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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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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맞춰 과 선택한다’는 말 이해 못하는 스웨덴 대학생들…
등수 없는 성적표에 함께 공부한다는 인식과 문화가 견고해
등록 2010-04-09 11:22 수정 2020-05-03 04:26

이탈로 안드레스 산후에자(27)는 스웨덴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스웨덴 웁살라대학에 입학한 뒤 프랑스와 한국의 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했다. 그가 “한국에 있을 때 납득되지 않았던 점”이라며 추억 한 토막을 들려줬다. 한국인 친구가 전공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왜 이 전공을 선택했느냐”고 물으니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학교 가운데 점수가 허락하는 학과를 골랐다”고 답하더란다. 자신의 전공인 화학공학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마나 활력이 넘치는 산후에자로선 어리둥절할 만하다. 스웨덴의 대학 모습을 살펴보면 그의 당혹스러움이 이해가 간다.

스웨덴 웁살라대학에서 그룹토론 수업이 진행 중이다. 이곳 대학 출신으로 한국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한 적이 있는 산후에자는 “내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등록금이 비싸 대학 갈 엄두를 못 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웨덴 웁살라대학에서 그룹토론 수업이 진행 중이다. 이곳 대학 출신으로 한국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한 적이 있는 산후에자는 “내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등록금이 비싸 대학 갈 엄두를 못 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입학생 20%가량이 서른 넘어

이곳 대학 입학생의 평균 나이는 22.4살이다. 우리 나이론 23살이다. 스웨덴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2년 정도 쉬면서 여행을 하거나 직업 경험 등을 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를 탐색한다. 대개 그렇다. 그래서 입학생의 20%가량은 나이 서른이 넘는다. 노르웨이나 아이슬란드도 비슷하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지원한 만큼 중간에 관두고 돌아가는 일이 드물다.

취업 준비는 언제부터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면 이곳 학생들은 대부분 당황한다. 그들의 대답은 한국의 대학생들을 당황하게 할 것이다. 도대체 취업 준비가 무엇인지 의아해하며 되묻는다. 졸업할 때쯤이나 되어서 원하는 회사 홈페이지나 채용정보 사이트를 점검하고, 이력서를 만들어 보낸다는 게 그들의 대답이다.

실제 대부분이 졸업을 바로 앞두고 또는 졸업 뒤 취업을 준비한다. 채용 과정에 특별히 시험을 치는 경우가 없거니와 물어보는 질문이 대개 개인의 경험과 특별활동, 성향에 대한 것이니 따로 준비할 것도 없다.

시선을 학생에서 학교로 돌려본다. 최근 한 강사의 수업이 부실하다고 학생들이 단체로 항의했다. 학교 쪽은 바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한 학생은 “시험 결과가 너무 늦게 나온다”며 학교 쪽에 항의했다. 결과는 학칙상 시험 뒤 보름 안에 나오기로 되어 있다. 또 회의가 열렸다. 학교 사무처장으로부터 사과 전자우편을 받았다.

내가 지금 다니는 웁살라대학의 풍경이다. 학기마다 한 차례씩 교수와 교직원, 학생 대표가 정기회의를 한다. 학내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지, 더 개선할 점은 없는지 논의한다. 곧바로 학교 운영에 반영된다. 그리고 어떤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임시회의가 소집된다.

학생들이 학사 운영 등을 포함해 대학 사회에 깊이 관여한다. 대학 이사회에도 학생 대표가 참여한다. 이사회 의장·총장과 함께 교수진과 교직원, 그리고 학생 대표 3명이 참석한다. 동등한 구성원으로 존중받는다.

한 과목을 마치면 강의평가서를 작성하는데 50여 항목의 자세한 질문지에 답을 하고 의견을 적는다. 교수들은 강의 중에 “이 강의는 지난번 평가에서 상당히 좋은 평을 받았다” “이 부분은 지난 평가에 근거해 이렇게 개선했다”는 말을 거듭 꺼낸다.

스웨덴에서 공부하면서 받은 첫 문화 충격은 소소한 것에서 왔다. 시험 뒤 점수와 함께 돌려받은 시험지를 남들이 못 보도록 움켜쥔 채 보았다. 그런데 주변에선 서로의 답안을 돌려보며 점수를 얘기하고 있었다. 교수가 적어놓은 코멘트가 화제가 된다. 성적표가 나오면 표정 관리하면서 “그냥 그래”라고 말하던 한국의 대학생활이 스쳐갔다.

스웨덴 성적표에는 등수가 없다. 여기 대학에선 경쟁을 찾아보기 어렵다. 모르는 게 있어 동료에게 물어보면 제 일처럼 돕는다. 함께 공부한다는 인식과 문화가 견고했다.

이탈로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산후에자는 “스웨덴에서는 프랑스나 한국 같은 경쟁이나 엘리트 중심의 사고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모든 성적은 절대평가다. 대개의 교육 프로그램은 ‘팀워크’를 강조한다. 팀 안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모두 같은 수준에 있는지, 낙오자는 없는지 살핀 뒤에야 다음으로 넘어간다.

북유럽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가치관 중에 ‘얀테의 규범’(Jante Lagen)이라는 것이 있다. 쉽게 말하면 “네가 남보다 낫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부유한 사람이라도 부를 과시하지 않는 문화가 여기서 기인한다. 이 규범이 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된 것 같다는 것이 이곳 대학생들의 해석이다.

이곳 대학엔 등록금도 없다. 대학생이 되면 오히려 방학을 뺀 아홉 달 동안 매월 3천SEK(스웨덴크로나·약 47만원)가량의 학생수당을 받는다. 더 필요하면 국가에서 대출받아 졸업 뒤 25년 이내에(60살 되기 전까지, 연소득 5% 안에서) 갚으면 된다.

산후에자는 인터뷰 도중 또 화학 얘기를 신이 나서 쏟아낸다. 그렇다고 스스로 특별히 공부 잘하는 학생은 아니란다. 묻지도 않았는데 “뛰어난 사람만 학문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반문에 괜스레 겸연쩍다. 그의 마지막 말은 울림이 깊다.

“제가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형편상 비싼 등록금 탓에 대학 갈 엄두도 못 냈을 것이고, 제 운명의 상대인 ‘분자’를 만나지도 못한 채 바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특별한 기술 없이 찾을 수 있는 직장을 구해 돈을 벌어야 했을 거예요. 스웨덴의 교육제도에도 분명 문제점이 있지만, 모두에게 기회를 주는 장점에 비하면 사소한 거 같아요.”

웁살라(스웨덴)=글·사진 하수정 한겨레미디어전략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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