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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여권 ‘분쇄기’가 등장했나

등록 2007-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한-미 FTA가 대선 승리를 위한 범여권 통합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17대 국회가 들어선 지난 3년 동안 언제나 그랬다. 텔레비전 방송 토론회에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맞은편에 앉았다. 이라크 파병 등 간간이 몇몇 정책과 법안에 같은 의견을 보인 적도 있지만, 그렇다고 방송 토론회장에서 자리를 나란히 한 적은 없다. 이는 하나의 ‘정치 공식’이었다. 공식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깨졌다.

송영길 의원과 최재천 의원의 ‘낯선 대결’

지난 4월2일 12시58분 몇몇 언론에서 ‘제2의 개국’ ‘제3의 개국’으로 표현한 한-미 FTA가 타결됐다. 밤 10시부터 한국방송 1TV에서는 ‘한-미 FTA 협상 타결, 우리의 과제’라는 보도특집이 방송됐다. 방송사마다 한-미 FTA 토론 프로그램을 경쟁적으로 편성한 터라, 이 프로그램이 특별히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하지만 출연진의 배치는 눈에 띄었다. 한-미 FTA 타결에 반대하는 쪽의 패널로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과 무소속의 최재천 의원(전 열린우리당)이 나왔다. 찬성하는 쪽에서는 윤건영 한나라당 의원과 송영길 열린우리당 의원이 정치권의 대표로 나왔다. 윤 의원과 송 의원은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둘 다 한-미 FTA 타결을 지지했고, 협상 결과를 옹호하느라 진땀을 뺐다.

송 의원과 최 의원의 대결은 더욱 낯설었다. ‘개성공단 원산지 인정’ 문제를 둘러싼 협상 결과를 놓고, 큰 성과로 해석하는 송 의원과 문제점을 지적하는 최 의원의 거리감은 컸다. 두 사람은 두 달 전까지만 해도 한솥밥을 먹던 사이였다.

한-미 FTA는 같은 무리를 지었던 정치세력을 분쇄기처럼 찢어놨다. 반대로 색깔과 모양이 다른 정치세력을 믹서기처럼 갈아서 하나로 만드는 동력으로도 작용했다. 하나의 정책적 이슈인 한-미 FTA가 두 가지 상반된 작용력을 보였다. 그래서 더욱 혼란스럽다. 분명한 건 한-미 FTA가 커다란 정치적 변수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당장 눈에 띄는 현상들은 한-미 FTA가 이른바 ‘범여권’의 분열적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최근 두 달 새 의원들의 잇단 탈당으로 제2당으로 몸집이 줄어든 열린우리당은 FTA 앞에 사분오열했다. 지난 2월14일까지 당의장을 지낸 김근태 의원은 FTA 추진에 맞서 단식 투쟁을 벌였다. 어느 정당에서나 반대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의 지도부가, 특히 여당의 수장을 지낸 인물이 정부 정책을 강한 투쟁 방식을 빌려 반대한 전례는 드물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반FTA 투쟁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이른바 ‘김근태계’를 비롯해 열린우리당 의원 22명이 FTA를 반대하는 ‘비상시국회의’에 참여했다.

반면 정세균 의장과 한명숙 전 총리, 이해찬 전 총리, 김혁규 전 경남지사 등 노무현 대통령과 가까운 당의 현 지도부와, 당에 남아 있는 차기 대선 예비주자들의 다수는 FTA 찬성 쪽이다. 탈당은 안 했지만 당 밖에서 독자적으로 대선을 준비 중인 정동영 전 의장이나 대선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도 찬성 쪽에 서 있다.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의원들 가운데 천정배 의원을 중심으로 한 민생정치모임은 FTA를 반대한다. 천 의원은 12일째(4월6일 현재) 단식을 이어갔다. 최재천 의원도 이 가운데 한 명이다. 물론 찬성도 많다. 통합신당모임엔 FTA 찬성이 다수다. 여의도를 벗어나 범여권의 잠재적 대선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이들 가운데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나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등은 FTA에 부정적이다.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범여권 대선 후보 1위로 나오고 있는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FTA 찬성론자다.

현실 정치권에선 중대한 요인 아니라는 의견도

복잡하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단순하다. 120명이 넘는 한나라당 의원들이나 보수 진영은 거의 예외 없이 한-미 FTA를 찬성한다. 굳이 선거를 코앞에 둔 정치적 상황이 아니라 하더라도 분열보다 통합이 낫다.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 FTA는 범여권보다 한나라당에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범여권은 다시 통합해야 살 수 있는 운명이다. 대선에서 한나라당에 맞서 이기려면 통합만이 살길이라는 공식이 나온 지 오래다. 하지만 FTA가 범여권 통합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범여권은 진보와 중도가 ‘짬뽕’처럼 섞여 있다. FTA는 진보와 중도의 간극을 넓히는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다. 고원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의 전망은 비관적이다. “그동안 지리멸렬했던 중도개혁 세력이 한쪽은 FTA 찬성으로, 다른 한쪽은 반대로 분화하면서 ‘조립품’은 완전히 해체됐다. 범여권 내 노선 차이가 확연해지면서 심리적 갈등도 커질 것이다.” 김헌태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소장도 같은 생각이다. “범여권의 대통합이 한-미 FTA로 깨졌다. 정책과 노선이 맞지 않으면 같이 가기 힘들다.” 정치컨설턴트인 김윤재 변호사는 “범여권이 하나로 되는 장애로 작용하면 어쨌든 대선에 불리한 것”이라며 “FTA가 본선보다 범여권의 후보를 정하는 데 더 영향을 줄 수 있다. 최악의 경우 단일화가 안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정치 전문가들의 분석은 정책과 노선이 아닌, ‘반한나라당’이란 기치 아래 대선용 ‘묻지마 통합’은 필패라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

한-미 FTA는 범여권의 분열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단체로부터의 지지와 지원도 어렵게 하고 있다. 진보 진영의 거의 모든 단체들은 한-미 FTA에 반대한다. 반대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대선에서 후보 지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삼을 태세다. 상지대 교수인 정대화 미래구상 공동실무위원장은 “(한-미 FTA가) 정치적 재편의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 정치권의 얘기는 좀 다르다. FTA를 반대하는 이목희 열린우리당 의원조차 “꼭 FTA를 찬성하면 보수, 반대하면 진보라고 볼 순 없다”며 “범여권의 통합에 어느 정도 장애 요인이 되겠지만 중대한 건 아니다”라고 전망했다. 몇 가지 점에서 그의 말은 설득력 있다. 무엇보다 노 대통령의 정치적 성과나 과오로 남을 FTA를 새롭게 만들 당과 후보를 결정하는 데 전적으로 연결시킨다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 있다. 또 시민사회단체가 FTA 반대를 내세우며 정계 개편에 미칠 영향력의 한계도 분명 존재한다. FTA를 제외한 다른 많은 변수들이 존재한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통합신당모임의 전병헌 전략기획위원장은 “FTA가 범여권 통합의 지연 요소가 될 순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중도개혁 진영의 대통합이란 대의를 압도할 순 없다”고 말했다. 생존의 절박함은 노선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게 정치인들의 논리이자 전망이다.

범여권 통합의 변수로서 FTA에 대한 정치권 안과 밖의 시각차는 크다. 사실 정치권 밖에서는 통합의 주체인 정치인들이 아니라 그 지지층의 이념적 분화와 분열 가능성을 더욱 주목한다. 김헌태 소장은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그동안 한국 사회의 좌와 우는 주로 북한에 대한 태도로 갈렸다”며 “한-미 FTA가 최초로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상징적 구분선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과거 민주 대 반민주, 개혁 대 보수란 구분선이 있었다면, 당장 범여권 지지층에서 FTA가 중도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획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엔 정치적 기회

한 발짝 나아가 고원 선임연구원은 “중도개혁 세력이 정치적 다수를 형성하고 집권하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며 “리버럴 레프트(자유주의적 좌파)와 리버럴 중도로 갈라서선 비전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FTA를 둘러싼 범여권의 분열이 압도적 보수 우위의 정치 구도가 등장하는 전조라고 내다봤다. 다소 무리가 따르는 전망이라 치더라도, FTA가 범여권의 처지에선 통합과 대선 정국에 불리한 소재임이 틀림없다.

한편, 민주노동당은 한-미 FTA를 저지시킬 수 있는가와 별도로 진보 정당으로서 정치적 ‘기회’를 잡았다. 범여권에서 반FTA의 구심적 역할을 하는 정치인과 정치세력이 없는 한 진보 진영의 구심점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김근태·천정배가 단식까지 했지만, 아직까지 FTA 반대의 정치적 구심점으로 이들을 바라보는 정치인이나 전문가들은 없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민주노동당이 정치적 이득을 챙겼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범여권 지지층에 가 있는 진보층들이 FTA를 계기로 떨어져나와, 민주노동당 쪽으로 흘러들어올 가능성이 높다. 김성희 민주노동당 부대변인은 “좋은 길목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뭔가 만들어질 것처럼 기대해선 안 된다. 단순히 반대를 넘어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세력 또한 대안을 제시하는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불리할 게 없는 국면으로 보고 있다. 일부에서 노무현-한나라당-보수언론 등 3자의 ‘FTA 대연정’이란 말까지 나온다. 그렇지만 한나라당은 경계심마저 늦추진 않고 있다. 박형준 한나라당 의원은 “노무현이 보수 진영의 이슈를 선점했다. 앞으로 남북 관계 이슈 등을 같이 끌고 가면서 자신을 중심으로 범여권이 똘똘 뭉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청와대는 4월17일 개헌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더 많은 이슈들이 앞으로 남은 8개월 동안 터져나올 것이다. 당장 FTA가 범여권의 분열을 가속화하고 통합을 늦출 것임이 틀림없지만, 다른 변수들의 작용에 따라 그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정치에서 항상 예측 가능한 결론을 산출하는 공식은 처음부터 없다.



언제 비준 동의안 처리될까

월 정기국회 이후라는 전망 우세, 여론과 대선이 변수로 작용

4월2일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됐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 건 아니다. 행정부, 그것도 실무 협상단 차원의 ‘가서명’을 한 것뿐이다. 대통령 손을 거치는 ‘정식 서명’(비준)만 해도 3개월 뒤인 6월 말로 예정돼 있다. 그 뒤 사실상 2라운드라고 할 수 있는 국회로 넘겨져 가결 처리돼야 정식 발효된다.
비준 동의안이 언제쯤 처리될지를 점치기는 쉽지 않다. 국회는 행정부의 통상 협정문 비준 동의안의 처리 기한을 규정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6월 말 대통령의 서명(비준) 뒤 곧바로 다음주인 7월2일(월)에 비준 동의안이 제출되면 언제라도 다수결(과반 출석, 과반 찬성)로 처리된다. 그렇지만 정부의 비준 동의안 제출과 국회 심의가 시작되는 시점은 하한기인 여름을 지나고 대략 9월 정기국회 이후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핵심적인 관심사는 비준 동의안이 올 대선 전에 또는 참여정부 임기(2008년 2월) 안에 처리될 수 있을 지, 아니면 다음 정권과 18대 국회로 넘겨질 것인지 여부다. 워낙 변수가 많은 탓에 누구도 그 시기와 결과를 쉽게 장담할 수 없다.
가장 결정적인 변수는 국민여론이다. 다수가 반대한다면 국회 비준은 어려울 것이다. 여론이 팽팽한 경우에도 비준을 강행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다수가 찬성한다면 처리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협상 타결 초기인 현재는 비교적 찬성 여론이 우세한 편이다.
여론 말고도 대선이란 큰 변수가 기다린다.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민감한 시기인데다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아 어느 당도 선뜻 주도적으로 나서기 힘들기 때문이다.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9월 정기국회나 돼서야 비준 동의안의 국회 상정이 가능한데, 대선과 내년 총선이 코앞이라 비준 동의안을 다룰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임종석 의원도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대선 주자의 입장이 가장 중요한데, 기본적으로 농촌 정서가 부정적인 상황에서 대선 주자들은 비준 여부를 대선 이후로 가져가고 싶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선을 치러야 할 정치권 입장에서 농어촌·노동단체 등 당장 FTA를 반대하는 ‘표’는 눈에 보이는 표다.
하지만 국내 여론과 정치권을 흔들 중요한 ‘외적 변수’가 존재한다. 바로 미국이다. 미국에서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을 처리하면, FTA를 둘러싼 국내의 정치적 상황은 요동칠 수 있다. 보수층을 구심으로 한-미 동맹 강화 등의 명분을 업고 비준 동의안을 처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화될 것이다. 이 경우 임기 안에 성과를 거두려는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내 친노 세력, FTA를 찬성하는 개방론자들이 한나라당과 연합해 무리해서라도 통과시킬 가능성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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