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성장을 위한 자본 조달의 수단으로 도입… 뮤추얼 펀드와 적립식 펀드의 탄생으로 발전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흔히 ‘펀드’라고 불리는 증권투자신탁의 뿌리는 19세기 중엽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1997년 4월)는 전하고 있다.
영국은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을 계기로 막대한 규모의 화폐 자본을 축적했다. 영국 정부는 그 기회를 틈타 저리의 공채를 발행하는 저금리 정책을 실시했으며, 이 때문에 투자자들은 축적된 화폐 자본을 굴릴 투자처를 국외에서 찾게 됐다. 때마침 유럽 대륙에서는 1815년 나폴레옹 전쟁 뒤 전후 복구와 배상금 지불을 위해 높은 이율의 공채를 발행하고 있었다. 또 미국에서도 철도, 운하, 통신 등 산업시설에 대한 자금 수요가 왕성해 금리 수준이 높던 시기였다.
영국에서 미국과 유럽 전역으로
영국의 투자자들은 높은 금리를 좇아 외국의 정부, 기업이 발행한 유가증권에 투자하게 됐으며, 이런 해외투자 풍조는 대자본가뿐 아니라 일반 중소 투자자들 사이에도 빠르게 침투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대자본가들은 국외 투자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해외 유가증권에 투자해 큰 이윤을 남긴 반면, 일반 투자자들은 단순한 광고나 선전문구에 현혹돼 맹목적인 투자를 함으로써 막대한 손실을 입는 수가 많았다. 이에 따라 일반 투자자들은 자본을 한데 끌어모아 대자본을 형성해 투자 대상을 다양화함으로써 위험을 분산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객관적인 시장조사에 근거한 안전 투자의 필요성도 높아졌다. 불특정 다수의 투자자들로부터 모은 자금을 전문적인 투자 대행기관이 나서 유가증권에 분산 투자하고 여기서 생긴 수익을 투자자에게 돌려주는 펀드가 출현한 토양은 여기서 형성됐다.
투자신탁의 기원으로 불리는 세계 첫 펀드는 1868년 영국에서 생겨난 ‘해외 식민지·정부 신탁’(The Foreign Colonial & Government Trust)이었다고 한다. 이 펀드는 설립 취지서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외국 및 식민지 정부 증권에 분산 투자해 투자 위험을 감소시킴으로써 대자본가와 마찬가지의 이익을 일반 투자자에게 돌려주기 위한 것”이라고 목적을 밝히고 있다. 현재의 펀드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특성을 읽을 수 있다.
‘해외 식민지·정부 신탁’ 설립 뒤 중소 투자자들의 참여가 성행하게 됨에 따라 영국에서는 이런 투자신탁 업무를 수행하는 투자조합의 수도 점차 늘어났다. 또 국채, 지방채, 정부보증 철도채 등 확정이자부 증권에 한정돼 있던 투자 대상이 일반 산업의 주식으로까지 넓어졌다.
영국에서 생겨난 펀드는 미국으로 건너가 제1차 세계대전 뒤 산업의 부흥과 이에 힘입은 자본의 축적을 바탕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미국은 1776년 건국 이래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독립전쟁, 남북전쟁 등에 투입할 전비 조달 외에도 대규모 국토 개발로 항상 자본의 결핍 상태에 놓여 있었다. 여기에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 지역은 대량의 물자를 필요로 하게 됐고, 미국은 자연스레 공업 생산물과 농산물의 대량 수출국으로 떠올랐다. 이런 여건 변화에 따른 자본의 축적은 펀드를 발전시킨 중요한 바탕이었다.
미국 최초의 펀드는 1921년에 설립된 ‘미국 국제 증권 신탁’(The International Securities Trust of America)으로 기록돼 있다. 그 뒤 1929년 대공황으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1940년 투자회사법 제정을 비롯한 제도적 장치 마련으로 미국의 펀드는 비약적인 성장세를 거듭했다. 영국에서 시작된 투자신탁 제도는 미국을 거쳐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 유럽 지역과 일본으로 퍼져나간 데 이어 지금은 개발도상국에까지 널리 확산돼 있다.
1998년 증권투자회사법 제정
(2007년 10월)의 저자인 양규형 하나대투증권 전주지점 팀장은 “자본 축적이 양호하게 이뤄진 선진국들에선 펀드 수요가 자연스럽게 생긴 다음 제도와 법 체계가 이를 사후적으로 뒷받침한 반면, 개발도상국들의 경우는 경제 발전에 필요한 자본의 효율적인 조달을 위해 펀드에 대한 공모주 우선 배정 및 세금 우대 정책 등을 통해 정책적으로 발전시켜왔다”고 풀이했다. 한국 또한 경제 발전을 위한 자본 조달의 수단으로 펀드를 도입한 경우였다.
한국 최초의 펀드는 1970년 5월20일 1억원 규모의 수익증권 형태로 발행된 한국투자개발공사(→ 한국투자공사 → 대한투자신탁 → 하나대투증권)의 ‘증권투자신탁’이다. ‘증권투자신탁’은 1976년 1월 ‘안전성장 1월호’로 이름을 바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선 1970년대만 해도 주식 및 펀드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부족해 투자신탁 펀드의 발전은 부진했다. 그러는 중에도 1974년 8월 채권에만 투자하는 공사채형 펀드가 새롭게 도입되고 이듬해엔 ‘단위형 투자신탁’이, 1976년 4월엔 ‘재형주식 펀드’가 잇따라 도입되는 등 차츰 펀드 시장의 면모가 갖춰졌다. 단위형 투자신탁은 기존의 ‘추가형’과 달리 추가 납입을 할 수 없고 중도 환매 또한 극히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펀드였다. 투자신탁의 대중화를 꾀한 재형주식 펀드는 정부 지원에 따라 원금을 일정 부분 보전해주고, 금리를 추가로 더 얹어주는 파격적인 상품이었다.
국내 펀드 시장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큰 변곡점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12월 ‘증권투자회사법’ 제정이었다. 이는 기존의 ‘계약형 투자신탁’(수익증권)의 단점(자산운용의 투명성 부족)을 보완한 ‘회사형 투자신탁’(뮤추얼펀드)의 도입 근거였다. 이를 바탕으로 증권투자회사(페이퍼컴퍼니 형태)와 자산운용 위탁계약을 맺어 자산을 운용하는 별도의 ‘자산운용회사’가 설립됐다. 박현주 회장의 미래에셋이 탄생한 게 이때였다. 뮤추얼펀드는 수익증권과 달리 펀드 자체가 주식회사 형태를 띠고 투자자가 주주의 처지에 서지만, 둘은 실질적으론 거의 차이가 없다. 상품 약관에서 ‘증권투자회사’로 돼 있는 게 뮤추얼펀드다.
뮤추얼펀드 도입 뒤 투신사의 운용·판매 분리 정책에 따라 선발 3개 투신사(한국·대한·국민)와 지방 투신사들이 2000년 6월까지 단계적으로 투신운용사와 전환증권사로 분리됐다. 지금은 모든 투신운용회사와 자산운용회사가 펀드 자산의 운용을 전담하고 펀드의 판매는 증권사 또는 은행에서 맡고 있다.
대우 채권 사태로 펀드 시장 마비
외환위기 과정에서 국내 펀드 시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대우그룹을 부도 처리하면서 발생한 대우 채권이 공사채형 펀드 시장을 마비 상태로 몰아넣었던 게 대표적인 예다. 당시까지만 해도 공사채형 펀드는 ‘투자’가 아니라 원금을 보장해주는 ‘저축’으로만 여겨져 투자자들은 대규모 원금 손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정부와 금융기관들은 투자금의 일정 부분을 보전해주는 일종의 ‘타협책’으로 위기를 넘겼다. 투자 상품이라는 속성에 따른다면 온전히 투자자들의 책임이었음에도 금융시장의 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펀드 대중화의 길을 닦은 건 2004년에 도입된 ‘적립식 펀드’였다. 소액으로 조금씩 펀드에 저축하듯이 투자하는 적립식 펀드는 펀드 시장의 영역을 크게 넓혔다. 장기간의 저금리로 유동자금이 풍부한 상태였다는 터전이 여기에 불을 붙였다. 주가가 2천 포인트 고개를 넘고, 펀드 열풍이 불어닥친 배경에는 적립식 펀드가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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