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총장이 대통령 되지 말란 법 있나”

등록 2007-03-30 00:00 수정 2020-05-03 04:24

어렵게 입을 뗀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나는 절대 엘리트주의자가 아니다”

▣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取之, 何如?” 양회왕 하편에 나오는 ‘취지, 하여’란 얘기다. 제나라가 자중지란에 빠진 이웃 연나라를 토벌했다. 제나라의 선왕은 연나라를 갖고 싶었다. 그러나 연나라를 취할 명분이 없었다. 선왕은 맹자를 찾아가 “어떤 이는 저보고 (연나라를) 취하라 하고 어떤 이는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연나라를 취하지 않으면 재앙이 있을 것 같은데, 이걸(연나라) 취하면 어떠하겠습니까?(取之, 何如?)”라고 물었다. 맹자는 “취해서 연나라 백성이 기뻐하면 취하고, 기뻐하지 않으면 취하지 마라”라고 답했다.

가난한 집안 출신, 총장 시절 낮은 곳 배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요즘 심정이 딱 맹자에게 물음을 던진 제나라의 선왕일 것같다. 정운찬이란 이름은 2005년부터 범여권의 대선 후보로 오르내렸다. 하지만 그는 올 대통령 선거에 나설지 말지 아직 맘을 정하지 않았다. 그는 “결심이 서면 내 길을 간다. 그 길의 끝이 뭐가 될지 나 자신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미 결심은 섰는데 정치적 일정 등을 고려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은 3월21일 서울대 사회과학대 636호에 있는 그의 연구실을 찾았다. 전날 공식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그는 정중히 사양했다. 그렇지만 “찾아오는 분은 내쫓지 않고 항상 만나주는 분”이라는 그의 지인들의 말을 믿었다. 연구실은 열려 있었다. 그는 흔쾌히 기자를 맞았다. 차를 마시며 20여 분 동안 대화를 나눴다. 그는 대신 “나와 나눈 얘기들을 인터뷰란 타이틀을 걸고 보도해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 다음날 그와 전화 통화로 짧은 대화도 주고받을 수 있었다.

크지 않은 연구실에서 먼저 눈길을 붙잡은 것은 책상 위에 놓인 한 권의 책이었다. 였다. 그는 “읽어봤느냐?”는 물음에 “아는 이가 갖다준 책이다. 완독하지는 않았지만 대충은 읽어봤다”고 말했다. 대선에 대한 그의 관심이 묻어났다.

인터뷰를 피할 만큼 말을 아끼던 정 전 총장은 두 가지 얘기는 꼭 하고 싶다며 입을 뗐다. ‘대학 총장이 대통령을 할 능력이 있느냐’는 세간의 의문과, 자신의 엘리트 이미지에 관해서 였다. 곱씹어보면 이런 그의 태도와 말은 대선 도전에 대한 그의 의지가 크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총장을 지낸 사람이 대통령을 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에 대해 “피터 드러커가 ‘대학 경영을 한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학 총장이 대통령이 된 경우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도 있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헌법 67조의 ‘국회의원 피선거권이 있고 만 40살’이면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교과서적 규정 이상의 의미로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엘리트주의자로 비쳐지는 것을 몹시 불편해했다. 정 전 총장은 자신이 엘리트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전해달라고 적극적으로 주문하기도 했다. “내가 경기고에 서울대, 미국 프린스턴대를 나왔기 때문에 엘리트주의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입주 과외를 했다. 나한테 엘리트주의란 게 안 맞다. 속마음은 아니다. 총장 시절 지역균형 선발을 했다. 또 계층균형 선발을 하려고 했다. 내가 총장을 하면서 서울대에 시각장애인이 처음으로 입학했다. 장애인들을 위한 엘리베이터도 하나에 1억여원씩 들여 몇몇 건물에 설치했다. 지역균형 발전은 중요하다.” 자신이 서울과 지방의 격차, 계급 격차, 장애인 문제 등 ‘낮은 곳’을 배려해왔다는 뜻이다.

엘리트주의와 관련해 오해를 다 털어버리고 싶었던지 그는 말을 이었다. “내가 무의식 중에 그렇게 들릴 만한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경기고를 나왔다거나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왔다고 얘기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다른 고등학교를 다녔고 다른 대학의 경제학과를 나왔어도 마찬가지로 거기를 자랑스럽게 얘기했을 거다.”

그는 3월19일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고등학교와 대학 1년 후배다. 그가 대선에 도전한다면 두 사람은 범여권의 울타리 안에서 경쟁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는 최근 손 전 지사가 ‘대한민국 드림팀’으로 자신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같이 정치를 해볼 만한 인물로 꼽은 것과 관련해 “당황했다”고 말했다. “손 전 지사가 말한 걸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다. 직접 나한테 ‘오퍼’(제안)한 적 없었다. 미리 말하지도 않으셨다. 손 전 지사와는 개인적 친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아달라는 주문이었다. 정 전 총장은 두 사람의 관계가 좋은 편이라고 했다. 그는 “최근에 접촉한 적은 없지만,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분이다. 그분도 나를 싫어하지 않는 걸로 안다. 서로 친구가 겹치기도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꼭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적인 관계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사이처럼 보였다.

한나라당 대선 예비후보로서 확고부동한 1위 자리를 굳힌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 대해서도 말이 나왔다. 그는 “최근 이 마치 내가 ‘지금 출발해도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겐 밀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한 것은 과장”이라며 “40%대 지지를 받는 사람한테 1% 지지도 못 받는 사람이 그렇게 얘기한다는 게 말이 되겠냐? 그렇게 말하면, 이 전 시장이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겠냐? 충남대 초청 강연에서도 그렇게 얘기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전날 충남대 강연에서 “지금 시작해도 이명박 전 시장의 경제정책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이지, 대통령이 된다면 경제를 싹 바꿔놓겠다는 식의 발언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어쨌든 경제정책을 놓고서 이 전 시장과 비교한다면,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만은 분명했다.

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껏 (나와 관련된 보도의) ‘미스 리딩 타이틀’(잘못 잡은 제목)을 많이 봐왔다”며 “나와 관련된 것은 다 오보다”라고까지 말했다.

경제정책, 이명박에 뒤지지 않는다

그는 최근 손 전 지사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같은 범여권의 예비후보가 되면서 인접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부지런히 서울과 지방 강연을 하고 돌아다닌다. 일부에선 이를 두고 ‘강연 정치’를 하고 있다고도 말한다. 그는 개별 언론과의 인터뷰는 극도로 기피하지만, 강연을 통해 참여정부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나 부동산 정책, 양극화, 교육 정책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망설임 없이 드러냈다. 강연 뒤 기자간담회나 즉석 일문일답을 통해서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발언들도 내놓고 있다. 그의 20년 지기인 김종인 민주당 의원의 입을 통해서도 그와 관련된 얘기들이 전해진다.

정 전 총장은 3월23일 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번) 학기를 끝내겠다고 한 말은 (정치 참여와 관련한) 제 결단 시기와 연결시킬 문제는 아니다”며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결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언제까지 망설일까? 에 나오는 제나라 선왕은 결국 연나라를 취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