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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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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를 지키는 삼각동맹

등록 2007-07-20 00:00 수정 2020-05-03 04:25

유족회-자민당-후생노동성으로 이어지는 표와 권력과 돈의 교환관계

▣ 도쿄=스나미 게스케 프리랜서 기자 yorogadi@hotmail.com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서면서 “총리가 되면 어떤 비판이 있어도 매년 8월15일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할 것”이라고 공약해, 자민당의 최대 파벌인 하시모토 류타로를 꺾고 일본 총리가 됐다. 하시모토 중의원은 1993년부터 95년까지 일본유족회장을 맡은 적이 있기 때문에, 자민당 총재 선거는 일본유족회(이하 유족회)의 지지를 받은 하시모토가 압승할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승자는 야스쿠니신사 참배 약속으로 유족회의 표심을 잡은 고이즈미였다.

신사 참배 공약으로 총리가 된 고이즈미[%%IMAGE4%%]

2001년 자민당 총재 선거를 둘러싼 이 에피소드는 일본 여러 재판소의 위헌 판단과 중국, 한국 등 주변 나라의 극심한 반발에도 매년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행한 고이즈미 전 총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준다. 그는 “신사 참배는 마음의 문제”라고 말했지만, 신념에 의한 행동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사실 그가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고집한 것은 그를 자민당 총재로 만들어준 유족회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총리 취임 이후 여러 국내외의 비판을 무릅쓰고 매년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했다. 고이즈미에게 유족회는 끝까지 무시할 수 없는 압력단체였던 것이다.

자민당 총재 선거는 일본 총리를 선택하는 선거다. 총재 선거의 투표권을 갖는 것은 자민당원뿐이다. 태평양전쟁 전사자 유족들의 60% 정도가 가입하고 있는 일본 유족회의 회원은 약 100만 가구 정도다. 유족회원들 가운데는 자민당원이 많기 때문에 총리가 되고 싶은 꿈을 꾸고 있는 정치가라면 그들 표를 무시할 수 없다. 일본 정부를 향한 유족회의 일관된 요구는 일본 총리가, 그리고 더 나아가 천황이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라는 것이다.

일본 자민당 정치인들과 유족회의 관계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일본의 82·83대 총리를 지낸 하시모토는 왜 유족회의 회장이 됐는가. 그가 후생성(지금의 후생노동성)과 강한 연계를 맺고 있는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후생성의 비서관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해 나중에 후생대신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후생성은 유족회에 연금과 보상금을 지급하는 기준이 되는 은급법이나 원호법(전상병자전몰자유족등원호법) 등을 관할하는 정부기관이다. 유족회는 후생성과 깊은 관계를 맺는 정치인들을 지지해 국회로 보내면, 그들은 은급법과 원호법 등의 적용 대상을 늘리거나 지급 금액을 늘리는 방식으로 유족회의 편의를 봐준다. 유족회는 정치인들에게 표를 주고, 정치인들은 후생성을 통해 유족들에게 금전적 보상을 해주는 공생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유족회와 자민당 의원의 관계는 매우 뿌리 깊다. 3대 회장 이후 유족회장은 모두 자민당 중의원 의원이다. 현 회장도 고가 마코도 자민당 의원이고, 부회장은 후생노동상을 맡았던 오쓰지 히데히사 자민당 의원이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유족회장은 아니었지만, 후생상을 두 번이나 지냈다. 유족회의 관계 단체로 일본유족정치연맹이 있다. 1986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해 중국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다음해 나카소네는 참배를 포기했지만 일본유족정치연맹은 “만약 참배를 중지한다면 연맹에 소속된 자민당원 16만 명을 탈당시킨다”고 위협했다. 탈당은 결과적으로 중지됐지만 자민당이 받은 충격은 헤아릴 길이 없었다. 일본유족회 연구자 하타 나가미 등이 1995년 펴낸 책 를 보면 일본유족회, 자민당, 후생노동성을 연결하는 ‘철의 트라이앵글’이 만들어지고 작동되는 과정이 잘 묘사돼 있다.

전쟁으로 아들, 남편, 아버지를 잃은 유족들의 생활은 정말 비참했다. 1947년 유족들의 궁핍한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성된 유족회는 이후 일본 정치에 영향을 주는 커다란 압력 단체로 성장해 왔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전쟁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는 원호법 등 10여개의 법률을 만들었다. 일본 정부는 유족이나 전상자들에게 매년 1조5천억엔(11조여원)에 달하는 막대한 지출을 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의 경제력은 유족회

생활이 안정을 찾아가자 많은 유족들은 “내 남편이나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 생명을 바쳤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유족회는 ‘태평양전쟁은 올바른 전쟁이었다’고 하는, 야스쿠니신사와 매우 비슷한 역사관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야스쿠니신사를 국영화하고, 총리와 천황은 신사에 공식참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흐름 속에서 유족회는 ‘야스쿠니신사 법안’을 만드는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물론, 유족 가운데서는 야스쿠니신사의 역사관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1962년 유족회는 일본 정부가 야스쿠니신사를 운영해야 한다는 ‘야스쿠니신사 국가 호지(護持) 요강’을 발표했다. 이를 바탕으로 자민당이 ‘야스쿠니신사 법안’을 만들어 1969년 국회에 제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헌법이 정하는 정교분리에 어긋나고 복고적인 성격의 법이 제정될 분위기가 아니었다. 법안은 1973년까지 5번이나 국회에 제출됐지만 번번이 불성립으로 끝나게 된다. 유족회의 활동은 이후 총리의 공식 참배를 요구하는 운동으로 바뀌어 갔다.

야스쿠니신사는 일본 유족들과 태평양전쟁에서 같은 부대에서 싸웠던 병사들이 모여 만든 여러 ‘전우회’에 안식처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유족회와 전우회는 매년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해 적지 않은 돈을 기부해왔다. 즈시 미노루 ‘야스쿠니참배위헌소송의모임’ 사무국장은 “야스쿠니신사에 유족회나 전우회는 경제력이다”라고 말했다. 자민당 의원을 중심으로 한 국회의원들이 유족들에게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어주고, 그 제도에 기반해 후생노동성은 연금을 지급하며, 유족회는 그 돈의 일부를 떼어 야스쿠니신사에 봉납한다. 이렇게 보면 자민당, 후생노동성, 유족회, 야스쿠니신사를 잇는 관계가 드러난다. 돈의 흐름으로 보면 일본 정부(후생노동성)→유족회→야스쿠니신사로 이어지고, 영향력의 흐름으로 보면 야스쿠니신사→유족회→자민당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관찰된다.

그러나 야스쿠니신사를 둘러싼 현실은 점점 나쁘게 진행되는 중이다. 유족회와 전우회도 고령화가 진행되는 중이고, 경제력도 약해지고 있다. 야스쿠니신사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종교시설 가운데 하나지만 그 경제력은 해마다 쇠퇴하고 있다.

종교 법인의 수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수익사업이다. 야스쿠니신사도 주차장이나 빌딩을 경영하고, 역사박물관인 유슈칸의 입장료를 받으며 기념품도 판다. 1996년에는 수입이 4억311만엔에 달했지만 이제는 3억엔 미만까지 떨어졌다. 또 하나의 수입은 기부나 기도료다. 이것은 종교활동에 의한 수입으로 과세되지 않아 정확한 규모는 아무도 모른다. 아사히신문사가 발행하는 주간지 2005년 7월25치를 보면, 이 두 사업을 합친 전체 수입은 20년 전의 절반 정도로 떨어져 연간 12억~15억엔 정도인 것으로 나타난다. 신사의 직원도 20년 전의 130명에서 100명 선으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비밀리에 작동되는 ‘철의 트라이앵글’을 노골화해 신사를 국영화하자는 의견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야스쿠니신사는 전쟁 전과 같은 지위를 회복하게 된다.

야스쿠니신사 문제는 지난 전쟁을 미화하는 정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돈과 선거 표가 결합된 현실의 문제이기도 하다. 야스쿠니신사를 배경으로 교환되는 일본 보수세력의 돈과 선거 표는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던 일본 우경화의 또 다른 작동 원리인지도 모른다.



위헌 판결도 계속된다

소송으로 신사참배와 싸우는 시민들…총리의 참배에 대한 위헌 판단 쏟아져

야스쿠니신사에 반대하는 일본 시민들의 저항운동은 전국에 골고루 퍼져 있다. 그들은 총리가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할 때마다 사법부에 재판을 거는 방식으로 반대운동을 펼쳐왔다. 일본은 한국과 달리 헌법재판소가 없기 때문에 총리의 참배가 위헌인지 묻고 싶어도 물을 통로가 없다. 그 때문에 ‘총리의 참배 때문에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등의 간접적인 이유로 재판을 제기해 재판관이 판결 중에 총리 참배의 위헌성을 판단하도록 만들고 있다.



야스쿠니신사와 관련해 가장 먼저 주목해봐야 할 판결은 에히메현의 ‘야스쿠니신사 비쭈기나무 소송’이다. 일본에서 가장 보수적인 지방으로 꼽히는 에히메현은 1981년부터 6년 동안 야스쿠니신사가 행사를 할 때마다 신에게 바치는 가지인 ‘비쭈기나무’를 구입하는 비용을 공금(합계 16만6천엔)으로 처리해왔다. 에히메현의 시민단체들은 이에 대해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못박은 헌법 20조 등을 위반했다며 1982년 6월 소송을 냈다. 1심의 마쓰야마 재판소에서는 시민 쪽이 이겼지만 2심인 다카마쓰 고등재판소는 ‘지사의 행위는 유족 원호 행정의 일환이며 종교적 활동에 임하지 않는다’고 합헌 판결을 내렸다. 최종 판결은 첫 문제 제기가 있었던 1982년에서 15년이 흐른 1997년 4월2일 내려졌다. 시민 쪽의 승리였다. 최종심의 최고재판소는 고등재판소의 판결을 뒤집어 ‘야스쿠니신사라고 하는 특정 종교단체에 대해 행정이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다’라는 이유로 위헌 판결을 내렸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는 총리가 된 2001년부터 매년 한 번씩 모두 6번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했다. 도쿄·치바·오사카(2건)·마쓰야마·후쿠오카·나하 등 전국 6개 지역 지방재판소에서 7건의 위헌 소송이 제기됐다. 특히 오사카에서는 원고단에 대만 원주민족도 참가했다. 후쿠오카 지방재판소,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총리의 참배는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지만 다른 재판소는 헌법 판단을 회피해버렸다. 고이즈미 총리는 2005년 9월 오사카 고등재판소의 위헌 판결에도 “나의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헌법 위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총리의 직무로서 참배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반응을 보였고, 다음해 8월15일 다시 참배했다.
그 이전의 소송 예를 찾자면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참배에 대해 3건의 소송이 제기됐다. 그중에서 후쿠오카 고등재판소는 “총리가 공식 참배를 반복한다면 위헌이 된다”는 것을 지적했고, 오사카 고등재판소도 “종교적 활동에 해당하는 혐의가 강하고, 헌법에 위반하는 혐의가 있다”고 지적했다.
나카소네, 고이즈미 두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한 헌법 판단을 보면 ‘위헌의 혐의가 강하다’ 또는 ‘위헌이다’라는 판단이 몇 번이나 나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총리와 각료들의 참배는 계속되고 있다. 사법이 경시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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