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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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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의 광주항쟁, 김성한의 완봉승

등록 2006-03-22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어느 베이스볼 키드의 생애…해태 타이거즈의 촌스런 빨강·검정 유니폼의 추억… 한국야구를 믿지 못해 돈도 못 걸었던 내가 이제는 자신있게 야구팬임을 외친다</font>

▣ 김현석 영화 <ymca> <광식이 동생 광태> 감독

영국 작가 닉 혼비는 어린 시절부터 봤던 영국의 축구단 ‘아스널’의 경기들에 대한 기억만으로 한 권의 소설(<피버 피치>(Fever Pitch))을 엮어낼 만큼 축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나는 야구팬이다. 지금까지 내가 야구장에 가거나 중계를 통해 야구 경기를 본 게 몇 번이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혼비처럼 내가 봤던 모든 야구 경기들을 기억해 책으로 낼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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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요 몇 년 사이 한국에서의 야구 열기가 예전만 못하게 되면서, 덩달아 내 야구 사랑까지 시들해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에서 한국팀의 말도 안 되는(!) 연승 행진을 보면서, 지난날 나로 하여금 야구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광주일고 불참? 두환이에게 물어봐!

나는 광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본 최초의 야구 경기는 1980년 3월 광주일고가 대통령배에서 우승하는 모습을 방송으로 중계한 것이다. 특히 광주일고 에이스 선동열의 활약은 눈부셨다. 5월에는 서울에서 청룡기대회가 열렸다. 선동열의 광주일고는 당연히 강력한 우승후보였다. 하지만 광주일고는 우승을 하지 못했다. 아니, 대회에 참가를 하지 못했다. 80년 5월 광주에 갇혀 다른 곳으로 나갈 수 없었던 이들이 비단 광주일고 야구부뿐은 아니었지만, 그런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초등학교 3학년은 전남대생이던 야구광 외삼촌에게 물었다. 왜 광주일고가 대회에 나오지 않았느냐고…. 외삼촌은 대답했다. “두환이 X새끼한테 물어보라”고. 그게 야구광으로서의 분노였는지, 전남대생으로서의 분노였는지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선동열을 청룡기대회에 못 뛰게 했던 그분은 2년 뒤 프로야구를 만들어 우리 야구팬들을 즐겁게 했다. 고맙습니다, 각하!
나는 해태 타이거즈의 팬이었다. 그 촌스런 빨간 상의와 검정 하의의 조합은 제대로 ‘80년대식’이었다.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의 모델이 되기도 했던 전설의 꼴찌팀 ‘삼미 슈퍼스타즈’가 장명부라는 괴물투수를 앞세워 예상 밖의 전기 리그 1위를 달리는 가운데 광주에서 2위 해태 타이거즈와 4연전을 하게 되었다. 첫 두 경기를 해태가 내리 이김으로써, 두 팀의 승차는 2.5게임에서 반게임차로 좁혀졌다. 두 경기에 총력을 기울이느라 투수가 바닥이 난 해태가 땜빵으로 내세운 3차전 선발은 당시 투타를 겸하고 있던 김성한. 지금이야 김성한을 80년대를 호령했던 홈런 타자로 기억하지만, 프로야구 원년만 해도 김성한은 세계 야구 역사상 전례를 찾기 힘든, 타점왕 겸 10승 투수였다(당시 팀당 80경기였으니 162경기를 하는 메이저리그라면 20승에 해당하는 승수였다). 그 중요한 경기에서 김성한은 완봉승을 거둬 해태는 전기 리그 내내 1위를 달리던 삼미를 2위로 끌어내리고 1위에 올라 내친김에 전기 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김성한은 85년을 끝으로 투수 겸업을 그만두고 타격에 전념해 홈런왕, 타점왕, MVP 등 타자로서의 모든 영예를 누리고 은퇴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김성한이 마운드에 서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첫 야구장 데이트, 이종범을 잊지 못한다

해태 타이거즈의 팬으로 살아왔던 내게 90년 가을은 시련의 시간이었다. 한국시리즈 5연패를 노리던 해태가 영원한 ‘밥’이었던 삼성에게 선동열을 앞세우고도 역전패를 당한 것이다. 대입 재수를 하던 나는 그 충격에 1주일 넘게 학원에도 안 가고 방황했다. 내 모의고사 성적을 팍팍 떨어뜨린 삼성은 해태와의 플레이오프에서 힘을 다 뺐는지 90년대의 새로운 강자 LG에게 4연패로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럼에도 내가 그 맥빠진 90년 한국시리즈를 기억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최동원 때문이다. 최동원! 선동열과 함께 80년대를 양분했던 대한민국 최고의 투수. 영원한 부산 야구의 자존심 최동원이 선수생활 말년에 삼성으로 트레이드되어 한국시리즈 마운드에 올랐다. 그런데 충격적이었던 것은 선발투수나 이기는 경기의 마무리가 아니라 큰 점수차로 뒤진 상태에서 패전 처리로 등판했다는 것이다. 84년 롯데가 우승할 때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올렸던 천하의 최동원이 말이다. 그날 이후, 그는 다시 마운드로 돌아오지 않았다. 좋아했던 야구선수들이 퇴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가슴 아프다. 최동원이 그랬고, 말년의 김성한, 이만수가 그랬으며 지금의 이종범, 이승엽도 언젠가는 그런 모습을 보일지 모른다. 그게 인생 아닌가.
1993년 7월18일 해태 타이거즈 대 LG 트윈스 경기.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여자와 야구를 보러 갔던 날. 당시 마음에 품고 있던 여자 후배에게 야구를 보러 가자고 했던 것은, 야구광인 나로서는 너무나 진실한 프러포즈였지만, 그녀는 몰랐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주말에 잠실에서 하는 LG 대 해태전은 적어도 3시간 전에 가야 표를 구할 수 있었다. 그걸 알 턱이 없는 그녀는 경기 시작 1시간 전에 집으로 데리러 오라고 했고, 나는 아침부터 매표소에서 기다려 겨우 표를 구한 다음 그녀의 집으로 가서 다시 그녀와 함께 야구장으로 왔다. 경기 시작 20분 전. 당연히 표는 동이 나고 암표도 구하기 힘든 시각이었다. “어, 매진이네? 야구 못 보겠다.” 당황하는 그녀 앞에 나는 품 안에서 입장권 2장을 꺼내들었다. “어? 어떻게 구했어요?” “으응…. 그게…. 예매했어.” 야구장 입장권 예매 같은 건 없던 시절이었다. 그날 경기가 눈에 잘 들어왔을 리 없으나, 기억에 생생한 장면이 있다. 당시 신인이었던 해태 유격수 이종범. 잠실 외야 잔디까지 굴러간 땅볼을 잡아서 1루에서 아웃시키는 유격수를 나는 그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다.
마침내 2006년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 2주 일정으로 미국 여행을 다녀왔다. 차기작 시나리오가 잘 안 풀려서 재충전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사상 최초의 야구 월드컵을 현지에서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일본에서 지역 예선이 열리는 동안 라스베이거스에 머물렀는데, 한국-대만전, 한국-중국전에 돈을 걸어서 1천달러 가까이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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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차마 한국-일본전에 돈을 걸 엄두는 나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일본의 전력이 우세했고, 현지 도박사들의 예상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일본에 돈을 걸고 한국을 응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승엽의 역전 홈런이 터지는 순간, 한국 야구를 믿지 못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또 탓했다. 배당률도 높았는데…. ㅠㅠ

<ymca>으로 KBO에서 공로패…</ymca>

애너하임 구장에서 열린 한국-멕시코전을 직접 보았는데, 열정적인 멕시코 관중들 사이에서 숨죽이며 이승엽의 홈런과 서재응의 호투를 지켜보느라 힘들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한국이 세계 최강 미국을 꺾었단다. 어차피 질 게 뻔하니 돌아가서 한-일전을 텔레비전으로 보는 게 맞다는 판단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던 건데, 아! 또 한 번 내 어리석음에 땅을 쳤다. 그리고 한-일전. 그날 이후 재방송으로 수십 번을 넘게 본 이종범의 결승타. 일본에서 힘든 시절을 보냈던 야구 천재가 일본을 상대로 설욕하던 순간. 각본 있는 드라마를 만들어야 하는 나로서는 이런 각본 없는 드라마에 좌절하고 또 좌절한다. <ymca>을 만들고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공로패를 받은 뒤, 영화감독으로서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던 나는 한때 야구와 의도적으로 멀어지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혼란스럽지 않다. 나는 영화 만드는 사람이기 전에 한국 야구팬이다!


</ymca></ym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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