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죽은 듯 조용하다. 이명박 정부의 85개 법안 강행 처리를 둘러싼 여야의 벼랑 끝 대치로 온 나라가 들썩이는데, 한나라당 박근혜계만 무풍지대처럼 보인다. 박근혜 전 대표의 침묵 탓이다.
한가한 ‘밥 먹으니까 배부르다’
박 전 대표는 지난 연말부터 법안 처리를 둘러싼 민주당과의 협상 진행 상황을 점검하려고 하루 두세 차례씩 꼬박꼬박 열린 당 긴급 의원총회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1월2일 대구시당과 경북 달성군청 신년하례식 등 지역구 행사와 12월29일 친박연대 지도부 오찬 등 개인 일정만 계속했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언제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 가급적 국회 주변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소속 의원들에게 ‘비상대기령’을 내린 상황이었음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박 전 대표는 달성군청 신년하례식에서 만난 기자들이 국회 대치 상황의 해법을 묻자 “끝까지 대화로 타결이 되면 정말 좋겠다”고 답했다. 이미 국면이 두 당 내부의 강경파를 당 지도부가 어떻게 설득하느냐는 구체적인 단계로 넘어간 상황에서 ‘밥 먹으면 배부르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답변만 내놓은 셈이다. ‘주군’의 뜻을 따라서인지, 잇단 긴급 의원총회에서도 발언에 나서는 박근혜계 의원은 거의 없었다.
이를 두고 박근혜계 의원들은 “지금 박 전 대표든 우리든 뭐라고 말을 하겠느냐”고 입을 모았다. 고위 당직을 맡은 한 박근혜계 중진 의원은 “이렇게 무리하게 밀어붙여야 할 정도로 쟁점 법안들이 절박한 사안인지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박 전 대표나 우리가 만약 그런 발언을 한다면 여당 핵심 인사가 국정의 발목을 잡는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라고 고민을 털어놨다. 또 다른 중진 의원도 “박 전 대표가 지금 상황을 비판하면 한나라당이 어떻게 되겠냐. 한나라당에서 분란이 나면 정국은 더 어려워지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와 당 주류의 독선적인 태도에 불만이 없지 않지만, 지금으로선 박 전 대표가 무슨 말을 하든 ‘계파 싸움’을 일으키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는 걱정이다.
민주당의 강경한 태도가 외려 박 전 대표와 주변 인사들의 입지를 좁혔다는 ‘불만’도 나오고 있다. 박 전 대표의 한 핵심 측근은 “민주당이 토론조차 거부하면서 법안 상정을 막고 국회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는데, 쟁점 법안 처리를 미루자는 주장이 한나라당 안에서 먹히겠느냐. 의원총회건 어디건 합리적인 목소리를 못 내게 만든 건 민주당”이라고 말했다.
차기 대통령 인물 1위하지만 당 안팎에선 박 전 대표의 침묵에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비판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명실상부한 ‘차기 대통령감’으로 거론되는 데 있다. 문화방송이 새해를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박 전 대표는 32.7%의 지지를 얻어 ‘차기 대통령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인물’ 1위로 꼽혔다. 실제 12월28일 박 전 대표를 향해 가장 먼저 공개적으로 포문을 연 전병헌 민주당 의원은 “나라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반민주적 행위에 박 전 대표가 한마디 비판도 하지 못한다면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라는 표현은 거둬들여야 할 것”이라며 박 전 대표의 태도 표명을 촉구했다. 사흘 뒤엔 이상민 자유선진당 의원이 “박 전 대표는 이명박 대통령의 일방적인 독선과 국회를 무시하는 행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제동을 걸어야 할 입장임에도 침묵하고 있다. 너무도 비겁하게 보인다”고 비판했다. “‘원칙’을 내세우는 정치인으로, 차기 유력 대선주자로 자처해왔는데 현재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계파 갈등’을 의식한 태도로 해석하기엔, 그간 박 전 대표가 취한 행보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쓴소리도 나온다. 그는 지난 12월 초, 이명박계인 안경률 사무총장의 권한을 강화하는 쪽으로 당헌·당규를 개정하는 방안을 당이 검토한다는 보고를 받고 “세상이 바뀌었다고 자기들 입맛대로 고친다면 그것이 무슨 당헌이고 당규냐”며 격노한 것으로 전해졌다. “끝까지 대화로 타결이 되면 정말 좋겠다”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강도 발언이다.
그 무렵 박 전 대표는 경북 경주에서 열린 경선캠프 안보특보 출신 정수성씨의 출판기념회에서 축사를 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김일윤 전 무소속 의원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 확정판결을 받은 경주는 정씨가 오는 4월29일 보궐선거 준비를 하는 곳인 데다,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의 핵심 측근인 정종복 전 의원도 공천을 노리고 있어 벌써부터 계파 간 공천 격전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지난해 10·29 보궐선거 때 당의 거듭된 지원 유세 요청도 거절했던 박 전 대표가 이런 상징적인 곳을 방문한 것은 정수성씨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이를 두고 중립 성향의 한 중진 의원은 “박 전 대표는 자기 추종자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일엔 아주 독하게 나선다”고 꼬집었다.
“앞으로도 계속 나서지 않을 건가”박 전 대표의 방관자적 태도는 자신의 대권 행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지금 박 전 대표가 할 일은 팔짱 끼고 이명박 대통령과 이명박계가 망하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다음 집권 세력으로서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얘기다. 복잡한 소계파로 나뉘어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이명박계에 비해, ‘단일대오’에 가까운 결속력을 보이는 박근혜계는 정치적·정책적 대안을 도출하기도 쉬운 편이다. 한 한나라당 당직자는 “박 전 대표 자신이 어떻게 끌어올린 당 지지율 50%였는데 이런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지율을 반토막 낸 청와대에 ‘똑바로 하라’고 목소리를 내고, 문제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도권의 한 의원도 “이 대통령의 일방적인 국정 운영이 문제가 될 때마다 박 전 대표가 정면으로 각을 세울 순 없고, 곤혹스러울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한다”면서도 “앞으로도 계속 나서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아니냐”고 지적했다. 박 전 대표가 ‘계파 수장’이나 박정희 향수층의 ‘공주’로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당 속 야당’으로서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란 얘기다.
“(경제위기라는) 어려움을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정치와 사람, 정치문화가 가장 중요하다. 국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정치인이 많을수록 우리 정치의 길이 되고 우리 정치문화로 정착된다. 지금 우리 정치인들의 선택과 행동 하나하나가 더 중요하다.” 지난해 말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가 주는 ‘백봉신사상 대상’을 2년 연속으로 받은 박 전 대표가 밝힌 수상 소감이다. 박 전 대표가 선택한 침묵은 길이 되어 정치문화로 정착될까, 아니면 ‘무책임한 정치인’이란 낙인이 찍힌 부메랑이 될까.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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