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가 유연한 진보? 진정한 보수가 없으니 진보의 범위도 이상해…사회의 공기를 따뜻하게 하기 위한 사회 안전망 확보를 계속 토론하라
▣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①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소명 저버려
진보를 말하기 전에 우리나라의 보수 세력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보수는 진정한 보수가 아니다. 일제 부역 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분단 체제에 기생한 미국에 종속적인 세력들이 보수를 참칭해온 것이다. 그들에겐 민족도 없다. 결국 ‘보수’할 가치도 없이 기득권을 계속 유지·강화하려는 세력이 반세기 동안 보수를 참칭해왔다. 그런 역사를 전제해야 한다. 보수가 이렇다 보니 보수 참칭 세력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진보 세력의 범위가 넓어진 측면이 있다. 보수 참칭 세력과 차별성을 갖는 자유주의 보수 세력까지 ‘진보개혁 세력’으로 뭉뚱그려진 것이다. ‘유연한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표현이 나오는 배경이다. 현재 일어나는 진보 진영 내부의 혼란 역시 이와 맞닿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연정’을 제안하는가 하면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단어까지 썼다. 노 대통령이 ‘유연한 진보’라는 말을 썼지만 말뜻 그대로 진보도 유연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럴 때 가장 중요한 전제는,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외유내강’이다. 즉,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 권력의 일상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정치철학과 당에 의한 견제가 관철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없는 노 대통령이 말하는 ‘유연’은 자신에 대한 ‘유연’에 불과하다. 참여정부를 진보 정부로 부를 수 없다. 정치이념적인 측면에서 볼 때 참여정부는 자유주의 보수 정권이다. 다만, 참여정부의 시대적 소명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면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가는 디딤돌을 놓는 것이었다. 현재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국가나 정치권력이 맡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 참여정부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과제에 대해 내세울 게 없다.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 관계자들에게 조·중·동의 사설을 다시 한 번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해 가열차게 반대하는 그들인데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문제에 대해서는 반대한 사설을 보기 어렵다. 반대할 게 별로 없었다는 얘기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현안인 양극화 문제, 이를 강화하는 부동산 문제와 이를 대물림하는 교육 문제에서도 뚜렷한 성과가 없다.
② 참여정부에 배척당한 시민사회
한국 사회는 ‘존재와 의식의 괴리’라는 측면에서 다른 어떤 사회와도 비교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20 대 80 사회’의 모순, 즉 존재의 모순은 더 심화하고 있는데 의식을 보여주는 투표 행태는 그대로거나 더 부정적으로 흘러간다. 이 점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미에서 좌파 정권이 설 수 있었던 것은 신자유주의 아래 ‘20 대 80’이 강화되면서 80이 존재에 상응하는 의식을 가짐으로써 가능했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의 경우에는 전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존재와 의식 사이의 괴리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반세기 이상의 분단 상황에서 형성된 일방적인 의식화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진보 진영에도 이런 괴리가 그대로 반영된다. 존재로서의 진보 세력은 꽤 넓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의식으로서의 진보는 협애한 것이다. 진보 진영은 그동안 정권에 참여했다기보다는 바깥에서 참여정부가 되도록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갈 수 있도록 비판을 해왔다고 본다. 민주노동당이나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여태껏 부족하지만 나름의 대안을 제시했다고 보는데 그것이 참여정부와의 관계 속에서 배척됐다.
③ 서민 대중이 존재에 맞는 의식 가져야
진보 진영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존재로서의 진보, 즉 노동자·농민·서민대중이 사회경제적 정체성에 걸맞은 의식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참여정부가 특히 교육정책 등을 통해 사회경제적 정체성에 걸맞은 의식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줄 것을 기대했지만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수구·냉전 세력이 가로막았던 물꼬를 터주기 위해 의식 형성 과정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교육과정이나 언론의 문제를 민주적 통제라는 측면에서 다뤄야 했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을 끊임없이 내놓는 일 역시 중요하다. 세계에서 국민국가가 지니는 의미는 여전하다. 구조화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해 저항하고 긴장하면서 국민국가가 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다 보면 분명히 대안을 얻을 수 있다. 사실 참여정부 아래서도 조세정의, 재분배, 인간과 환경의 관계, 양성평등, 사회적 약자 문제, 노사관계의 균형 잡기 등 여러 대안이 제출됐지만, (참여정부는) 대안을 제대로 추진하지 않았다. 대안을 추진할 의지도 없었지만 정치적 힘도 없었다. 대안이 있음에도 추진할 정치적 힘이 없다는 점은 ‘존재와 의식 사이의 괴리’ ‘존재를 배반한 의식’의 문제를 수정하지 않고는 계속될 문제다.
④ 불안한 내일, 오늘을 저당잡히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현재 ‘불안’ 이데올로기라고 본다. 사회 구성원들이 불안한 내일 때문에 오늘을 저당 잡히고 있다. 참여정부 초기 노 대통령 자신이 “노사관계가 사측에 기울어 있다”고 얘기했다가 3개월 만에 뒤집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대기업 노동자들을 질책하고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물론 비정규직 문제 때문에 민주노총 등이 비난을 받고 있지만, 역지사지해서 정규직 노동자의 처지에서 보면 그들도 언제 구조조정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어떻게 양보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도 있다. 장래의 불안을 해소하는 문제는 사회 안전망 확보와 분배 문제의 해결로 가능하다. 이를 통해 사회의 공기를 다르게 해야 한다. 사회의 공기를 포근하고 따뜻하게 해야 한다. 2만달러 얘기를 할 때가 아니라 장래의 불안 때문에 오늘을 희생시키는 문제를 얘기해야 한다. 대선 과정에서도 사회 양극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주되게 토론해야 한다. ‘서민에게 복지를, 부자에게 세금을’ ‘무상교육 무상의료’ 요구도 당연히 해야 한다. ‘세금 폭탄’ 얘기가 나올 때 진보 진영은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했다. 투기소득이나 불로소득에 대해서는 세금 폭탄이 아니라 ‘세금 핵폭탄’도 필요하다는 논리로 맞서야 했다.
⑤ 논쟁에서 교육 문제도 주요하게 다뤄져야
진보개혁 세력을 재규정하기 위한 토론, 우리 사회의 구체적인 미래상을 위한 토론은 계속되어야 한다. 충분하고, 깊고, 더 오래 해야 한다. 물론 그 기준과 잣대는 ‘사회 공공성 확대’와 ‘신자유주의’에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지가 되어야 한다. 개별 분야나 정책에 대한 토론 역시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특히 교육 문제는 전체 사회 구성원을 옥죄는 문제로 주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어릴 때부터 비인간화를 조장함으로써 존재와 의식의 괴리를 구조화하는 본질적인 부분이다. 자칫 논쟁을 대선에 대한 대응 방안에만 국한해서 토론하면 문제다. 어떤 사회를 미리 그려놓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사회에서 민중이 어려움을 겪는 부분을 줄여나가는 끊임없는 과정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그런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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