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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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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율 높으니 개헌인들 어떠리?

당선인 신분일 때나 100대 국정과제 발표 때 없던 논의…
박근혜 전 대표를 견제하기 위한 혹은 정국주도권 유지하려는 포석
등록 2009-09-24 12:24 수정 2020-05-03 04:25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인 신분이었던 2008년 1월1일 개헌에 대한 생각을 밝힌 적이 있다. 당시 이 대통령은 한국방송·SBS와의 신년 대담에서 “국회의원과 대통령 임기를 맞추는 것이 헌법을 바꾸는 주된 이유는 될 수 없다”며 “권력구조뿐 아니라 21세기 환경에 맞는 기본권이나 남녀평등, 환경의 문제 등 여러 가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보는데, 지금 급한 사안이 많다”고 말했다. 개헌 시기에 대해서도 “적당한 시기에 국민의 의견을 물어 한번 고려할 의사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이명박 대통령이 9월15일 연합뉴스·일본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권력구조 개편에 초점을 맞춘 개헌 필요성을 제기했다. 사진 연합 조보희

이명박 대통령이 9월15일 연합뉴스·일본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권력구조 개편에 초점을 맞춘 개헌 필요성을 제기했다. 사진 연합 조보희

“극심한 정쟁 보며 바뀐 생각”

최근 이 대통령이 ‘권력구조에 제한된 개헌’을 언급한 것과 사뭇 다르다. 우선 개헌 시기의 문제다. 당선인 시절 이 대통령은 임기 중 개헌 논의가 가능하다는 원론적 입장을 밝히면서도 여러 국정과제 중에서는 후순위에 놓았다. 또 기왕 개헌을 한다면 권력구조 개편뿐 아니라 환경과 여성 문제 등 포괄적 내용을 새 헌법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약 1년 전인 2008년 10월 발표된 ‘이명박 정부 100대 국정과제’에서도 개헌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 대통령과 가까운 친이계 의원은 100대 국정과제 발표 직후 “개헌을 한다면 권력구조 개편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의 달라진 환경을 함께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그런 방향으로 개헌을 추진하려면 2010년 지방선거 이후는 돼야 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9월15일 이 대통령이 권력구조 개편에 초점을 맞춘 개헌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내용과 시기, 두 가지 측면에서 이 대통령의 평소 생각과 다른 셈이다. 이 대통령이 지금 이 시점에 개헌의 필요성을 직접 언급한 배경은 뭘까?

친이 강경파로 분류되는 김용태 한나라당 의원은 “국회에서 처음 활동해보니 여야 갈등이 빚는 폐해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며 “누구보다 효율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 대통령도 자기 임기를 채우는 것보다 권력구조 개편 등을 통해 한국 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욱 시급하다고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또 “나 역시 이 대통령이 임기 초 개헌에 소극적이었던 것처럼 개헌을 논의하더라도 최대한 늦춰야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극심한 정쟁을 겪으며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권력구조 등으로 개헌 범위를 좁혀서라도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야 개헌 연구 의원모임인 ‘미래한국헌법연구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이낙연 민주당 의원도 이 대통령의 개헌 제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 의원은 “청와대는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이 대통령의 레임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 등으로 미래한국헌법연구회의 활동을 부정적으로 봤다”며 “하지만 막상 국정을 운영해나가며 권력구조 문제를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문제 인식을 새롭게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대통령이 임기 초반에 자신의 임기를 단축시킬 수도 있는 개헌을 제안하고 나섰는데, 이를 정치적 꼼수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개헌 제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쪽이 주목하는 것은 이 대통령의 최근 지지도와 개헌 제안 시점이다.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는 최근 일부 조사에서 50%를 넘어섰다. 김용태 의원은 “개헌 논의는 원칙적으로 국회가 주도하는 것이 맞지만 대통령도 국정운영의 한 축으로서 진정성을 보이려면 (임기 초반인) 지금 개헌을 제안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의 개헌 제안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당장 한나라당 친박계에서 이 대통령의 제안을 경계하고 나섰다. 이 대통령의 개헌 제안 다음날 친박계 김영선 의원은 “당장 개헌에 대해 논의하면 분열 요소가 있다”며 “정치적 게임을 벌인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는 만큼 오래 연구하고 뜸을 들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 정권 심판론 등 이슈가 개헌에 묻혀

아직 이 대통령이 권력구조에 대한 구상을 명쾌하게 밝힌 적은 없지만, 지금까지 논의된 것처럼 ‘분권형 대통령제’(이원정부제)까지 내용에 포함된다면, 차기 대권을 노리는 박근혜 전 대표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개헌이 박 전 대표를 견제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민주당 역시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 대통령이 직접 개헌 논의를 주도하고 나선 것이 마뜩지 않다는 반응이다. 지방선거 전까지 정국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개헌 이슈를 꺼내놓은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정세균 대표는 9월16일 “국민적 공감대가 미흡하기 때문에 본격적 개헌 논의는 지방선거 이후로 미뤄지는 게 온당하다”며 “개헌과 선거구제에 대한 여권의 단일안이 없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한 달 간격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국면 전환을 위한 정략적인 것이라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반대 여론이 제기되는 것은 개헌이란 대형 이슈가 갖는 폭발력 때문이다. 개헌 논의에 여야가 본격적으로 매달리는 순간 현 정권에 대한 심판론 등 다른 이슈는 개헌에 묻히기 쉽다. 이 대통령의 의도가 어디에 있든 폭넓은 공감대와 국민적 합의가 전제되지 않은 개헌 제안은 따라서 정략적일 수밖에 없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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