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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은 왜 영내 깊숙이 묻히는가

등록 2008-04-25 00:00 수정 2020-05-03 04:25

심판관 제도·관할관 확인조치권으로 군사법정 무기력…문제 드러나기도 힘든데 담당 기구는 자꾸 축소

▣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언론에 노출됐다고 해서 ‘드러난 사건’이라고 보는가? 아니다. 이 사건은 결국 무마된 사건이다. 가해자라고 볼 수 있는 송 소령은 형사처벌 받지 않고 불문경고를 받는 데 그쳤다. 불문경고는 징계라고도 볼 수 없는 미약한 조처다.”

한 군법무관은 ‘여군 군악대장 스토킹 사건’에 관한 군 당국의 조처를 이렇게 평가했다. 몇개월 동안 ‘지속적 괴롭힘’을 일삼은 송아무개(37) 소령은 어떻게 단순 경고만 받고 넘어갈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군대의 조직논리가 작용한다.

심판관과 피고인이 잘 아는 사이라면

이 법무관은 군대에서 성추행 피해자가 겪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술자리 성희롱, 또는 근무 중 성희롱을 당한 여군이 있다. 이 여군이 괴로움에 못 이겨 주변 여군들에게 얘기하면 백이면 백 ‘네가 참아라. 너만 이상해진다’는 말을 듣는다. 주변 충고와 달리 문제를 제기하면 헌병수사대의 조사가 시작된다. 가해자도 조사하고 피해자도 조사한다. 사단장 등 부대 지휘관은 헌병수사대에 ‘잘 처리하라’고 말한다. 헌병은 지시대로 ‘잘’ 처리하기 위해 피해자의 꼬투리도 잡는다. ‘너도 이런 잘못을 하지 않았냐’고 추궁한다. 여군의 사소한 실수나 잘못이 공개·과장되고, 졸지에 이상한 사람이 된다. 여군은 결국 조용히 문제를 덮는다. 지난 3년간 내가 관찰한 성폭력·성희롱 사건들은 대부분 이런 경로를 밟아 묻혔다.”

군대는 계급이 높아질수록 엄청난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다. 제때 진급하지 못하면 옷을 벗어야 한다. 관할 부대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고스란히 지휘관의 책임으로 돌아오고, 인사고과나 근무평점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결국 지휘관들은 영내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가급적 무마하려고 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인 여군이 또 다른 피해를 감수하고 강경한 뜻을 굽히지 않거나 사건이 외부에 알려졌을 경우엔 가해자가 징계를 받거나 기소된다. 하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거의 남성으로 채워진 징계권자 또는 재판부는 가해자인 남군에 대해 온정주의를 가질 수밖에 없고, 이런 온정주의가 작동하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우선 군사법원은 법관이 아닌 군인도 재판에 참여한다. 이런 사람을 심판관이라고 하는데, 1심인 보통군사법원에서는 심판관이 사실상 재판장 노릇을 한다. 피고인과 재판장이 서로 잘 아는 사이인 경우가 태반일 수밖에 없다. ‘여군 군악대장 스토킹 사건’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본부근무대장인 송 소령의 제보로 헌병대 수사를 거쳐 기소된 군악대장 박아무개(27·여) 대위를 재판한 1심 재판부의 심판관은 사단 참모장(대령). 참모장은 사단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본부근무대장과 업무상 밀접한 관계다. 더군다나 참모장과 송 소령은 각각 중령과 대위 시절에도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다. 이런 참모장이 송 소령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박 대위를 어떻게 봤을까? 또 송 소령이 기소됐다면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

판결이 내려진 뒤에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 무거운 형이 선고됐을 경우 ‘관할관 확인조치권’을 통하면 된다. 군사법원법(379조)은 “관할관은 재판관이 내린 형이 과중하다고 판단할 경우 형을 감경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휘관 마음대로 형을 깎아주는 것이다. 2001년 한 중령은 4명이 숨지는 사고를 내고도 금고 6개월이라는 낮은 형을 선고받았는데, 관할관 확인조치권까지 발동되면서 결국 금고 2월로 감형됐다.

반대로 너무 가벼운 형을 선고받을 경우 일반 재판에서는 검찰이 곧바로 항소하지만, 군검찰의 항소에는 지휘관 결재가 필수다. 아무리 터무니없이 낮은 형이 선고됐더라도, 지휘관이 봐주기로 마음먹으면 방법이 없다.

이계수 건국대 교수(법학)는 “심판관 제도, 관할관 확인조치권 등은 군사법 개혁에서 가장 먼저 이야기되는 문제이고, 법률가한테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위헌의 소지가 있다”며 “이 문제는 몇 년 전부터 여러 차례 지적돼왔지만 전혀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이런 황당한 군사법 체계에 대한 개혁 방안이 논의됐지만, 현재는 흐지부지된 상태다.

여군 성범죄의 더욱 큰 문제는 이런 솜방망이 처벌이라도 받을 수 있게끔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점이다. 현재 국방부는 사단마다 여성고충상담책임관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군 당국에서는 이들을 통해 성폭력·성희롱 예방 및 대처 방법 등을 교육하고 있다지만, 현장에 있는 여군들에게는 별무소용인 경우가 많다.

한 여군 부사관은 최근 과의 통화에서 고충상담책임관과 관련된 경험을 털어놨다. “2006년의 일이에요. 정중히 거절하는데도 고참이 문자와 전화를 계속했고, 사무실·숙소 앞으로 찾아오는 일도 잦았어요. 강제로 손목을 잡고 놓지 않아 뿌리치다가 시곗줄이 끊어지기도 했죠. 사회였다면 가방으로 때리고 따귀라도 때렸을 텐데, 고참이잖아요. 불가능한 일이죠. 고민 끝에 책임관을 찾아갔는데, 어떻게 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잘 거절하는 방법’을 설명해주더라고요.”

그나마 여성고충상담책임관은 연대·대대급 부대에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군 바깥에 도움 청하면 징계 사유

이렇듯 부대 안의 성폭력 대처 구조가 허술하지만, 부대 바깥 성폭력상담소 등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개인적으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거나 성폭력특별법 등이 정하는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도움을 요청할 수는 있다. 그러나 대체로 군 내부 일을 군 외부에 알리는 것은 주변으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기 십상이고, 괘씸죄에 걸려 ‘지휘체계문란’ 등 징계 사유가 될 수도 있다. 군인복무 규율도 기본적으로는 군 내부 일을 군 외부에 알리지 못하도록 정하고 있다(45조). 결국 피해 여군은 군 안팎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게 된다.

성범죄를 비롯해 여군의 전반적인 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기구가 계속 축소되는 것도 문제다. 여군 장교의 지휘 아래 여군 관련 정책을 입안할 수 있는 중요한 ‘포스트’였던 여군학교는 2002년 10월 여군들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폐지됐다.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여군정책 전담 기구인 여군발전단이 만들어졌지만, 이 또한 3년 만에 폐지됐다. 대신 국방부 인권복지국 산하에 국방여성정책팀(현행 국방여성정책과)이 만들어졌지만, 그나마도 인권복지국 산하 인사기획관 소속으로 위상은 더욱 축소됐다. 4천 명에 달하는 여군 문제를 총괄하는 여성정책과 인원은 8명에 불과하고, 책임자는 군인이 아닌 4급 공무원이다.

피우진 전 중령은 “군대는 계급사회인 만큼 여군 관련 정책이 군대 내에서 먹히려면 최고책임자의 지위가 높아야 한다”며 “여성정책과로 축소되면서 여군의 권익 문제를 담당할 대변자가 없어졌고, 최고책임자도 일반 공무원이다 보니 여군들이 공감할 실질적인 정책을 만들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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