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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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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의 승리, 통곡의 세월

등록 2001-03-13 00:00 수정 2020-05-02 04:21

뿌리 깊은 자주주의와 사대주의 대결의 역사… 당·원·명에 빌붙은 치욕이 미·일로 이어져

서로의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국제관계에서 자국의 이익을 매번 지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때로는 상대국과의 역학관계보다 국내 정치의 역학관계가 그 향배를 좌우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외교문제는 항상 중요한 것이었는데, 바로 그 반도라는 위치와 약한 국력 때문에 사대주의라는 독특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다. 우리 역사 속에서 외교에 관한 몇 가지 사례를 봄으로써 현재 복잡하게 전개되는 NMD 논쟁에서 생각의 재료로 삼아보자.

김춘추의 선택과 서희의 적극 외교

신라의 삼국 통일은 아무리 그 의의를 강조해도 가슴 한 구석에 안타까움이 남는다. 고구려나 백제가 통일했으면 이후 우리 역사의 무대가 그리 작아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많은 지사들은 이를 아쉬워했었다. 그러나 약소국 신라의 처지에서 볼 때는 수많은 강대국들 사이에서 외교와 무력을 적절히 활용해 승리한 역사이다.

고구려의 평양천도에 위협을 느낀 신라는 과거 견원지간이었던 백제와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었으나 신라 진흥왕이 백제 성왕과 함께 되찾은 한강유역을 독차지함으로써 신라는 궁지에 빠졌다. 김춘추(金春秋)가 외교의 전면에 나설 무렵 신라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서방 요충인 대야성(합천)이 백제에게 함락되고 사위 김품석과 딸은 전사하고 말았다. 이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그는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했으나 오히려 한강유역 영토반환요구와 함께 억류되고 말았다. 이처럼 위기가 거듭되자 구귀족의 대표인 상대등 비담이 반란을 일으켜 선덕여왕과 왕을 보좌하는 김춘추를 제거하려 했다. 이에 김춘추가 김유신과 손잡고 반란을 진압한 뒤 던진 승부수가 나당연합이었다. 나당연합은 우리 역사에 많은 숙제를 안겨주었으나 고립된 신라의 처지에서는 위기를 기회로 만든 외교정책의 개가였다.

고려 성종 12년(993)에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자 고려 조정은 큰 혼란에 빠졌다. 심지어 거란의 요구대로 서경(西京:평양)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이 조정의 대세를 이루었다. 이때 서희는 소손녕이 봉산군을 격파한 후 더이상 남하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의 속셈이 화의에 있음을 간파하고 적극 항전을 주장했다. 거란은 고려의 북진정책과 친송(親宋)정책에 불만을 느껴 침입한 터였는데, 서희는 소손녕과의 회담에서 고려가 거란과 교류를 못하는 것은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이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설득해 거란군을 철퇴시키는 한편 강동 6주까지 차지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런 사례들은 때론 외교가 군사보다 효과적으로 국가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수단임을 잘 보여준 것이다. 이는 정확한 국제관계의 판단 속에서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었던 좋은 선례들이다.

그러나 12세기 들어 문신귀족정치가 전성기에 도달하면서 고려는 금(金)나라에게 칭신(稱臣)하는 등 사대주의가 외교정책의 대강이 되었다. 그런데 고려의 대금(對金) 사대는 권신 이자겸(李資謙)의 정권 유지책이었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외교가 국익이 아니라 정권이나 특정집단의 이익에 복종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류에 반발해 칭제건원(稱帝建元)과 금국(金國)정벌을 주장하며 봉기했던 묘청(妙淸)의 난(1135년)이 진압되면서 사대주의는 더욱 심각해졌다. 단재(丹齋) 신채호가 이 묘청의 난을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으로 규정지은 것은 유명한 일이다. 신채호는 이때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한 것이 이후 우리 역사를 사대주의로 흐르게 한 근본 원인이었다며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조선의 이익보다 명(明)의 이익을 앞세우는 극단적 사대주의가 나타나기도 했다. 광해군이 냉철한 현실인식 아래 명(明)과 후금(後金:청)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펼치는 것을 상국(上國) 명에 대한 불충으로 판단한 서인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내쫓았다. 반정의 명분이 ‘상국을 배신했다’는 것이었다.

쿠데타로 이어진 ‘상국을 범한 죄’?

쿠데타를 주도한 서인들은 명나라가 임란 때 파병한 것을 ‘재조’(再造)라고 불렀는데, 이는 망할 뻔한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것으로써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임란 과정에서 의병장을 대거 배출하면서 정권을 잡은 북인에 대한 반감이 깔려있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이른바 반정의 진정한 이유였다.

그러나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임란 2년 전 조선통신사에게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했다. 명나라를 칠 터이니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일본의 명나라 정벌 의지는 공공연한 것이어서 명나라는 자신의 영토에서 싸울 것인지 조선 영토에서 싸울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고, 조선에서 싸우는 것이 유리하다는 전략적 판단에서 군사를 파견한 것이었다. 광해군은 이런 사정을 냉철히 뚫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이런 전략적 판단은 서인들에게는 상국에 대한 불충이었고, 그대로 쿠데타의 명분이 되었다.

숭명반청(崇明反淸)을 내걸고 집권한 서인들은 인조 14년(1636) 3월, 8도에 ‘향명대의’(向明大義:명나라를 향한 큰 의리)를 위해 후금과 국교를 단절한다는 선전 교서를 반포했고,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그 결과는 삼전도의 치욕이었다. 헛된 명분으로 백성들을 극심한 고통에 빠뜨린 서인들은 이를 반성하기는커녕 이미 망한 명나라에 대한 극단적 사대주의로 흘렀다. 어쩌면 극단적 사대주의로써 내놓아야 할 정권 유지를 합리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은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재위 1727∼1644)의 연호 숭정(崇禎)을 쓰는 것을 대단한 충절로 자부하며 조선 후기를 일관했다. 심지어 중국을 우리의 주인으로 여기는 노예적 사상으로까지 발전했는데, 이런 현상에 대해 정인보(鄭寅普)는 일제시대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에서 이렇게 썼다.

“선배 저서를 보면 ‘아대명’(我大明)이라 한 것이 있다. 허, 대명(大明)이 우리 대명이란 말인가. 을지문덕이 수병(隋兵)을 격섬(擊殲)하였다고 상국을 범한 죄를 말한 자가 있었으니, 허, 그대로 재배취사(再拜就死:거듭 절하고 죽음을 택함)하였다면 쾌하더란 말인가.”

이처럼 조선 후기 사대주의자들은 을지문덕이 당나라 군사를 섬멸한 것을 상국(上國) 명(明)을 범했다고 분개할 정도로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는 노예적 사대주의까지 갔던 것이다.

고종의 외교정책은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많다. 고종은 재위 기간 내내 줄타기 외교로 일관했다. 그는 친일과 친러, 친미와 친청을 넘나드는 화려한 외교를 펼쳤으나 그 결과는 망국이었다. 정책의 유연성이 외교의 장점이긴 하지만 국력, 특히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외교력은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과한 탓이었다.

친미와 친일의 뿌리는 바로 그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한국 독립운동사는 고종 때 형성된 수많은 외교관계들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친미파의 대표 이승만은 1919년 봄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한국의 위임통치를 요청했다. 1919년 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려 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단재(丹齋) 신채호가 심산(心山) 김창숙을 찾아와 펑펑 울었다. 김창숙이 그 이유를 묻자 신채호는 미국 친구가 보내온 서신을 내보였다. 이승만이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의 위임통치를 요청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 편지였다. 이때부터 신채호·김창숙·박은식 등은 이승만 반대의 선봉이 되었는데, 신채호는 임정 회의석상에서 이렇게까지 말했다.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은 따지고보면 이완용이나 송병준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나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끝내 임정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신채호는 이에 반발해 임정을 거부하고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에서 신채호·이회영·김창숙 등과 함께 반임정의 베이징그룹을 형성하게 된다.

이승만이 해방 뒤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민주의원 의장으로서 친미노선을 걷자, 김창숙은 “슬프다! 저 이승만이란 자는 미국에 아첨하여 정권을 장악하여 독재정치를 하려는 수법을 여기서 보겠구려”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김창숙의 말대로 정권을 장악한 반면 신채호는 아나키스트가 되었다가 1936년 일제의 여순 감옥에서 옥사하고 김창숙은 1962년 집 한칸도 없이 궁핍한 생활 속에 여관과 병원을 전전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해방 이후에도 사대주의는 승리의 행진을 계속한 것이다. 이로써 신채호에게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이승만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란 비판을 듣기도 했으나 현실은 신채호 같은 자주독립파가 아니라 사대주의자의 것이어서 이승만은 임정 대통령과 건국 대통령이 되었다.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그들의 원조들

현재의 NMD 논쟁에서 주목되는 것은 미국의 입장에서 논지를 전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흔히 하는 말로 외교에서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 불과 100여년 전만 해도 조선은 친청(親淸)으로 동학혁명 때 청의 군사를 끌어들였고, 친러(親露)로써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옥균은 친일로써 갑신정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지금 미국이 유일한 우방인 것 같지만 한때 청(淸)이나 러시아,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학관계는 언제 변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 역사이다. 국익적 관점과 자주적 입장에서 현명하게 NMD 파고를 돌파해 나갈 것을 기대한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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