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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부의 철조망을 허물어라

등록 2006-03-30 00:00 수정 2020-05-03 04:24

분양아파트와 임대아파트를 섞어 짓는 ‘소셜 믹스’형 확산시킬 계획… 임대주택단지 주민들이 당해온 경제·사회·문화적 소외 없애는 계기로

▣ 길윤형 기자/ 한겨레 사회부 charisma@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소장에 담긴 두 아파트의 이름은 미묘하게 달랐다. 분양아파트 주민들은 자신들의 주소를 ‘길음동부센트레빌’이라고 적었다. 그들은 임대아파트 주민들을 ‘길음동부아파트’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소장을 처음 접했을 때 기자는 두 아파트가 서로 다른 아파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두 아파트는 같은 ‘길음동부센트레빌’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높은 옹벽이 가로놓여 있고, 그 위에는 군대 탄약고 담장 위에나 어울릴 것 같은 둥근 철조망이 설치돼 있었다. 101동부터 118동까지는 ‘센트레빌’, 119동과 120동은 그저 ‘아파트’였다. 21세기 대한민국 서울에서 부와 빈을 가르는 야만은 현재진행형인데, ‘센트레빌’이 되지 못한 ‘아파트’ 사람들에게 그 구별은 가차 없이 냉혹했다.

법이 손을 들어준 ‘울타리’

이 아파트에 사는 김봉열(73)씨는 “벌써 지난 일을 끄집어내 뭘 하겠냐”며 손을 내저었다. 주민들 사이에 싸움이 시작된 것은 2004년 8월이다. 그는 “아이들의 등굣길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때 임대아파트 단지에서 분양아파트 단지 건너편에 자리한 미아초등학교로 등교하는 아이는 87명이었다. 주민들은 “아파트 단지 뒤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 옆으로 난 통로를 열어주면 아이들의 등굣길이 10분 정도 빨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통로에는 울타리가 설치돼 있었다. 임대아파트 주민들은 “울타리를 헐어달라”고 말했고, 분양아파트 주민들은 이를 거부했다. 주민들 사이에 몸싸움이 붙어 부상자가 속출했다. 2004년 8월12일, 임대아파트 주민들은 울타리를 강제로 허물었고, 분양아파트 주민들은 “임대아파트 아이들이 울타리를 통해 단지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소송을 걸었다. 그들은 소장에서 “이 울타리를 개방하면 8개 동 629가구 주민들의 쾌적한 주거생활은 더욱더 심각하게 침해된다”고 적었다. 아이들이 단지를 가로질러 다니는데 그들의 쾌적한 생활이 어떻게 침해되는지 알 수 없으나, 2005년 7월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23부는 주민들 사이의 조정 형식을 빌려 “울타리를 통해 아파트를 출입하지 말라”고 결론 내렸다. 임대아파트 주민들의 변호사로 나섰던 박갑주 변호사는 “조정 형식을 빌렸지만, 사실상 임대아파트 주민들의 패소”라고 말했다.

홍인옥 한국도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1980년대 후반부터 지어진 공공 임대주택들이 대단지로 지어지거나 분양아파트와 단지를 구분해서 건설돼 지역이 침체되고, 저소득층이 다른 사회 계층과 단절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과 서울 강서구가 2002년 조사한 <저소득층 집중 거주에 따른 문제점 및 개선 방안 연구>를 보면, 영구임대주택 주민(조사 대상 707가구)들은 자신들의 주거에 대해 ‘저소득층 주거지역’(23.6%)이나 ‘소음·악취 등 불량주거지역’(21.6%)라고 생각하고 있는 데 견줘, 비영구 임대주택 주민(조사 대상 300가구)들은 93.7%가 ‘일반주거지역’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단절돼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결국 경제·사회·문화적 차원에서 사회의 주류에 동참하지 못하고 배제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부와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분양아파트와 일반아파트를 한 단지나 한 동에 섞어 짓는 사회통합(소셜 믹스·Social Mix) 방식의 아파트를 늘려 저소득층 주민들이 사회·문화적으로 배제되지 않도록 배려할 방침이다.

대한주택공사 주택도시연구원이 2004년 분양과 임대아파트 사이의 물리적 공간 특성에 따른 37개 임대주택 단지의 사회적 배제 실태 차이를 조사한 결과(<임대주택 단지의 사회적 배제 실태 및 사회통합적 계획방안 연구>)를 보면, 한 동에 임대와 분양아파트가 섞여 있는 단지의 경우 △낙인 △차별의식 △소외 △반사회적 행위 △분양아파트 주민과의 갈등 등 사회적 배제 현상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그래픽 참조).

작은 실천으로 벽 허무는 사람들도

이에 자극받은 정부는 100만 호를 짓겠다고 약속한 국민임대아파트에 ‘소셜 믹스’형 아파트를 늘려 지을 방침이다. 이 제도가 가장 처음 도입되는 곳은 경기 군포 당동지구(13만2495평)다. 2010년 12월 입주 예정인 당동지구에는 3개 단지에 2783가구의 주택을 지을 예정인데, 2단지는 아파트 1개 동에 임대와 분양아파트를 섞는 ‘주동혼합형’, 3단지는 한 단지 안에 분양아파트 동과 임대아파트 동을 섞는 ‘동별구분형’으로 짓는다. 대한주택공사와 서울시 SH공사 등은 판교와 은평 뉴타운, 장지·발산 택지개발예정지구 등 새로 들어서는 대단위 단지에 ‘소셜 믹스’형 주택을 짓기로 방침을 정했다.

작은 실천으로 임대아파트와 분양아파트 사이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도 있다. 이명순(54) 경기 용인 구갈지구 8단지 부녀회장은 “단지 내에 만들어진 ‘IT플라자’가 주민 화합에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8단지는 ‘강남마을’로 불리는 이곳 대단위 아파트 단지 가운데 유일한 국민임대아파트 단지다. 처음엔 이곳 주민들도 임대아파트 주민들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그들은 강남마을 주민들의 단합 체육대회를 하면서 8단지 주민들만 쏙 빼놓았고, 8단지 앞에 있는 갈곡초등학교에 임대아파트 단지 아이들을 못 오게 하려고 “이 학교를 특수학교로 만들어달라”는 민원을 넣기도 했다. 그렇지만 2005년 9월 8단지 관리사무소 안에 공짜로 기초적인 컴퓨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IT플라자’를 만들면서 분양아파트와 임대아파트 단지 사이의 구분이 점점 옅어졌다. ‘IT플라자’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한정훈(37)씨는 “이런 자리가 없었다면 임대와 분양아파트 주민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할 기회가 전혀 없었을 것”이라며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친분이 싹트다 보니 누가 어디 사는지는 생각하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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