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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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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최 촛불을 끌 수가 없다

등록 2008-06-03 00:00 수정 2020-05-03 04:25

오늘의 촛불 집회가 6월항쟁·여중생 추모제·탄핵 반대와 다른 점… 대의민주주의적 장치를 통해 수습할 길 없어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역사학

[표지이야기 1부-타오르는 촛불]

예측불허의 한국 현대사가 또 한 번 예측할 수 없는 국면을 맞고 있다. 촛불이 다 타버리도록 어둠이 물러가지 않을지, 아니면 날이 밝아올지, 그 전에 환한 전기불이 들어와 촛불을 켤 필요가 없어질지 지금으로서는 속단할 수 없다. 다만 한동안 촛불이 꺼지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촛불시위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아, 어둠이 가시기 전에 촛불이 밝음을 잃는 순간이 하나 또 있다. 집회 현장에서 자주 듣는 것처럼 사람들이 횃불을 드는 경우다.

1987년부터 2008년까지

촛불문화제를 17번 하도록 국민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던 정부는 시민들이 광장을 벗어나 거리로 나서자- 첫날은 청계광장에서 한 50m쯤 벗어나 종로1가로 온 게 전부다- 불법 거리시위를 한다고 난리법석을 쳤다. 그런데 원래 시위는 거리에서 하는 거다. 오랜 기간 군사독재를 겪는 동안, 반대라고는 꼴을 보지 못하는 권위주의적 작자들이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고, 그 하수인들이 ‘심기’마저 경호해야 한다는 희한한 논리로 반대세력이 한 뼘 거리에 나서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히 교내 시위라는 말이 익숙해졌다. 교내 시위가 1960년대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거리로 나가기 위해 교정을 몇 바퀴 돌며 사람을 모으는, 말하자면 본게임에 앞서 워밍업을 하는 것이었다.

1980년 서울의 봄 때는 거리에 나가면 군부가 나설 수 있는 빌미를 준다고 해서 여러 날 거리에 나가네 마네 논쟁을 했다. 우리 역사에 위화도 회군 이래 최대의-그러나 최악의- 회군이었다는 비판을 듣는 서울역 회군도 이 연장선에서 나왔다. 80년대는 거리 데모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반 시민들은 참여할 수 없는 구조였다. 재야단체나 각 대학 학생회, 학회 등을 통해 은밀히 ‘택’(영어 ‘tactic’을 줄인 은어로 그날 시위의 장소 및 이동경로 등에 대한 지침)을 받을 수 있는 사람 몇 명이 ‘만약 경찰에 붙잡히게 되면 어떻게 알고 나왔냐는 질문에는 이러이러하게 순진한 척 답하라’는 것까지 교육을 받은 뒤 거리 시위에 나왔다.

1987년 6월항쟁은 국민운동본부라는 지도부가 있었지만, 아무도 이 항쟁이 한 달 가까이 지속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그런 변화를 가져오기를 다 바라고는 있었지만, 이런 현실이 벌어질 것을 기대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과 비교한다면 6월항쟁도 처음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87년 1월14일 박종철군 추모집회 때 처음 모인 인원은 미선이·효순이 촛불추모제 때나 지금에 비한다면 몇십분의 일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문치사 은폐·축소 사실이 5월 하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의해 알려지면서 광범한 공분이 일고, 이 분노에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게 되는 사건이 더해져 6·10 국민대회로 이어지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학생과 시민 수백 명이 ‘그냥 헤어질 수 없다’면서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밤샘을 하면서 시위에 탄력이 붙었다. 특히 6월항쟁 때는 이전과는 달리 전국에서 동시에, 서울도 한 곳만이 아니라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라고 할 정도로 분산된 장소에서 동시다발 전술을 택한 것이 톡톡히 효과를 보았다.

90년대에는 1991년 이른바 분신 정국과 1996년 말~1997년 초에 걸친 노동법 개악 저지투쟁 당시에 사람들이 거리에 많이 나왔다. 91년 강경대가 죽고 김귀정이 죽고… 살벌한 강경 진압과 그에 따른 희생, 그리고 그 억울한 희생에 길동무가 돼준, 끝없이 이어지는 분신과 투신…. 그러나 그 봄은 정원식 총리에 대한 밀가루 투척이 ‘패륜’으로 몰리면서 서럽게 끝이 났다. 97년의 노동법 투쟁은 뜨거운 대중의 열기를 지도부가 잘 받아내지 못하면서 흐지부지 끝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환위기가 덮쳐왔다.

2002년 월드컵은 시민에게 광장을 되돌려주었다. 그 뜨거운 열기. 같이 하면 이렇게 즐겁고 신나는구나 하는 것을 시민들이 알아버렸다. 이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고, 그해 가을 미선이·효순이 두 중학생을 기리는 촛불추모제로 이어졌다. 이 추모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든 것이지만, 사실 월드컵 열기에 온 국민이 들떠 있는 동안부터 꾸준히 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해온 대책위원회가 있어 집회를 주도했다. 이를테면 이들이 지도부 역할을 했다. 추모제 말미에 가끔 “미대사관으로 가자” 하는 구호가 나오고 실제로 그 앞에 가서 ‘으싸으싸’ 하면서 전경과 몸싸움을 하기도 했지만, 이는 대개 집회를 마무리하는 수순이기도 했다. 그냥 가기 아쉬운 사람들, 절대로 그냥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그래도 한번 소리도 지르고 몸도 풀었다고 생각하려면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사실 이런 집회는 준비도 홍보도 어렵지만 해산이 제일 어렵다고 하지 않나?

미선이·효순이 촛불추모제가 좀 비장하고 긴장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면, 탄핵 반대 집회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탄핵을 자행한 수구세력을 심판할 날을 받아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회가 민의를 배신해서 거리에 나앉아 촛불을 들었지만, 총선이 한 달도 안 남았으니 초조할 일도 없었고, 구태여 거리시위를 할 이유도 없었다. 시위대 입장에서 이 당시는 경찰도 우리 편 같아 보였다.

2002년의 촛불추모제, 2004년의 탄핵 반대 촛불집회에 이어 2008년에 시민들이 다시 촛불을 들었다. 시민들이 촛불을 드는 때는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이다. 미선이·효순이가 불쌍하게 장갑차에 치여 죽었는데, 미군은 아무 잘못이 없단다. 한국 정부는 속수무책이고 국회도 손 놓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책임이 없다면 그때 거기를 지나간 미선이·효순이의 잘못이란 말인가? 정부가, 국회가 제 역할을 못할 때 시민들은 촛불을 들었다. 2004년의 탄핵 시도는 국회가 시민들에게 촛불을 나눠주고 불붙여준 것이다. 국회가 ‘탄핵질’을 안 했으면 시민들이 촛불 들 일도 없었다. 탄핵 때는 대의정치가 제대로 작동 못한 정도가 아니라 대차게 오작동을 한 경우다. 그래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었고, 선거로 심판했다.

심해지는 현대사의 예측 불가능성

87년 6월항쟁은 당시 군사정권의 직선제 수용으로, 2002년의 촛불추모제는 바로 뒤의 대통령 선거에서 ‘반미 감정 좀 가지면 어때’라고 말하는 후보의 당선으로, 그리고 탄핵 정국의 촛불집회는 탄핵을 시도한 의회권력을 한 달 뒤의 총선에서 심판함으로써 마무리됐다. 요컨대 대의민주주의의 실패에 따른 직접민주주의의 한국적 방식으로 촛불이 타올랐지만, 그 촛불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와 같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작동 방식과 맞물리며 자연스럽게 꺼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대통령 선거를 치른 지 6개월, 국회의원 선거를 치른 지 한 달도 안 돼 촛불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요컨대 자연스럽게 촛불을 끌 수 있는 카드는 이미 써버린 것이다. 이미 촛불에서 문제의 핵심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넘어섰다. 한 달 동안 촛불집회를 하며 시민들이 그런 식의 쇠고기 수입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는데 정부는 꿈쩍도 안 했다. 대통령의 사과는 오히려 시민들의 염장을 질렀다. 시민들은 협상이 잘못됐다고 하는데, 대통령은 협상은 잘못 없고, 소통을 잘못한 것이 문제란다. 6월항쟁 때도 없었던 밤샘시위를 하면서, 그리고 “잡아갈 테면 기꺼이 타주마”라고 제 발로 닭장차에 오르면서까지 안 된다고 하는데도 정부는 막무가내로 장관 고시를 강행했다. 이쯤 되면 확실히 막가자는 거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가? 선거는 다 지나갔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 같은 장치도 없는데 시민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미국 축산업자의 이익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대통령이나 정부의 알량한 체면을 위해서인가? 국민의 뜻과 이익이 아닌 다른 것을 위해 복무하는 대통령과 정부를 그냥 두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2002년이나 2004년과는 달리 대의민주주의의 실패로 인해 벌어진 사태를 대의민주주의적 장치를 통해 수습할 길이 보이지 않는 오늘, 한국 현대사의 예측 불가능성은 더욱 심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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