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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 내용 공개되면 크게 불 붙을 것”

등록 2007-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주제준 범국본 공동상황실장 “반대 운동에 이익단체 등 구체적 피해자들 조직하겠다”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타결된 뒤 주제준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 공동상황실장(전국민중연대 사무처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이제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든 격”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벌여온 한-미 FTA 반대 투쟁보다 더 격렬한 비준 반대 싸움을 예고한 것이다. 범국본은 ‘협상무효, 체결반대’를 내걸고 매일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국회의원 53명과 공동 행동 논의하기로

지난 1년 동안 벌인 ‘협상 저지’ 싸움보다 앞으로 전개될 ‘체결 반대’ 싸움이 더욱 거셀 것이라는 말에는 그만한 근거가 있다. 5월까지 국회에서 한-미 FTA 협상 청문회가 열리면 타결안의 구체적인 내용이 흘러나오게 될 것이고, 그러면 각 분야에서 이해관계를 가진 잠재적 피해자들이 들고 일어설 공산이 크다. 자연히 한-미 FTA 비준은 구르는 눈덩이처럼 정치적 폭발력이 갈수록 커지게 된다. 타결 이후 장막이 걷히면 정치인들과 관련 업계가 술렁이게 되고, 범국본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시민·사회세력뿐 아니라 정치인·기업가까지 합세하는 더 큰 반대 싸움이 벌어질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범국본은 곧 한-미 FTA 체결에 반대하는 비상시국회의 소속 국회의원 53명과 만나 공동 행동을 논의하기로 했다. 또 분야별 협상 내용을 상세하게 분석·비판한 ‘협상무효 보고서’도 내기로 했다.

사실 구체적인 협상 내용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한-미 FTA에 대한 판단을 미루고 있었는데, 정작 협상 내용이 낱낱이 알려지면 반대 여론이 곳곳에서 광범위하게 불붙을 가능성이 높다. 한-미 FTA 체결로 각 분야에서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실직 사태가 일어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협상 타결 이전에 실시된 어느 한-미 FTA 여론조사를 보면 흥미롭게도 “한-미 FTA가 체결돼도 나는 피해를 보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이 48%에 달했다. 자신은 한-미 FTA와 무관하다는 것인데, 대부분은 협상 정보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대답을 내놓았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주제준 실장은 “스위스는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 미국과의 FTA를 부결시켰다”며 “ 협상이 타결됐다고 해서 꼭 의회와 국민들의 비준·승인이 이뤄진다는 보장은 없다”고 말했다.

범국본의 협상 저지 싸움에도 불구하고 결국 협상은 타결됐지만, 한-미 FTA의 문제점과 국민들한테 미칠 파괴적 충격을 지속적으로 알린 것이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고 범국본은 자평한다. 주 실장은 “범국본 활동에 따라 국민들의 한-미 FTA에 대한 의식 수준이 높아졌고 이것이 정부가 애초 약속했던 2006년 연내 타결을 막은 동력으로 작용했다”며 “졸속 협상에 대한 비판 여론이 확산되면서 정부 협상단이 ‘실익이 없으면 협상을 체결하지 않겠다’는 말로 정치적 쇼를 해가면서 국민의 반발을 무마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됐다”고 말했다. 사실 약제비 적정화 방안, 광우병 쇠고기 문제, 투자자-국가소송제 등은 그전에는 국민들한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인데, 협상 과정에서 이런 큰 쟁점이 불거지면서 반대 여론도 높아졌다. 특히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을 지낸 정태인씨가 한-미 FTA를 정면 비판하고 나서면서 졸속 협상이 쟁점으로 대두되고, 수의사 박상표(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 연대)씨가 광우병 쇠고기 문제를 날카롭게 폭로하면서 반대 여론에 불을 붙였다고 할 수 있다.

각 분야 협상 실무자들이 공부해 대응해야

그러나 지난해 8월 정부 쪽 한미FTA체결지원위원회가 발족된 뒤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정부의 대대적인 한-미 FTA 홍보광고 공세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정부는 추석 귀향길 고속버스마다 ‘한미FTA 협상단 드림팀’을 내세우며 수출의존도 70%인 한국이 살길은 개방과 FTA밖에 없다는 홍보물을 대대적으로 뿌렸다. 주제준 실장은 “한-미 FTA에 찬성하는 대표적인 집단이 대학생·화이트칼라·서울 거주자들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정부의 홍보광고 물량 공세가 먹혀든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정부가 치밀하게 지역 TV방송마다 한-미 FTA 토론회를 조직했는데, 지역에서는 한-미 FTA 반대 논리를 설득력 있게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부족한 터라 정부의 전략이 어느 정도 통한 것 같다”고 말했다. 체결지원위원회는 또 제약협회 등 이익단체들을 집요하게 접촉해 한-미 FTA를 홍보하기도 했다.

물론 범국본도 한-미 FTA를 통한 다국적 제약사들의 공세 국면에서 국내 제약업계를 설득해 반대 싸움에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제약업계가 의약품 선별등재(비용 대비 효과가 우수한 신약만 건강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는 제도) 방식에 반대하는 바람에 ‘연대 투쟁’을 만들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또 범국본은 한-미 FTA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반대 싸움의 앞줄에 세우는 방안도 고려했으나 복잡한 사정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주 실장은 “이 문제는 농촌 지역구 국회의원들을 움직여야 하고, 결국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주도했어야 한다”며 “그러나 과거 한-칠레 FTA 비준 때 농촌 출신 의원들도 대거 찬성표를 던진 데 깊은 배신감을 갖고 있는 전농이 ‘지금은 국회의원들을 만날 때가 아니고 정부를 더 압박하는 싸움을 벌여야 한다’로 정리했었다”고 말했다.

정부는 ‘경제적 실익’을 홍보 메시지로 내세웠고, 상당수 일반 국민들도 한-미 FTA를 관세 축소·철폐 등 단순한 ‘무역협정’으로 간주하고 경제 성장 효과 등 중·장기 실익을 찬반의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그런데 한-미 FTA 반대를 외친 상당수 전문가들은 “한-미 FTA가 한국의 법·제도·관행 등 시스템을 파괴할 재앙”이란 점을 강조한 반면, 경제적 실익 문제에는 상대적으로 정교한 비판을 가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주 실장은 “진보 경제학자들이 부족한 탓에 경제학적 연구를 통한 반대 논리를 많이 만들어내는 데 한계가 있었고, 결국 각 분야의 현장 실무자들이 복잡한 한-미 FTA 문제를 스스로 공부해 대응해야 했다”고 말했다.

물론 경제적 실익을 따져볼 수 있는 각종 자료는 정부가 갖고 있고, 범국본 쪽이 연구해 폭로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주 실장은 “관련 자료를 갖고 있는 정부가, 장밋빛 미래만 말할 것이 아니라 자신감이 있다면 데이터를 내놓고 경제적 손익을 국민들한테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지난 1년간 싸움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건 국민들의 찬반이 엇갈렸다는 것보다는 한-미 FTA 협상 내용이 거의 공개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하게 비판하는 데 애를 먹었다는 뜻이다. 물론 거꾸로 보면, 이것이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정부의 전략이었을 수도 있다.

뼛조각 쇠고기 사건 때 대규모 집회 지속됐으면…

한-미 FTA는 협상단의 손을 떠나 이제 국내 여론 싸움 국면으로 들어갔다. 체결 여부는 국회가 결정하지만 여론의 향배가 관건이 될 것이다. 주제준 실장은 “미국산 뼛조각 쇠고기가 세 번 반송 조처되면서 국민들의 우려와 반발이 확산됐는데, 당시 11월 한-미 FTA 반대 시위 때 10만 명 이상을 동원하는 대규모 집회가 서너 차례 지속됐으면 국면을 완전히 뒤집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범국본 쪽은 5월 중순께 협정 내용이 구체적으로 공개되면 ‘현실적인 피해자’ 처지에 놓일 국내의 각종 이익단체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고 어떤 시점에서 반대 여론이 크게 불붙을 것으로 보고 있다. 주 실장은 “정부가 ‘감귤은 민감 품목으로 끝까지 지킨다’고 말하면서 농가의 반발을 무마해왔으나 막상 감귤 개방 내용이 드러나면서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며 “이익단체 등 구체적인 피해자들이 반대운동의 맨 앞에 서도록 조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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