음이여 아름다움이여“조금 비참한 게 영혼에는 좋아요.”(세스) 마흔 살에는 비참이 조화롭게 끼어든다. 올해는 레이먼드 카버를 다 읽을 것이다. 알 듯 모를 듯 하던 걸 알 것 같다. 의 인생을 다 뒤집어버리는 극적인 세상을 벗어나 의 시골 구석처럼 사랑을 하고 바람을 피워도 백조의 호수처럼 잔잔한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난 이런 세계를 안다. 그는 왕년의 스타급 육상 선수다. 과거는 현재에 남아 있지 않다. 스타의 존재증명이란 이렇다. 그는 술에 취한 날이면 손님들이 말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와 탁자로 장애물을 만든다. 그러고는 장애물을 뛰어넘으며 거실을 몇 바퀴나 돈다. 그 제목은 냉소적이다. ‘오, 젊음이여 아름다움이여!’(존 치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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