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비판적 지지가 유효하지 않은 이유…한나라당과 범여권의 차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민중의 선택은?
▣ 장상환 경상대 교수·경제학
2002년 대선 당시 민주노동당은 ‘비판적 지지’ ‘사표심리’의 영향으로 상당수의 지지표를 민주당(2004년 이후 열린우리당) 노무현 후보에게 빼앗겼다. 수구보수 세력의 집권만은 막아야 한다거나 민주노동당은 어차피 집권 가능성이 없으니 당선 가능성 있는 후보 중 그래도 나은 후보인 노무현을 찍어야 한다는 주장이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에서는 어떨까? 일부 사람들은 아직도 비판적 지지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이 ‘그놈이 그놈’이라고도 하지만 그러한 작은 차이도 이라크 침공 등을 감안할 때 민중에게는 큰 의미를 가진다는 것 등의 이유를 댄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변해 ‘비판적 지지’의 현실적 근거와 설득력이 약해졌다. 근거는 세 가지다.
이제 대립각은 경제 불안과 양극화 문제
첫째, 중심적인 대립 구조가 달라졌다. 이제는 ‘파시즘(군부독재 세력) 대 민주주의’의 대립각보다는 경제 불안과 양극화 문제가 더 중요한 과제로 떠올라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 대중의 삶은 너무나 힘겹다. 일류 대학 진학열 때문에 소득의 20% 이상을 사교육비로 지출할 정도로 과도한 교육비 부담에 짓눌려 있다. 또 실업, 질병, 노령 등 기본에 해당하는 사회적 위험 대비도 제대로 돼 있지 않은 터에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시달린다. 여성들은 가사와 직장을 병행하기 어려워 결혼과 출산을 기피한다. 그 결과 출산율이 2005년 1.07%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노후 불안이 심해진 탓에 소득의 12%를 생명보험료로 보험회사에 바치고 있다.
이 모든 생활난은 노동시장이 지나치게 양극화돼 있는데다 사회복지는 취약해 온 국민이 밑바닥으로 추락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데서 생겨난다. 이러한 노동시장의 양극화는 외환위기 이후 두드러진 수익성 위주 기업 경영에서 비롯됐다. 재벌과 외국 자본이 힘을 합쳐 중소기업 경영을 압박하고 인건비 절감을 위해 비정규직 사용을 늘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항할 노동자들의 노조 조직률은 18%에서 11%로 하락했고,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미조직 상태에 머물러 있다.
정치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엔 너무 무력하다. 거대 여·야당은 모두 보수정당이고, 이에 맞서는 진보정당은 너무 미약하다. 자본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 경제를 활성화하자는 주장만 맹위를 떨칠 뿐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법률과 정책을 추진하자는 제안은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둘째, 한나라당과 대통합민주신당 사이의 차이가 2002년 대선 당시보다 훨씬 좁아졌다. 현재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50%를 넘어 60%에 육박하는 것은 한나라당이 좀더 현실적인 방향으로 변화한 결과다. 한나라당은 독재정권 시대의 상징인 박근혜 대신 기업경영자 출신 이명박을 후보로 뽑았다.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파시즘 체제로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대북한 정책도 강경 노선에서 협력 노선으로 바꿨다. 오른쪽 극단에서 중간 쪽으로 약간 움직여 중간층 사람들의 지지를 확보한 것이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도는 20%대로 하락하고, 대통합민주신당의 지지율이 10%대에 머물고 있다. ‘왼쪽 깜빡이를 켜고 오른쪽으로 회전한’ 결과 기존의 지지자들조차 떠났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는 많은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파병을 감행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밀어붙였다. 한나라당은 이를 크게 환영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스스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차이가 별로 없다고 실토한 바도 있다. 중도우파 노선에서 더 오른쪽으로 움직였는데 거기에는 이미 한나라당이 진을 치고 있었다. 결국 한나라당이 우파 진영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이다.
대통령의 영향력도 많이 약화돼
셋째, 한국 정치에서 대통령의 영향력은 많이 약화됐다. 무슨 정책을 펴려 해도 법률과 예산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국회에서 결정한다. 과거에는 행정부가 국정을 주도했지만, 이제는 입법부로 주도권이 옮겨졌다. 따라서 대선에서 비판적 지지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우리 사회의 대립 구조를 정치적으로 정확히 반영하고 이것이 총선으로 연결돼야 하는 상황이다.
노무현 정부와 여당에 실망한 국민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내세우는 연간 7% 성장에 눈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고도성장 달성 방법은 감세와 기업규제 완화다. 분배를 악화시켜 성장을 달성하자는 것이다. 그야말로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이다.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경제 성장이 일자리 확대로 연결된다는 보장도 없고, 설혹 일자리가 늘어난다 해도 비정규직 중심일 가능성이 크다. 이명박 후보의 약속을 기대했다가는 헛물을 켜고 말 것이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압축성장을 통해 절대빈곤에서 벗어났다. 1987년 6월항쟁으로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적 권리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의 규제 완화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으로 모순이 압축적으로 누적됐다. 누적된 모순은 압축적으로 해결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 ‘복지 후발국’으로서 선진국의 복지국가 확립 경험을 참고하면 된다. 서구 복지국가는 노동자 계급정당의 정치적 힘의 성장을 배경으로 확립됐다. 이제 약자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에 투표하면 된다. 이것이 양극화된 우리 사회를 가장 빨리 바꾸는 방법이다.
물론, 민주노동당도 한계를 보이고 있다. 특히 ‘민주노총당’이라는 비판은 따갑게 들어야 한다. 현재 민주노총의 주력은 대기업과 공공부문 노동자들로, 노동계급 내의 양극화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현실 극복의 자세’보다는 조금이라도 임금을 더 많이 받아 장래의 고용불안에 대처하려는 ‘현실 적응의 자세’를 보여왔다. 이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의 영향을 크게 받는 민주노동당을 별로 지지하지 않는 것이다. 정부 여당에 실망한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변화의 조짐은 있다. 민주노동당의 대선 후보 선출 과정에서 ‘운동권 정당’ ‘민주노총당’ ‘친북정당’의 극복을 강조한 심상정 의원이 노회찬 의원과 함께 절반에 육박하는 지지표를 얻었다. 민주노총도 변화하고 있다. 대기업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요구 파업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약한 것을 인식하고 있다.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보장 투쟁에 민주노총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민노당은 대안을 분명히 제시해야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비판적 지지에 휘둘리지 않고 많은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면 보수정당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대안을 분명히 제시해 국정 운영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핵심 지지 기반이 돼야 할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 의지와 능력이다. 비정규직 문제 등의 해결을 위해선 중소기업을 갈취하는 재벌의 부당거래에 대한 규제, 비정규직 사용 제한과 차별 철폐, 사회보장을 통한 사회적 임금 확충 같은 복합 처방이 요구된다. 이들 과제 모두 민주노동당의 국회 의석 증가와 대중적 압력에 의한 법률 제·개정을 필요로 하는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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