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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집착, 개방철학

등록 2007-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개방만이 살 길이라는 역사관의 대통령과 통상대국론의 경제관료가 만나 창조된 한-미 FTA

▣ 신승근 기자 한겨레 정치팀 skshin@hani.co.kr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 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한창이다. 특히 한나라당과 보수세력을 중심으로 그의 결단력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노 대통령을 ‘조선노동당 대변인’이라고 공격했던 김용갑 한나라당 의원은 FTA 타결을 ‘경제의 6·29 선언’으로 규정하며 노 대통령의 결단력을 극찬했다. 노 대통령을 ‘무능한 반미 좌파’로 낙인찍던 극우 논객 조갑제씨는 노 대통령을 “초인적인 능력”의 소유자라 칭송했다. 10% 후반에 머물던 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협상 타결 뒤 30%를 넘어 가파른 상승세를 타면서, 정치권에서는 “노 대통령이 ‘FTA 로또’에 당첨됐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동시다발 FTA 추진론’ 자리잡아

청와대는 진보적 사회단체들 다수가 비판하는 가운데, 보수 진영의 갑작스런 ‘칭찬 릴레이’가 마냥 즐겁지는 않다는 분위기다. 윤승용 청와대 홍보수석은 지난 4월3일 “참여정부에 대해 한 번도 우호적인 글을 쓰지 않았던 어떤 신문의 칼럼니스트는 ‘복 받은 나라’라는 글까지 썼다. 어리둥절하다.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청와대의 한 핵심 참모는 “진보는 등 돌리고, 보수가 지지하는 현실이 당혹스럽다. 찜찜할 뿐이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이런 아이러니한 현실에 대해 나름의 분석틀을 내놓았다. 청와대 홍보수석실은 4월4일 “국민들이 참여정부를 탄생시키고 지지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념이 아니라 대통령의 원칙과 소신이다. 지난 4년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제 원칙과 소신이 하나하나 결실을 맺고 있고, 한-미 FTA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밝힌 것이다.

청와대가 말한 한-미 FTA에 관한 ‘대통령 노무현’의 원칙과 소신은 과연 무엇일까. 왜 진보 진영의 반발과 조롱을 감수하며, 극우 논객들이 환호하는 FTA 체결에 그토록 집착한 것일까.

노 대통령의 집착은 나름의 정서와 역사관에 근거한 자기 확신과 ‘통상대국론’으로 무장한 경제관료가 만나 창조된 ‘한국의 미래에 대한 노무현식 비전’의 결정판으로 볼 수 있다.

청와대의 한 핵심 참모는 “노 대통령은 한-칠레 FTA 비준동의안이 국회로 넘어간 2003년 초부터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실패 사례를 예로 들며 ‘그때 우리가 주도적으로 문을 열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떻게 됐겠느냐. 과연 무엇이 올바른 결정이겠냐’는 말을 자주 했다”며 “FTA는 노 대통령의 개방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라고 말했다. 역사의 흐름을 읽지 못한 채 ‘쇄국정책’을 고수한 구한말 정치 지도자들의 오판이 20세기 한반도를 열강의 각축장으로 만들고, 우리 민족에게 일제 강점과 남북 분단의 멍에를 안겼다는 나름의 역사관에서 비롯된 ‘개방철학’이 FTA 추진의 기본 토양이라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이런 개방철학은 1년여 논쟁 끝에 2004년 2월 한-칠레 FTA가 국회에서 비준되고, 그해 11월 한-싱가포르 FTA가 협상 개시 1년 만에 타결되면서 더욱 강화됐다. 청와대의 다른 핵심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싱가포르와의 FTA 협상 체결 직후 ‘한국의 경쟁력 강화와 제2의 도약을 위해 선진형 통상국가로 나가야 한다’며 통상교섭본부와 재정경제부 등에 구체적인 전략과 FTA 체결 대상국들을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통상교섭본부와 재경부 관료들은 그동안 내부적으로 검토해온 세계 주요 국가들과 동시에 FTA를 추진하는 이른바 ‘동시다발 FTA 전략’을 노 대통령에게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세계무역의 50%가 FTA 등 지역협정 체결 국가 사이에 이뤄지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무역의존도가 70%를 넘는 대한민국은 능동적 개방을 통한 적극적인 해외 진출 없이는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논리로 노 대통령을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동시다발 FTA 추진론’은 참여정부의 대외정책 기조로 자리잡았다.

2005년 김현종 본부장이 계획 보고

그러나 한-미 FTA가 본격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한 것은 2005년 초반이다. 당시 캐나다와 FTA 협상을 추진하던 통상교섭본부 안에서 더 큰 시장인 미국과의 FTA 협상론이 제기됐고, 노 대통령은 이에 대한 검토를 지시한 것이다.

한-미 FTA의 실익을 본격적으로 검토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노 대통령이 남미 순방길에 오른 2005년 9월 멕시코시티에서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며 한-미 FTA 추진 계획을 보고했다. 청와대 관계자들에 따르면 당시 노 대통령의 반응은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 귀국해서 본격적으로 논의하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한-미 FTA 협상 타결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김현종 본부장이 한-미 FTA 추진의 주체이자 근본 뿌리인 셈이다.

노 대통령은 동북아 주변국, 특히 일본의 움직임에 불안을 느끼며 “어차피 해야 한다면 우리가 빨리 주도적으로 추진하자”며 적극적인 추진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당시 논의에 참여한 여권의 한 관계자는 “2005년 9월 당시 일본이 미국, 멕시코 등과 FTA 협정에 적극성을 띠면서 청와대와 정부 안에서 한국이 그 대열에서 밀려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했다”며 “노 대통령의 결심은 그런 배경도 한몫했다”고 말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적극 개방에 나설 때 ‘쇄국’으로 일관해 일본에 패권을 내준 과거 정치 지도자들의 과오를 반복하지 말자는 정서가 나름대로 작동했을 수 있는 것이다.

실제, 노 대통령은 한-미 FTA가 고학력 실업이 확산되고 저출산·고령화로 성장 잠재력이 약화되는 우리 현실에 돌파구를 마련해줄 것이라는 강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청와대 정책실의 핵심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미국과 FTA가 체결되면 법률, 금융, 회계, 교육 등 선진적인 서비스 산업이 개방되고, 고학력의 일자리가 창출될 뿐 아니라 우리 서비스 산업의 국제경쟁력이 향상돼 장기적으로 중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결국 2006년 1월18일 신년 연설에서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해 미국과도 FTA를 맺어야 한다. 조율되는 대로 협상을 시작하겠다”며 추진 의사를 처음 공론화했다. 그리고 불과 한 달 뒤인 2월 미국과의 협상 개시를 공식 선언했고, 이후 여덟 차례의 협상과 수차례 고위급 회담을 거쳐 4월2일 협상은 일단 타결됐다.

미래 성장의 동력은 정말 확보됐을까

저항은 강했다. 참여정부의 전반부 경제정책을 책임졌던 이정우 청와대 전 정책실장, 정태인 국민경제비서관 등이 ‘졸속 협상’을 폭로하며 반대 진영에 합류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개방하지 않은 나라 중에 흥한 나라는 없다” “배외주의가 민족주의의 가치가 될 수 있냐”고 목청을 높이며 최전방에서 협상 타결을 독려했다.

그러나 ‘미래 성장 동력 확보’라는 노 대통령의 구상이 얼마나 관철됐는지, 또 우리에게 과연 장밋빛 미래가 찾아올 것인지 예단할 수 없다. 협정문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이 4월2일 ‘협상 타결에 즈음한 대국민 담화’에서 “당당한 자세로 원칙을 지켜냈다”고 자신하며 최고의 성과로 내세운 개성공단 상품의 FTA 포함 여부가 벌써 한-미 간 갈등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더욱이 노 대통령이 한-미 FTA 추진의 핵심 근거로 제시한 ‘서비스 산업 경쟁력 강화론’은 스스로 “아쉬운 대목”이라고 한계를 토로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법률·회계 시장은 일부 개방에 그쳤고, 교육과 의료 시장은 전혀 개방되지 않았다. 청와대 정책실의 핵심 관계자는 “미국은 이미 자국의 의사들이 한국에서보다 5배 이상의 수익을 올리고, 한국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많은 교육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며 교육·의료 시장 개방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계를 실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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