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관료집단과 집권 세력은 항상 갈등관계…참여정부는 비서실과 ‘코드 인사’를 통해 통제하려 했으나 밀린다는 평가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지난 2000년 당시 여당인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맡았던 이해찬 전 총리는 당정협의에서 이헌재 재정경제부 장관 등 고위 경제관료들에게 “여러분은 이미 실패한 관료들”이라며 “여당·국민을 대하는 태도가 여전히 관료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이른바 ‘실패한 관료론’이었다. 이 장관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죄송하다”고 답변했지만 재경부 관료들은 상당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4년 뒤, 참여정부 들어 ‘검증된 구관(舊官)’를 자처하며 다시 돌아온 이헌재 재경부 장관은 “우리 경제는 학습기간을 가질 만큼 한가롭지 않고, 아마추어적 시행착오를 받아들일 만큼 여유롭지도 못하다”며 ‘프로 관료론’을 취임 일성으로 내뱉었다.
1963년 제6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관료의 길을 걸어온 이 장관의 일성은 경제관료의 파워를 우회적으로 대변한다. 물론 재경부 관료들은 속으로 환호를 보냈다. ‘정권은 짧고 관료는 영원하다.’
한국 정당이 관료와 상대가 되나
한국의 행정 기술관료 조직을 ‘거석’처럼 위압적인, 또는 ‘피도 눈물도 없이’ 기술적으로 정책을 처리하는 전형적인 관료제에 속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최근에는 임기가 보장되고 외부와 경쟁이 차단되는 안정적인 관료사회에 개방형 직위 등 경쟁과 성과주의가 도입되고 있다. 관료 파워를 뒷받침하는 두 축이 전문성과 정년제인데, 정년제가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관료, 특히 경제관료의 힘은 막강하다. 순천대 이병량 교수(법정학부)는 “사람들의 관심이 대통령 교체, 내각제냐 대통령제냐에 많이 쏠려 있지만, 사실 정책은 관료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훨씬 더 많다. 특히 관료집단이 가진 힘인 전문성과 능력, 정보는 대통령 비서실도 시민사회단체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말했다.
관료는 자동판매기 같은 기계가 아니다. 관료사회는 명분만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조직 논리가 지배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직업관료의 중립성은 항상 의심을 받아왔다. 1970년대 영국 노동당은 “관료들은 협애하고 명료하게 규정된 그들만의 이익과 취향, 교육 그리고 배경에 따라 국가를 지배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관료는 오랫동안 자신들이 관여해온 정책을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자기 부처 ‘고객집단’의 이해관계와 가치를 대변하는 경향이 강하다. 기존 정책에 이해관계가 걸린 고객집단과의 호혜적인 관계도 형성된다. 경제개혁연대 최한수 연구팀장은 “관료사회는 일단 어떤 정책 방향이 서면 특별한 변동이 없는 한 그쪽으로 끌고 가게 마련이다. 정책 공청회를 여러 번 거치지만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규제가 완화되어도 경제관료의 정책은 기업의 흥망성쇠에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관료조직과 집권 정치세력은 항상 갈등 관계에 놓이게 마련이다. 선거를 통해 통치를 위임받은 역대 청와대 집권세력은 항상 “기성 관료들을 갈아치워야 개혁이 성공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국민들한테 제시한 공약을 ‘관료조직의 정책을 통해’ 실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료는 주어진 정책을 단순히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입장을 갖고 정치가와 함께 정책 결정에 참여한다. 다만 정치가가 이해관계와 가치를 중심으로 참여한다면 관료는 전문지식과 경험을 정책 과정에 투여한다. 그래서 정책을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발생하게 되고, 따라서 집권 정치세력은 관료를 ‘정치적으로 통제’할 필요성을 항상 느끼게 된다. 정권교체를 이룬 새 정치권력일수록 다른 이념과 정책을 펴기 때문에 관료를 통제할 필요성은 더 강해진다.
집권세력이 정책적 변화를 시도하더라도 관료들은 정치세력의 국정운영 방향대로 정책을 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관료는 해당 정책에 대해 정치가보다 우월한 정보력을 갖고 있고, 그동안 쌓아온 전문지식과 경험을 활용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또 정치인은 임기가 한정된 반면, 직업관료는 정년이 보장되므로 새로운 정책을 지연시키다가 무산시켜버릴 수 있는 ‘조직적 능력’도 갖고 있다. 사실 한국의 정당은 정책능력도 부족한데다 선거만 치르고 나면 없어지기 때문에 정책 집행의 일관성도 없다.
미국·독일 등 비서실과 총리실 강화
이런 갈등 속에서 대통령이나 총리 등 행정수반은 독자적인 정책 정보력와 전문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대통령 비서실을 강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미국의 대통령 비서실이나 독일 총리실이 대표적인데, 미국의 경우 1943년 51명에 불과하던 대통령 참모진 수가 1972년에 583명까지 대폭 늘어났다. 직업공무원제 전통이 강한 영국에서 대처 총리도 외부 참모로 이뤄진 총리 직할의 정책팀을 통해 개혁을 주도하고 총리 관저의 비서진을 강화했다. 그러나 엽관제가 뿌리내린 미국에서조차 “대통령은 관료를 ‘설득할 권력’을 갖고 있다”고 말해진다. 관료를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설득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관료조직 개혁을 통해 관료조직 내부의 정보 흐름을 집권세력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예컨대 미국에서 관리예산처 같은 대통령 직속 기관들은 예산권 장악을 통해 각 부처의 정보를 대통령한테 집중시키고 관료제의 정책결정 권한을 제한한다. 충성도가 높은 관료를 주요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시키거나, 통치이념과 철학에 부합하는 관료를 임명함으로써 정치적 성향이 다른 관료가 집권 정치세력을 기만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도 있다. 물론 집권당과 행정부 간의 정책협의를 통해 관료조직을 통제하는 방법도 있다. 집권당이 독자적으로 정책안을 만들고, 정부 정책을 지지·비판하면서 관료제에 대한 견제를 가하는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관료에 대한 장악·통제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권교체를 경험해보지 못한 관료들이 각종 정책에서 국민의 정부의 이념과 철학에 동의·협조할지에 의문을 품고, 출범 이전 대통령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정부 조직과 대통령 비서실 개편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했다. 특히 김 대통령은 기획·조정 기능을 주로 맡는 정책기획수석을 신설하고, 대통령 직속으로 기획예산부와 중앙인사위원회를 신설해 대통령에게 인사·예산 권한을 부여했다. 또 재경부의 금융감독 기능을 금융감독위원회로 이관해 관료사회를 통제하려고 했다. 이는 ‘정치인 내각’이라고 불린 김대중 정부 초대 내각 17개 부처 가운데 12개 부처 장관을 정치인으로 임명한 데서 뚜렷이 나타난다. 내부 승진을 통해 관료 출신이 장관으로 중용되는 방식에서 크게 탈피한 내각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개방형 직위제도를 도입해 1∼3급 중앙부처 실·국장급 20%을 공직 안팎에 개방했다. 당정협의도 강화해 고위당정정책조정회의, 부처별 당정협의회, 실무 당정협의기구를 통해 정당이 주요 쟁점 정책 사안에 직접 개입했다. 당정협의는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보기 드물게 우리나라에서 1963년에 공식 도입됐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취약한 정책역량을 보강하려고 당 전문위원을 대거 공채로 뽑고, 재경부·산업자원부·행정자치부 등 6개 부처 출신 고위관료 6명을 당에 채용하기도 했다.
“여당은 초선 의원들 많아서 불리”
반면 참여정부는 당·정·청 분리를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당정협의 기능은 다소 떨어지고 있다. 대신 청와대 비서실에 국정과제위원회, 즉 각종 대통령 자문위원회를 둬서 관료에 대한 통제를 시도해왔다. 최근에는 고위공무원단(3급 이상 공무원의 성과 및 인사관리 시스템·5년마다 적격심사를 거쳐 퇴출도 가능)을 도입해 관료사회 통제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정책 변화를 꾀하기 위해 ‘코드인사’를 되풀이했음에도 관료 의존성에서 탈피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연세대 양재진 교수(행정학)는 “정책을 둘러싼 수혜자와 피해자의 갈등을 조정·타협하는 일은 정치가의 몫이다. 그런데 참여정부 여당 정치인은 초선 의원이 많아서 정책 전문성도 떨어지고 조정 능력도 부족하다. 초선 의원의 경우 고위 관료에게 윽박지를 수는 있지만 전문성과 정보에서는 관료와 게임이 안 된다. 관료 스스로 초선 의원은 인정하려 들지 않는 모습도 있다”고 말했다. 특히 노무현 캠프는 경제통 인재풀이 극히 취약한 편인데, 그래서 정통 직업경제관료들을 주로 기용하다 보니 ‘거대한 관료의 벽’에 부닥치고 관료들과의 전쟁에서 계속 밀려왔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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