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행위의 관점에서 국가 정책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희한한 제도, ‘조세·부동산 예외’ 발표에도 의혹 많아
▣ 홍기빈 저자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한국 정부는 스스로의 판단에 근거해 모종의 정책- 환경 정책이든 산업 정책이든- 을 입안하고 집행한다. 그런데 한국에 투자했던 어느 미국 자본가는 이 새로운 정책 혹은 법령으로 인해 자신의 수익성이 중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이 정책이 자신의 사적 소유에 대한 침해인 ‘간접 수용’이니 자신의 피해액을 배상하라고 한국 정부에 일방적으로 요구한다. 물론 한국 정부는 거부한다. 그러자 그 미국 자본가는 90일 안에 변호사를 선임해 자신의 변호사와 만나서 국제중재재판소가 뽑아준 심판관 1인과 함께 모여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통지서를 보내는데, 그 액수는 물경 3천억원. 깜짝 놀란 한국 정부 당국은 울며 겨자 먹기로 100억원이 넘는 법정 비용을 써가며 변호사를 뽑아 그 미국 투자자 쪽 변호사와 맞싸움을 벌이도록 내보낸다. 그런데 결과는 한국 정부가 그 미국 투자자에게 2천억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나온다. 한국 정부는 꼼짝없이 그 돈을 모두 현금으로 1년 만에 갚지 않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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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 상인법 전통에서 나와
이런 식으로 해 멕시코는 유해 물질로 지역 주민들의 건강을 파탄낸 쓰레기장 매립 허가를 취소했다가 사업주인 미국 회사 메탈클래드에게 2000년 1600만달러를 지불하라는 판정을 받았다. 미국 투자자 로널드 라우더는 체코에 가지고 있었던 TV 방송국 내부의 경영권 싸움에서 패배하는데, 체코 정부는 이 사태에 대해 ‘감독 소홀’의 구실로 2억7천만달러를 지급하라는 판정을 2003년에 받게 된다. 비슷한 과정으로 레바논 정부는 프랑스 투자자에게 2억6천만달러를 물어줘야 했다. 러시아 정부는 유코스(Yukos)에 투자한 외국인들에게 총 330억달러에 달하는 세 건의 분쟁에 휘말려 있는 상태이다.
요컨대, 투자자는 자신이 부당하게 피해를 입었다고 판단하기만 하면 마음대로 투자 대상국 국가를 분쟁 중재 절차로 끌고 나올 수 있다. 국가는 꼼짝없이 끌려나와야 하지만 반대로 외국 투자자를 제소할 수는 없다. 그렇게 시작된 3인(국가 쪽 변호사, 투자자 쪽 변호사, 심판관)의 모임은 부당한 피해가 있었는지 그리고 피해액은 어느 정도인지를 판단해 필요한 조처를 한다. 분쟁의 대상이 되는 정책은 환경·산업 정책은 물론 심지어 ‘감독 소홀’에까지 걸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리고 일단 분쟁이 시작되면 결정은 오롯이 그 3인이 독점한다. 그 국가의 국민들은 손가락을 물고 구경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즉,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법정’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 것이 이 ‘투자자-국가소송제’(ISD)의 분쟁 중재 절차이다.
이렇게 희한한 제도는 어떻게 태어나게 된 것일까? 먼 옛날 중세 유럽에는 상인법(lex mercatoria)이라는 비공식적인 법 체계가 있었다. 유럽 전역을 누비는 상인들에게 상업적 시비가 생길 때마다 교회나 영주의 ‘법정’으로 가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비용으로 보나 시간으로 보나 결코 수지맞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 사이의 신망 있는 상인 한 사람을 중재심판으로 삼아 당사자들이 직접 만나 합의를 보는 것을 상인들 세계 안에서 일종의 법처럼 만들었다. 이러한 분쟁 중재(arbitration)의 전통은 20세기에도 살아남았고, 특히 1980년대 끝 무렵 전세계로 확장되기 시작한 양자간 투자협정(BIT)과 자유무역협정(FTA)의 물결 속에서 이 ISD라는 독특한 제도를 탄생시킨다. 분쟁의 발생과 해결의 절차는 상인법적 전통의 틀 속에서 행해지는 분쟁 중재와 동일하지만, 분쟁 당사자들은 상인들이 아니라 한쪽은 투자가요 한쪽은 주권 국가인 데다, 분쟁의 대상이 되는 것도 상거래가 아닌 그 주권 국가가 행하는 제반의 법적·행정적 조처이다.
한마디로 외국 투자자가 안심하고 투자를 할 수 있도록, ‘투자가와 상인들이 주권 국가와 동급의 법적 지위로 올라서서 그 주권 국가의 행위를 상행위의 관점에서 시비를 걸고 맞장을 뜰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제도는 1994년 체결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경험 속에서 전 지구적으로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국제 투자가들의 이익을 지킨다는 목적에서 주권 국가의 환경 정책, 공공 정책, 보건 정책 등이 무력화되고 있으며 또 앞으로 더욱 무력화될 것이라는 분노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온 것이다.
외국 투자자에게 힘을 주는 ‘간접수용’ 개념
이 희한한 제도를 더욱 악명 높게 만든 것은 이른바 ‘간접 수용’(indirect expropriation)의 개념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 철도나 도로를 놓는 과정에서 해당 지역의 개인 토지들을 공공의 목적에서 가져가는 경우처럼 공공의 목적에서 개인의 사적 소유를 가져가는 것을 ‘수용’이라고 하며, 이때 국가는 응분의 보상을 그 개인에게 해야 한다. 그런데 이 ‘간접 수용’이란 국가가 실제로 사적 소유권을 가져가지 않았다고 해도 일련의 조처와 정책을 통해 개인 자산의 수익성 등 ‘자산 가치’를 심하게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으니 응당 그 피해액만큼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러한 확장된 수용의 개념이 채택될 경우, 투자 대상국은 단순히 외국 투자자의 자산을 함부로 가져가는 것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들의 수익성을 심각하게 건드릴 만한 일체의 정책과 조처를 하지 못하도록 위축당하게 마련이므로, 이 제도에서 투자 대상국 국가와 외국 투자자 사이의 비대칭적 권력을 더욱더 후자 쪽으로 기울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국민들에게는 줄곧 이 제도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글로벌 스탠더드’”이며, 이에 대한 비판과 우려는 “무지와 오해”의 소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제도의 파괴성을 심각하게 고려해, 간접 수용 관련 분쟁은 국제 분쟁 절차가 아니라 한국의 사법 체계로 해결하자는 실로 ‘대담한’ 요구까지 제출한 바 있으며, 이것이 거절당하자 최소한 부동산이나 조세 정책만은 ISD를 통한 외국 투자자의 분쟁 대상이 되지 않도록 제외하자고 마지막 순간까지 끈질기게 요구했다.
현재 정부는 협상 과정에서 이러한 ISD, 특히 간접 수용과 관련된 문제점들을 줄이기 위해 자신들의 요구를 ‘대폭’ 관철했다고 홍보하고 있다. 그 골자는, 첫째 부동산과 조세 정책은 (간접) 수용을 구성하지 않는 것으로 명시해 ISD를 통한 미국 투자자의 분쟁 대상에서 원천적으로 제거했고, 둘째 외환위기 등의 상황에서 발동하는 세이프가드(긴급조치)는 ISD 분쟁 대상에서 제외했고, 셋째 보건 환경 안전 등과 관련된 공공정책들도 ISD 분쟁에서 제외했다는 것이다.
아직 타결된 협정안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정부의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를 확실하게 평가하기는 힘들지만, 지금까지 언론 보도 등으로 알려진 사실만으로도 이것이 실상에서 심하게 부풀려진 과대 선전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먼저 정부가 ‘부동산 정책’이라고 하고 있는 것은 기실 ‘부동산 가격 안정화 정책’으로서,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에 의하면 그 내용은 주택담보대출인정비율(LTB)이나 투기과열지역의 대출금리 조정 등의 정책에 국한되는 것으로서 부동산 정책이라기보다는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 관리에 관한 ‘거시 금융 정책’이라고 보아야 한다. 막상 부동산 정책의 핵심을 이루는 부동산 계획이나 토지의 관리 및 사용에 관련된 정책을 제외시켜달라는 우리의 요구는 이미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완강한 반대에 의해 좌절된 바 있다.
‘명백한 위협’이 있을 때만 예외라고?
조세 정책의 경우도 ‘일반적으로’ 수용을 구성하지 않는다고 돼 있으나, 그 ‘일반적’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고 되레 분쟁해결 장(chapter)으로 가보면 ‘조세 조치는 원칙적으로 협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 단, 조세 조치가 수용에 해당하는 경우는 투자자 대 국가 간 분쟁 해결 절차(ISD)가 적용’이라는 구절이 나타난다. ISD나 다른 법률 분쟁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해당 사건이 일반적인 것에 해당하는가, 예외적인 것에 해당하는가이다. 요컨대 ‘일반적인 경우’는 아예 분쟁이 일어나지도 않게 마련이다. 그런데 법무부에서 4월4일 나온 보충 문답 문건에도 이 ‘일반적으로’의 정의는 나오지 않고 있으며, 되레 ‘조세 조치도 예외적인 경우에는 간접 수용이 될 수 있도록 협정문에 규정된 것은 사실임’이라고 의혹을 한 번 더 확인해주고 있을 뿐이다.
또, 보건 안전 환경 정책의 경우에 대해서도 미국 쪽은 협상 타결 직전인 4월1일까지 이것들을 간접 수용 개념에서 배제하는 것은 오직 ‘진정하고 명백한 위협이 있을 경우’로 한정하자고 했고 이를 한국이 받아들였다는 보도가 있었다( 최우성 기자, “투자자-국가소송제 결국 미국 뜻대로”). 원래 보건 안전 환경 정책이란 단 1%의 위험성만 있어도 즉각 발동되는 예방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에 준거하는 것인데, 보건 안전 환경 문제에서 ‘진정하고 명백한 위협’이 발생한 상태는 사실상 ‘준재난’ 상태와 다름없다. 정부가 함구하고 있지만, 만약 타결 협상안이 정말로 ‘진정하고 명백한 위협’이라는 문구를 포함하고 있다면 사실상 준재난 상태가 발생하기 이전의 예방적 정책들은 모두 ISD의 분쟁 대상으로 남아 있는 셈이 된다. 결국 타결된 ISD 관련 협상안은 미국의 표준적 ISD 협상안을 그대로 답습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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