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본 한국 야구…섬세한 플레이를 배우고 간 한국 선수들이 수준 높여… 이치로 발언 보다는 승리를 ‘병역 면제’ 탓이라 떠드는 일본 미디어가 문제
▣ 도쿄=시로타 유키히로 <아카하타> 스포츠부 기자·황자혜 전문위원 jahyeh@hanmail.net
3월16일 정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야구 한-일전(8강전)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은, 도쿄 신주쿠 대형 전자상가 텔레비전 매장에서도 확인된다. 한 매장에만도 150여 명의 관객이 상점 눈치를 봐가며 숨죽여 중계에 몰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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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로로 대변되는 일본 대표팀과 한국의 이치로라 불리는 이종범이 교차되는 화면에는, ‘이기면 준결승, 운명의 한국전’이라는 자막이 시합 내내 박혀 있다.
나라 위해 이겨야 한다는 한국의 집념
7회 초 한국의 2점 선취에 이은 일본의 홈런 1점에 작은 탄성이 샐 뿐, 결국 2 대 1로 한국의 승리. ‘설마’ 하는 일본 야구팬들의 표정은 브라운관에 클로즈업되는 ‘분개하는 이치로’의 표정과 살짝 겹치고, 그 사이사이로 패배를 받아들이며 총총 돌아서는 사람들은 이구동성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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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예선 때도 그랬지만, 한국은 이기려는 집념이 강하다.”
“태극기를 마운드에 꽂는 것은 좀 지나치지 않나 하는 느낌도 있지만, 한국 선수들 기분은 충분히 알 만하다.”
일본의 50~60대는 거의 다 야구 세대다. 프로야구가 시작된 게 1930년대. 그러나 미국과의 전쟁으로 1940년대는 영어를 적대시하며 ‘볼’은 ‘마테’(기다려!), 스트라이크는 ‘요시’(좋아!)라는 용어로 대체되는 등 영어가 금지될 정도였다. 야구팀의 이름도 군대처럼 ‘거인군’이라 칭하며 전쟁색을 물씬 풍겼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전후 20살 때부터 야구광이 된 니시야마 미쓰오(61)의 한국 야구 평가도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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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전으로 속구를 구사했던 선동열, 발 빠른 이종범, 아시아 홈런 제조기 이승엽 모두 대차다. 더욱이 일본에는 절대 지지 않겠다는 어떤 단결된 힘이 보인다. 일본은 올림픽을 비롯해 야구 역시, 민족이나 국가를 위해 이겨야 한다는 의식이 한국만큼 강하지 않다. 그게 민족의식이 모자란 탓인가 하면, 그건 좀 모호하다. 오히려 일본은 ‘민족의식이 강하면 큰일 낼 나라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일본이든 미국이든 압도되는 ‘대~한민국’ 함성과 함께 이승엽의 홈런 기세는 도쿄돔과 미국에서도 가라앉을 기색이 없었다. 특히 한-일전에서 보여준 한국팀의 적극성, 집중성, 승부성의 강한 면모들이 일본팀보다 나았다. 아웃 타이밍으로도 과감하게 질주한 도루가 1사 2·3루의 호기를 넓혔고, 이종범의 직구 정면 승부가 결승타가 됐다. 9회 말 사요나라 굿바이 패전을 삼킬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한국의 대담한 투구가 일본의 장거리 타자들을 격파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WBC에서 보여준 것은 한 차원 높아진 한국 야구의 현재였다. 일면 부족했던 부분들, 다소 둔탁하고 복잡했던 플레이들이 이번 WBC에서 진화됐음을 증명했다. 실수나 부주의가 없는 플레이. 더욱이 한국은 일본보다 안타 수가 적었는데도 승리했다. 지금까지 한국 야구에서 별로 보이지 않던 게 나타났다. 한 번 찬스가 오면 놓치지 않는 집중력, 건실한 수비, 상대의 틈을 노리는 작전, 투수 교체를 통한 지속성 투구 등 사실상 일본 특유의 야구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일본을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섬세한 야구야말로 일본의 장기였으나, 지금으로선 한국에게 상장 주식을 전부 빼앗긴 느낌이다. 거기엔 일본 야구에서 배운 한국 선수의 존재도 있을 것이다.
한국 프로야구가 시작된 것은 1982년. 일본보다 반세기 늦은 출발이었다. 그 뒤 일본에서 뛰던 니우라 도시오와 이리키 사토시 투수, 와타나베 히사노 등이 한국 야구에 들어갔다. 한국에선 1996년 선동열이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했다. 인재 교류를 추진하면서 이종범 등의 야수도 일본에서 활약했다.
이 가운데 한국의 홈런 제왕 이승엽의 존재는 상징적이다. 한 시즌 최다 홈런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고 요란한 선전 속에 일본에 등장했으나, 지바롯데 마린즈 1년차 이승엽은 상대팀에 철저하게 연구됐고 약점인 안쪽 공과 변화구로 집요하게 공격당해 극도의 타격 부진에 시달렸다. “내 스타일을 전혀 다른 환경에 맞추는 데 시간이 걸렸다”던 이승엽은 두 번째 시즌에서 부드러운 자세로 공을 멀리 날려보내는 그만의 독특한 타격으로 되돌아왔다. 주변 의견에 귀기울이고, 투수의 공 안배를 읽어내는 등 점점 여유가 배어나왔다. 결국 2005년 지바롯데의 약진에 일익을 담당하게 됐다.
아시아 라이벌들의 즐거운 약진
이승엽은 올해부터 거인(요미우리 자이언츠)으로 옮겼다. 상황에 따라서는 거인의 4번 타자가 될 수도 있다. 일본 프로에서 최고의 전통과 인기를 지닌, 맹주로 일컫는 팀의 4번을 한국 선수가 맡는다는 것, 그 자체는 역사의 커다란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일부 한국 미디어는 대회 전에 이치로가 말한 “한국 선수가 앞으로 30년은 일본에 손댈 수 없게 하겠다”는 발언을 크게 보도하고 있다. 오해를 받을 만한 발언은 스포츠 선수로서도 스포츠 정신에서도 지적받을 만한 것이지만, 진의는 그 정도의 의지를 가지고 분발하겠다는 뜻이었다. 오히려 더 문제는 일본 미디어가, 한-일전에서 일본이 패한 당일 보도에서 한국 선수들은 ‘병역 면제’를 위해 필사적이라는 분석을 내리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한국 야구의 힘을 병역면제라는 ‘사탕’ 때문이라고 평가하는 일본 미디어의 관점에는 찬성할 수 없다. WBC에서도 대활약하는 이승엽은 “일본에서의 2년의 경험이 살아 있다”고 말했다. 선동열 투수 코치도 일본에서 배운 것을 젊은 투수들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현재의 강함은 이렇게 해서 배가된 기술과 정신적 성장에 뒷받침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번 WBC에서의 한국 약진은 지금까지 ‘아시아 리더’를 자부해온 일본 야구계에서도 의식 개혁을 촉진시킬 것이다. 앞으로 한국 야구에서 일본이 배워야 하는 것도 분명히 있다. 그리고 아시아의 훌륭한 라이벌로서 서로가 절차탁마해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한-일 야구팬들의 즐거운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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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은 스몰볼 시대 |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스몰볼이 빅볼을 눌렀다. 미국의 4강행이 좌절되고, 한국과 일본이 준결승에 오른 이번 대회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다.
빅볼이 득점을 ‘지르는’ 야구라면, 스몰볼은 ‘짜내는’ 야구다. 스몰볼은 튼실한 마운드와 철벽 수비를 바탕으로 공격 루트를 다양화한다. 희생 번트는 기본이고, 점수 차가 벌어져도 스퀴즈 사인을 내는 ‘소심한’ 야구다. 홈런이나 장타 등 개인기에 의존하는 빅볼에 비하면, 스몰볼은 개인의 희생과 팀에의 충성을 강조한다.
일본은 그동안 스몰볼의 본고장으로 불려왔다. 김봉연 극동대 교수는 “일본 감독들은 타자에게 매번 투구 때마다 ‘쳐라, 마라’ 지시를 내릴 정도”라고 혀를 내둘렀다. 한국 야구는 미국의 빅볼보다는 일본의 스몰볼에 가깝다. 데이터에 근거한 야구를 펼쳐 ‘컴퓨터 감독’이라고 불렸던 김성근 감독(현 지바롯데 마린스 코치), 다양한 작전을 구사하는 김재박 현대 감독이 스몰볼 사령탑으로 통한다. 2005년 이만수·장효조를 배출한 전통적 ‘빅볼 구단’ 삼성에 부임한 선동열 감독은 ‘지키는 야구’를 선언, 주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최근의 흐름을 보면 스몰볼이 대세다. 2005년 메이저리그 챔피언을 거머쥔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아지 기옌 감독은 빅볼 스타일의 선수 구성을 스몰볼 스타일로 바꿔 찬사를 받았다. 메이저리그에선 최근 선수들의 팀 기여도를 평가하는 ‘생산적 아웃’(productive out)을 세기 시작했다. △무사 상황에서 진루타 △원아웃에서 희생플라이나 득점타 등을 성공했을 때 인정받는다.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인 엠엘비닷컴은 3월15일 미국의 한국전 패배 뒤 “스몰볼은 우연이나 요행이 아닌 대세”이며 “메이저리그 아니 최소한 미국 대표팀이라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의 세계가 아닌 음의 세계, 죽어야 사는 야구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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