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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에서 사라진 조선인들

등록 2007-03-09 00:00 수정 2020-05-03 04:24

미야코지마와 게라마제도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린 징용자와 위안부들…전쟁 말기 끔찍한 작업에 내몰리다 비밀 유지를 위해 학살 당하기도

▣ 오키나와현 미야코지마·게라마=글·사진 서재철 녹색연합 국장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한 태평양의 아열대 섬들은 이른바 ‘남서제도’로 일본의 대표적인 휴양지 가운데 하나다. 특히 산호 바다는 세계적인 규모와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하지만 60년 전 오키나와-태평양 전쟁은 이 천혜의 섬들을 죽음의 나락으로 몰아넣었고, 여태껏 그 상처의 일부가 남아 있다. 깊은 바다에 가라앉은 전쟁의 아픔 중에는 조선에서 강제로 끌려온 군속 노무자들과 위안부들이 있다. 그들은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전쟁의 맨앞에서 소모품처럼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전쟁 막바지에는 미군의 폭격과 일본군의 집단학살에 의해 죽어갔다. 오키나와현의 낙도 지역인 미야코지마와 게라마제도는 그런 역사를 품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한국 정부 조사에 협조하겠다”

미야코지마는 오키나와 남단의 바다 중에서도 독특한 문화와 풍광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과거엔 일본군의 치열한 작전 지역이었다. 미야코지마 동북쪽 해안에 위치한 후쿠야마는 1944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옥쇄작전’의 현장이다. 오키나와에서 약 300km 남쪽에 위치한 미야코지마 역시 이 작전의 주요 거점으로 섬 전체에 걸쳐 각종 군사시설이 조성됐다. 이 작업에 동원된 조선 청년의 수는 약 1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군속 노무자로 징용돼 각종 벙커와 진지 공사에 내몰렸다. 특히 지하터널 공사, 가미카제특공대 발진기지 공사, 중·대형 대포 구축용 기지 공사는 사실상 목숨을 내건 작업이었다고 지역 주민들은 증언한다.

후쿠시마 지하터널은 일본군 37연대의 최후 방어선이었다. 바다를 향해 지하에 터널을 파고 조성한 중화기포대로, 바다로 밀고 오는 미군을 상대로 최후 결전을 준비했던 미야코지마의 중추적인 방어시설이었다. 높은 산이 없는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해안가의 구릉성 산지나 야산에 터널을 뚫고 거기에 대형 포를 배치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는 최근 개봉한 에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150mm가 넘는 대형 포를 배치할 수 있을 정도로, 일본군 지하터널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로 꼽힌다고 한다.

터널의 일부 구간은 내벽을 콘크리트로 처리했는데 60년이 지난 지금 봐도 표면이 매끄러웠다. 공사에 동원된 조선인 군속 노무자들이 얼마나 힘겨운 작업에 내몰렸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당시 터널 작업은 곡괭이와 망치, 맨손으로 이뤄졌다. 기계를 쓰면 미군에 발각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야코지마는 아열대 기후로 한여름에는 기온이 40℃를 넘고, 4월부터 10월까지는 30℃를 넘나든다. 이런 곳에서 굴파기 공사는 죽음의 노역이었다. 이 지역 교원단체와 역사학자들이 공동 발간한 미야코지마 역사보고서를 보면 당시 강제노동의 현황이 기록돼 있는데, 전쟁 이후 이들의 생사 여부에 대해서는 “죽었을 것”이라는 추정만 있을 뿐이다. 주민들은 “공사 과정에서 비밀유지를 위해 집단학살을 당했거나 미군 공격에 내몰려 죽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우리 정부가 이에 대한 상세한 조사를 벌여야 하는 이유다.

미야코지마 시 당국은 한국 정부의 조사에 협조할 뜻을 필자에게 밝혔다. 시 당국자의 말이다. “한국 정부를 비롯한 관계기관이나 언론에서 미야코지마에서 죽어간 조선인 강제징용자와 위안부의 실태를 조사하려고 방문한다면 적극적으로 도울 것이다. 주민들도 피해자다. 진정한 아시아의 평화는 과거를 숨기고 속이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이야기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용서를 빌고 화해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일본과 한국의 우호관계를 위한 초석이 된다.”

위안소 주변에는 먹을 물도 없어

미야코지마에는 위안소 현장도 있다. 시청 소재지에서 차로 20분을 가면 나오는 우에노 마을이 그곳이다. 이곳에는 일본군 부대 옆에 위안소가 세워져 10여 명의 조선 처녀들이 일본군의 성노예로 생활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당시의 건물과 다녔던 길까지 상세히 증언했다. 이곳 출신으로 미야코지마의 시민운동가인 우에사토 기요미는 “위안소 주변에는 마실 물조차 없어서 1km나 떨어진 곳에 가서 물을 먹어야 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성노예로 내몰렸다”며 “동네 사람들은 위안부들을 ‘조센비’라고 불렀다고 할머니한테서 들었다”고 증언했다. 미야코지마에는 모두 11개의 위안소가 있었다.

게라마제도의 아카섬과 자마미섬은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의 언론에도 소개된 해양관광의 명소다. 4km 정도 떨어진 두 곳은 천혜의 관광지이지만 일제 말 징용의 현장이기도 하다. 전쟁 말기인 44년부터 이곳에는 일본 해군에 의해 비밀 군사기지가 조성됐다. 해군 가미카제의 발진기지를 만드는 일이었다. 해군 가미카제는 바다로 들어오는 미군 함정을 공격하기 위해 소형 보트나 어뢰를 이용해 자살공격을 하는 임무를 맡았다. 조선 청년들은 해안가의 터널 파기를 비롯해 항만 하역, 무기 및 군수물자 운반, 참호 파기 등 각종 군 노역에 동원됐다. 작업에 동원된 피해자들은 인근 지역 주민들도 전혀 모르게 일본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작업에 내몰렸다. 특히 전쟁 말기에 비밀유지를 위해 집단학살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는 게 지역 주민들의 증언이다.

한국인 생존자의 증언도 있다. 경북 영양에 거주하는 강인창(87)씨는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해안가 안쪽으로 동굴을 파고 그 안에 해상이나 수중 공격용 가미카제의 장비와 무기를 비축했다. 일본군은 우리에게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고 노예처럼 부렸다. 그러다가 미군의 폭격에 죽거나 일본군에 의해 죽어갔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전쟁 말기에는 오키나와와 자마미·게라마 등 4개 섬에 모두 3천여 명이 끌려와 징용 생활을 했다고 들었다.”

자마미섬 동쪽 해안에 위치한 후루자마미해수욕장은 오키나와현에서 가장 맑고 푸른 해수욕장 가운데 하나다. 지금은 이곳의 주민들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비극의 현장이 아직도 일부 남아 있다. 바닷가에서 내륙으로 300m쯤 떨어진 숲 속에는 지금도 과거의 기지 흔적인 터널이 남아 있다. 현재는 60년 가까이 숲이 우거져 기지의 입구를 제대로 확인하기도 어렵다. 아열대림 특유의 울창함으로 과거 흔적을 쉽게 찾을 수는 없었지만, 이곳에서 조선 청년들이 수없이 죽음으로 내몰렸던 것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 제주도의 남쪽 해안에도 이와 비슷한 일본 해군 비밀기지 시설이 남아 있다.

역사의 기록까지 포기할 수 있는가

조선에서 오키나와로 끌려온 청년들은 주로 군 소속의 노역에 동원됐다. 이들은 대부분 경상북도 전역에서 끌려왔다. 당시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한 이후 1천 명 정도의 생존자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살아 있는 생존자가 극소수다. 누구에 의해 끌려갔고 무엇을 하다가 죽어갔는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제와 관련한 매듭 중 친일 문제의 단죄는 못할망정 역사의 기록까지는 포기할 수 없다. 그 절실함을 오키나와의 낙도는 말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은폐와 외면, 한국 정부의 직무유기 속에서 조선 청년들의 원혼은 지금도 태평양을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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