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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국가는 곧 기업이다”

등록 2008-01-18 00:00 수정 2020-05-03 04:25

이명박 당선자의 오랜 철학…정부 조직의 기업화는 인수위 구성에서도 드러나

▣ 최성진 기자csj@hani.co.kr

‘국가도 기업이다.’ 이명박 당선자의 오랜 철학이다. 국가나 정부를 하나의 ‘법인체’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 당선자의 이같은 생각은 각종 인터뷰와 자서전 등을 통해 쉽게 읽을 수 있다.

“바야흐로 경제전쟁 시대다. 각각의 국가는 주식회사 유럽, 주식회사 미국이 되었다. (중략) 경제전쟁 시대에는 국가가 기업이 될 수밖에 없다.”(자서전 중에서)

국가가 곧 기업이라고 정의한 이 당선자는 자연스럽게 국가 경영과 기업 경영이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나는 대통령이 국가 최고통치자가 아니라 국가 최고경영자라고 생각합니다. 최고통치자라면 돈과 힘이 필요하지만, 최고경영자라면 고도의 경영기법이 필요할 것입니다.”( 2001년 3월호)

“기업 경영이 정치보다 몇 수 앞서”

정치와 경제 가운데 이 당선자가 윗길로 평가한 것은 단연 경제였다. 기업 조직이 정부보다 ‘혁신적’이고 ‘효율적’이며, 또한 ‘생산적’이라는 것이 이 당선자의 판단이다. 또한 그는 정치가 ‘경제와 비교해 엄청나게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의 개념은 ‘정치보다 몇 수 앞선’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 당선자는 또 다른 자서전 에서도 “군대가 20세기 중반 가장 앞선 조직이었다면 기업은 20세기 후반 이후를 이끌고 있는 프런트 조직이다”라고 단언했다.

국정운영의 본질을 기업 경영에서 찾고 있는 이 당선자의 철학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인적 구성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정치권 안팎의 이른바 ‘경제 전문가’들을 대거 발탁한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의 인수위가 정치인 중심이었고, 노무현 대통령이 학자들을 인수위에 투입한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그 가운데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삼성 등 대기업 출신 인사와 재경부 및 금융감독원 출신 관료나 학자 가운데 미국식 친기업 시장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이 포진돼 있다는 사실이다. 단적인 예가 인수위의 핵심인 국가경쟁력강화특위를 사공일 전 재무부 장관과 데이비드 엘던 두바이국제금융센터 회장에게 맡긴 것이다. 경제1분과위를 이끌고 있는 강만수 전 재경부 차관이나 윤증현 전 금감원장도 대표적 시장주의자들이다.

삼성 출신인 황영기 전 우리금융지주회사 회장과 지승림 선대위 고문을 투자유치TF에 배치한 것이나 이건수 동아일렉콤 회장을 인수위원장실 자문위원으로 배치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들 외에도 인수위 각 위원회와 TF의 간사와 팀장급들만 보더라도 미국에서 경제학 석·박사 과정을 마친 관료 및 학자, 정치인이 많다.

찰스 더버의 를 번역한 김형주 대통합민주신당 의원은 “단순히 재벌기업 출신이 몇 명 인수위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보다 미국식 자본주의 이론과 시장주의 이론만 배운 금감원 재경부 전직 관료들이 대거 배치된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며 “미국식 신자유주의와 친기업적 사고에 익숙한 인수위 관계자들이 인수위에서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주의깊게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CEO 대통령의 딜레마?

기업에 좀더 가깝게 다가가려는 이명박 당선자의 의중은 당선 이후 행보에서도 잘 드러난다. 대선 직후 재벌 총수, 대기업 계열 경제연구소 소장단, 상공회의소 회장단과 잇따라 만나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은 반면,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 등 노동계와의 만남은 뒤로 미뤘다. 한나라당 내부에서조차 이같은 기업 편향적 발걸음에 대해 비판을 내놓고 있을 정도다.

‘경제 살리기’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이명박 당선자의 행보가 의도와는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정부조직 개편이 청와대 비서실을 실질적으로 강화하는 쪽으로 맞춰지고 있는 게 한 예다. 청와대에서 경제정책을 직접 챙기겠다는 뜻인데, 이 당선자 쪽에서 지고지선으로 여기는 시장논리와 충돌할 수 있다. ‘CEO 출신 대통령’의 딜레마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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