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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승패까지 정해놓지 그러슈?

등록 2006-03-22 00:00 수정 2020-05-03 04:24

준결승도 중남미 피하려 같은 조끼리 치르게 하고 유례없는 투구 수 제한까지…‘예정된 우승’ 향한 미국식 일방주의는 ‘히어로’ 심판 오심으로 화룡점정

▣ 길윤형 기자/ 한겨레 사회부 charisma@hani.co.kr

3월17일, 미국과 멕시코의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2라운드 마지막 경기. 미국은 이 경기에서 2실점 이상으로 패하면 4강 문턱에서 떨어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3회 말 2볼 노스트라이크. 미국의 살아 있는 전설 ‘로켓맨’ 로저 클레멘스가 공을 뿌렸다. 멕시코의 선두 타자 마리오 발렌수엘라가 친 공은 쭉쭉 뻗어 페어와 파울을 구분하기 위해 펜스 끝에 설치된 오른쪽 기둥을 정통으로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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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인들의 환호와 미국 관중의 탄식이 교차하는 가운데 발렌수엘라는 여유 있게 2루 베이스를 돌았고, 미국 스포츠 전문 채널 은 0-0이던 경기 점수를 1-0으로 수정한 뒤였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움직이는 듯 보였던 바로 그 순간, 미-일전의 ‘히어로’가 다시 등장했다.

아무 상의 없이 초청장만 뿌려

미국 심판 밥 데이비슨(53). 지난 3월13일 열린 미-일전의 ‘태그업 판정 오심’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그는 여전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잘 모르는 듯 보였다. 그는 이날 경기에 1루심으로 나서 명백한 멕시코의 홈런을 2루타로 둔갑시켰다. 잇따른 데이비슨의 오심이 고의인지 실수인지 알 수 없지만, 그가 이번 대회를 둘러싼 ‘미국식 일방주의’ 논란에 화룡점정을 찍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처음부터 WBC는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대회였다. 대회를 개최한 것은 국제야구연맹(IBAF)이 아닌 메이저리그(MLB) 사무국과 메이저리그 선수 노조다. 그들은 ‘야구의 세계화’라는 명분 아래 다른 나라와 대회의 개최 일정과 규칙 등을 상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초청장을 뿌렸다. 축구의 월드컵에 버금가는 국제대회가 없다는 사실을 아쉬워하던 다른 나라들은 찜찜한 마음을 감추며 기꺼이 대회 참가를 결정했다.
그렇지만 형편없었던 팀의 실력만큼 미국의 안하무인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들은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에 쳐들어가 죄 없는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것과 비슷한 리듬과 박자로 대회를 진행했다. 그들은 절차적인 공정함이라도 갖춰주길 바랐던 다른 나라들의 기대를 정면으로 배반했다. 모든 것은 미국 우승이라는 철저히 계산된 시나리오에 따라 정확히 움직였다.
가장 큰 논란이 일어난 것은 준결승 이후 경기 진행 방식이다. 국제대회의 관례는 조별 리그 이후 크로스 토너먼트제를 택하고 있다. 즉, A조 1위로 올라간 팀은 B조 2위와, B조 1위는 A조 2위와 싸우는 방식이다. 그렇지만 미국은 준결승전을 각조 1, 2위끼리 다시 맞붙게 했다. 까다로운 중남미 국가를 피하고 상대적으로 손쉬운 상대로 보였던 한국과 일본을 이겨 결승전까지 안착하겠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대회 공인구도 메이저리거들에게 유리한 메이저리그 공인구를 택해 비메이저리그 투수들을 애먹게 만들었다.

세계화된 건 야구가 아니라 메이저리그

더 가관인 것은 유례없는 투수의 투구 수 제한 규정이다. 그들은 선수들의 혹사와 부상을 막는다는 이유로 선발투수가 던질 수 있는 공의 수를 예선 65개, 본선 80개, 결선 95개로 정했다. 그들은 선수들의 부상을 걱정하는 메이저리그 구단주들을 달래면서, 도미니카공화국을 비롯한 투수 강국의 독주를 막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천문학적 연봉을 받는 슈퍼스타들이 모인 미국 대표팀은 졸전을 거듭한 끝에 4강 문턱에서 탈락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탈락이 그들의 실패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로 그들은 더 많은 세계 유망주들을 싼값에 자국 리그로 데려올 발판을 만들었다. 결국 세계화된 것은 야구가 아닌 메이저리그다(야구는 2012년 런던 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에서 제외된다). 박찬호와 김병현의 빛나는 역투 속에서 한국 프로야구는 지난 10년 동안 제자리걸음에 머물러왔다. 믿기 힘든 괴력을 발휘해 눈물겨운 승리를 거둘 때마다, 그들이 만든 세계 질서 속에 철저히 편입될 뿐이라는 사실. 지난 세대를 풍미했던 종속이론이 가장 잘 적용되는 곳은 푸른 잔디가 아름답게 펼쳐진 사각의 그라운드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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