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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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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고 싶은 자, 너를 다 까발려라

등록 2007-04-05 00:00 수정 2020-05-03 04:24

전세살이 기자의 강남 주상복합 아파트 체험기…주차장부터 신분증 요구받고 출입구에서 검문검색 받는 ‘이물질’ 신세

▣ 안인용 기자nico@hani.co.kr

나도 ‘팰리스’에 산다. 물론 내가 사는 팰리스는 그 유명한 ‘타워팰리스’가 아닌, 타워팰리스 열풍에 힘입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수많은 주상복합 팰리스 중 하나다. 주상복합 아파트라고 해봐야 1층에 편의점과 분식점, 식당 몇 개가 전부고 서울 시내도 아니며 내 집도 아닌 전세지만 나름대로 ‘팰리스’라는 단어가 들어간 주상복합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더랬다. 그날, 그곳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입주자 출입카드로만 열 수 있는 문들

한 달 전쯤, 친척 집에서 가족 모임이 있었다. 멀리서 온 친척과 몇 년 만에 만나는 자리였다. 친척 모임 장소는 서울 강남 지역 주상복합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촌언니의 집이었다. 회사 일이 늦게 끝나 부랴부랴 강남으로 건너가면서 오랜만에 친척을 만난다는 반가움과 잘 지어놨다는 주상복합 아파트를 구경한다는 기분에 제법 들떠 있었다. 차가 밀려서 1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는 거대한 성처럼 환하게 빛났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려고 주차장 입구에 들어섰다. 주차장 입구 주차관리실에는 말쑥하게 정복을 차려입고 가슴에 업체의 문패를 걸어놓은 직원이 앉아 있었다. 창문을 내리고 몇 동 몇 호로 간다는 얘기를 전한 뒤 주차 차단기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주차관리 직원이 대뜸 “주민등록증을 제시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은행에 대출 신청을 하러 온 것도, 휴전선 넘어 금강산에 가는 것도 아니고 기껏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가는데 주민등록증을 달라니?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한 번 물어봤다. “주민등록증이라니요?” “신분 확인을 위해 주민등록증을 제시해주셔야 합니다. 주민등록증은 나가실 때 돌려드립니다.” “왜 주민등록증을 내야 하는 건데요?” “아파트 관리 방침입니다.” 순간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거대한 아파트가 주는 위압감에 눌려, 또 가족 모임에 1시간이나 늦어 실랑이할 시간이 없었기에 우선 주민등록증을 건넸다.

주민등록증을 받아든 직원은 안내판을 꺼내 사인펜으로 내가 가는 동 호수와 차 번호를 커다랗게 쓴 뒤 차 앞유리에 끼웠다. 내 자동차는 졸지에 가슴팍에 이름표를 달게 됐다. 이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내 자동차의 존재 이유는 확실해진 셈이다. 나도, 내 자동차도 이 아파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분을 분명히 해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그들에게는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이 아파트에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범죄자로 돌변해 아파트 문짝 하나라도 떼어가거나 엘리베이터에서 느닷없이 이단옆차기라도 해 아파트 입주민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큰일 아닌가. 나는 이 아파트 입주민의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관리 방침 아래 내 주민등록번호와 주소까지 모두 알려줘야 했다.

자동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입구를 찾기 시작하면서 미로처럼 복잡한 주상복합 아파트의 길찾기 놀이가 시작됐다. 어느 입구로 들어가야 아파트 출입구가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로 통하는 문이 있기에 열어보았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옆에는 입주민 출입카드가 있어야 출입이 가능하다고 적혀 있었다. 다른 문을 찾으러 상가로 연결된 통로를 따라 쭉 걸어갔지만 또 입주민 전용 출입구가 나왔다. 모든 출입구는 입주자와 방문자를 철저히 구분했다. 이 아파트에서는 입주자 출입카드가 곧 신분증이었다. 겨우 입주민이 아닌 사람도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찾아 타고 1층으로 올라갔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놀라웠다. 아파트 로비는 마치 호텔 로비처럼 천장이 높았고 드넓은 로비에는 간편한 복장을 한 아파트 주민들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매번 이름과 연락처 남겨야

아파트 출입구마다 있는 관리소에는 관리직원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긴 직원은 몇 호에 왔냐고 물었다. 아파트 호수를 말하고 들어가려는데 잠시 기다려달라고 하더니 인터폰으로 사촌언니가 나의 방문을 알고 있는지 확인했다.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는 센스도 빼놓지 않았다. 나의 신상은 여기서 다시 한 번 기록됐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층수를 누르고 나니 피곤한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아파트 입주자의 완전한 안전과 완벽한 편의가 우선인 이 아파트에서 방문자의 기분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사촌언니의 집에는 친척들이 많이 와 있었다. 친척들 모두 나와 같은 절차를 밟고 이 아파트에 들어왔다. 제법 넓은 평수의 아파트 내부는 깔끔했다. 넓은 거실과 한강이 펼쳐지는 창밖 야경은 볼 만했다. 사촌언니는 “집에 놀러오는 사람들마다 주차장에서 주민등록증을 달라는 신분 확인 절차에 대해 불만스러워한다”며 “자주 놀러와서 관리직원이 얼굴을 아는 사람도 매번 이름과 연락처를 남겨야 들여보내준다”고 했다. 아파트에는 생소한 것들이 많았다. 청소는 중앙집중식 청소기를 써서 모든 먼지를 중앙에서 처리하는 방식이라고 했고, 전기 콘센트 하나도 아이들이 함부로 손대지 못하도록 돼 있었다. 사촌언니 부부와 조카 1명, 모두 3명이 사는 이 아파트의 관리비는 여름과 겨울에는 70만~80만원, 봄·가을에는 50만~60만원이라고 했다. 평당 관리비가 1만~1만5천원인 셈이다.

아파트 안에는 수영장과 골프연습장, 사우나, 헬스클럽, 독서실, 놀이방, 취미실 등 각종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언제든 아파트 주민생활관리센터에 얘기하면 사용할 수 있는 주민용 고급 연회장도 있다. “반상회 같은 주민 모임에는 딱 한 번 나갔어. 반상회 같은 데 나가지 않아도 애들을 수영장에 보내고 하면 자연스럽게 주민들끼리 만나는 자리가 마련되지. 수영장이나 독서실에는 이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만 오잖아. 그렇게 어울리면서 애들 학원도 같이 보내고 그래.” 아파트 지하에 있는 아케이드에는 고급 중국 식당과 각종 식당, 슈퍼마켓, 세탁소, 네일숍 등이 들어와 있다. 슈퍼마켓은 유기농 제품을 주로 취급하고 웬만한 반찬도 일반 슈퍼마켓보다 1.5배 정도 비싼 편이다. 돈만 있으면 아파트 단지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원스톱’ 구조였다.

누구냐고 묻지 않는 나의 아파트

친척 모임이 끝나고 아파트에서 나갈 때도 번번이 입주민 전용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주차장에서 간신히 자동차를 찾아 집에 간다기보다 주민등록증을 받으러 가는 기분으로 주차장 출입구로 향했다. 들어올 때 받은 자동차 안내판을 돌려주고 주민등록증을 받았다. 아파트 입주민들만의 세상에 이물질처럼 끼어들어 언제 어떻게 범죄자로 돌변할지 모르는 방문자인 나는 주민등록증을 돌려받자 비로소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재빨리 액셀을 밟아 내 얼굴과 주민등록번호, 주소, 연락처 등 나의 신상정보를 모두 알고 있는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빠져나왔다. 내 어깨는 잔뜩 주눅이 들었고 ‘초라하다’ ‘자존심 상한다’ ‘기분 나쁘다’ 등등의 불쾌한 단어만 떠올랐다. 나의 ‘팰리스’로 돌아오는 길, ‘팰리스’라는 단어에 대한 자부심은 사라졌다. 대신 나의 ‘팰리스’는 이 아파트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당신은 누군데 여기에 왔느냐”며 불심검문하는 그런 아파트는 아니라는 데 대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준다’면 나는 그런 아파트에 살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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