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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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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사회참여형 예술작품 만드는 프로젝트 그룹 ‘오늘’ 등 아티스트들의 ‘자발적 문화 저항’
등록 2009-06-19 10:56 수정 2020-05-03 04:25

록밴드 ‘위치스’의 신정석(32)씨와 힙합 그룹 ‘아실바니안 코끼리’의 박정주(27)씨는 지난 5월23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 앉아 있었다. 경찰과 차벽에 봉쇄된 시민분향소를 보며 반전 시위에 앞장섰던 존 레넌을 떠올렸다. 지난해 광우병 촛불집회와 올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지켜본 뒤, 두 사람은 ‘새로운 세상’을 상상했다. 젊은 예술인들의 프로젝트 그룹 ‘오늘’은 대한문 앞에서 태동했다.

6·10 범국민대회에 참여해 <상록수> 등을 연주한 시민악대(왼쪽)와 지난해 촛불문화제에서 공연을 하는 윈디시티의 모습. 사진 (왼쪽부터) <한겨레21> 정용일·박승화 기자

6·10 범국민대회에 참여해 <상록수> 등을 연주한 시민악대(왼쪽)와 지난해 촛불문화제에서 공연을 하는 윈디시티의 모습. 사진 (왼쪽부터) <한겨레21> 정용일·박승화 기자

2000년 이후 ‘민중예술’의 새로운 전환

주저할 겨를이 없었다. 지난해 촛불집회를 계기로 알게 된 ‘예술 하는 친구들’을 죄다 모았다. 음악 하는 친구들을 기본으로 하고 대안공간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미술인 이수성(25)씨, 독립영화를 만드는 한세희(24)씨 등 각기 다른 분야의 대중예술인 10여 명이 모였다. 프로젝트 그룹 ‘오늘’을 결성해 사회참여형 예술작품을 만들자는 뜻을 모았다.

‘오늘’의 운영방식은 간단하다. 각자 자신이 바라본 오늘, 세상의 모습을 표현하면 된다. 음악가와 디자이너, 미술가와 영화감독이 함께 작업을 할 수도 있다. 어떤 주제, 어떤 형태로든 사회의식을 갖고 작품을 만들고 나면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하거나 전시회를 연다. 언제든, 누구든 ‘오늘’을 주제로 한 예술 활동에 관심이 있다면 ‘오늘’에 참여할 수 있다. 7월 초에 홈페이지를 열고 각자 ‘오늘’을 표현한 작품들을 순차적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디지털 싱글앨범 판매 등을 통한 수익으로 시민사회단체를 후원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젊은 문화예술인들이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며 연대하고 있다. 그동안 2000년대 젊은 예술가들의 ‘시대 정신’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에서 정경은 박사는 “2000년 이후부터 민중가요는 적극적으로 창작되지도 않고 불려지지도 않았다”고 평가했다. 미술평론가 이섭씨는 “독재에 맞섰던 80년대 민중미술과 달리 2000년대 들어선 미술판이 상업 논리에 휘말리면서 젊은 작가들조차 ‘값나가는 그림’ 그리기에 나섰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음악·미술·만화·영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젊은 예술인들이 시대 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대한문 앞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인 이들은 ‘시민악대’와 걸개그림을 그린 만화가들이다. 조문 기간 내내 덕수궁 돌담길에서 노래를 한 시민악대는 등을 연주하며 시민영결식을 이끌었다. 시민악대는 지난해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모임이다. 당시 작곡을 전공하는 대학생이던 전혜리(26)씨가 인터넷에 카페를 열어 시민악대를 제안했다. 지난해 5월29일 문을 연 카페는 현재 336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온·오프라인에서 누구나 어울려 악대가 될 수 있다. 지난 1년간 집회 현장에 평균 10~15명의 회원들이 나가 노래를 불렀다.

음악의 힘은 컸다. 시민악대는 지난 6·10 범국민대회에도 참가해 시민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대부분 직장에 다니는 ‘아마추어 음악가’들은 시민악대를 통해 ‘시민과 함께하는 뮤지션’으로 거듭났다. 기타부터 탬버린, 트라이앵글까지 ‘주특기’도 다양하다. 시민악단의 회원인 철학아카데미 심세광(45) 교수는 “매일같이 노래를 하느라 목이 쉬어 목소리도 안 나오는 경우가 있지만 시민들과 함께한다는 느낌에 늘 가슴이 벅차다”고 말했다. 시민악대의 달력에는 6월에도 참여해야 할 집회 일정이 빼곡하다.

추모곡 만들고, 그에 맞춰 뮤직비디오 만들고
정원수씨가 작곡한 <봉화산 부엉이>의 악보.

정원수씨가 작곡한 <봉화산 부엉이>의 악보.

작업실 동료들과 대한문 앞 노무현 전 대통령 영정 걸개그림을 그린 만화가들도 ‘새로운 구상’을 하고 있다. 만화작가 그룹인 ‘새만화책’ 식구들은 ‘정치사회풍자만화잡지’를 발간하기로 하고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새만화책의 김대중 대표는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좀더 시각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외국 작가와도 연대해서 정치·사회 이슈에 부응하는 만화잡지를 만들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젊은 문인들은 ‘시국선언’을 하고 나섰다. 지난 6월9일 특별한 구심 단체도 없이 이순원, 김연수, 신형철, 전성태 등 젊은 작가 189명이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작가선언 6·9’를 발표했다. 선언문에서 작가들은 “우리는 다만 견딜 수 없어서 모였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이명박 정권 1년만에 1987년 이전으로 후퇴해버렸다”고 규탄했다. 젊은 작가들은 앞으로도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자발적 문화 콘텐츠’도 늘어간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후 작곡가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내놓은 추모곡만 13곡에 달한다. 이란 추모랩을 비롯해 등 추모곡들은 인터넷을 통해 확산됐다. 누리꾼들은 이 추모곡에 영상을 덧입혀 ‘뮤직비디오’도 만들었다.

그중 란 곡은 대한문 앞 시민분향소 쪽이 노제를 치르는 내내 방송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가지 마오, 가지 마, 가지 마소서~” 구슬픈 노래 소리에 수많은 시민들이 눈물을 흘렸다. 이 노래를 작사·작곡하고 직접 노래까지 부른 이는 정원수(49)씨다. 그는 (설운도), (오은주), (김혜영) 등 주로 성인가요를 만들어온 작곡가다. 영결식 전날, 그는 대한문 앞에 나갔다. 분향소 주변에선 이미 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중가요를 히트시켜 방송에서 들을 때와는 다른 감동에 가슴이 벅찼다. 그는 “사회문제에 관한 노래를 만든 것은 처음”이라며 “앞으로는 용산 참사, 6·10 항쟁과 같이 국가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노래를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 5월2일 서울시청 앞 하이서울페스티벌에서 록밴드 ‘윈디시티’가 “용산 참사 희생자들을 기억하자” “진정한 페스티벌은 촛불집회 아니겠느냐” 등의 말을 하다가 공연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주최 쪽은 윈디시티가 네 번째곡인 을 연주하는 도중 음향 시설 전원을 껐다. 이후 윈디시티는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다가 지난 6월11일 에 당시 심경을 밝혔다.

보컬 김반장(35)은 “용산 참사가 일어난 지 100일이 지난 시점에 너무 빨리 그분들을 잊는 것 같아 발언을 했는데 공무원들은 듣기 좋지 않았나 보다”며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우리에게 ‘공감’하는 젊은이들의 눈빛을 봐 오히려 ‘최고의 공연’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런 사태가 있었을 때 단체가 있었다면…

신정석씨는 윈디시티 사건과 같은 일이 또 발생하면 ‘오늘’의 이름으로 적극 대응할 생각이다. 신씨는 “당시 젊은 예술인들의 단체가 있었다면 적어도 항의 성명이라도 냈을 텐데, 한목소리를 내기 힘든 현실을 절실하게 느꼈다”며 “앞으로 많은 대중예술가들이 ‘오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신씨는 지난 6월13일 한 인디밴드의 공연에 객원으로 참가해 존 레넌의 노래 을 불렀다. “나를 몽상가라고 하겠죠. 하지만 나만 이런 꿈을 꾸는 게 아니랍니다”(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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