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개과천선 <한겨레21>

등록 2006-03-08 00:00 수정 2020-05-02 04:24

‘남성 천하’였던 시사주간지, 기사를 지배한 마초적 시선은 어떻게 변화해갔나.산업·발기부전의 성 이야기를 넘어 변화된 남성과 여성상을 발견하기까지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남성 천하’였다. 최선을 다하기에는 조건부터가 열세였다. <한겨레21>은 1994년 창간(1994. 3.24)부터 1년간 여자 기자가 한 명도 없었다. 남자 기자는 12명이었다. 남자를 만나고 남자가 기사 쓰고 남자가 기고했다. 성 관련 표지이야기는 3호(1994. 4.7)에 제일 처음 등장했다. ‘불황 모르는 공룡산업 한국의 섹스 시장’은 “더 늦기 전에 논의라도 시작하자”로 끝난다. 논의를 갈구했으나 지면에서 형상화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엉덩이를 수박같이 큰 점으로 가린 성매매자 사진의 캡션은 “항상 정에 굶주려 외로워합니다. 그러다 쉽게 애정에 눈이 멀고, 모든 돈 다 털리기 일쑤지요”다. 3호 독자의견(창간호에 대한)에는 “여성이 볼 만한 기사가 없다”는 의견이 접수됐다. 1994년 4월 서울대 우조교 사건 판결과 함께 ‘성희롱(sexual harassment)’라는 어려운 용어가 일반인에게 회자되었다. <한겨레21>에는 논단 하나(8호·1994.5.12)와 ‘어디까지가 성희롱인가’라는 남성을 위한 가이드로 비치는 제목의(내용은 ‘양반’이었다) 기고가 다였다(7호·1994.5.5).


△'남자의 눈물'은 가부장제의 또 다른 희생자인 남성에 감성적으로 점근했다.(왼쪽)

도전인터뷰에 등장한 최초의 여성은 미스코리아 한성주(13호·1994. 6.16)였다. 인터뷰는 그가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운동에도 열심임을 강조했다. 초반 ‘현대생활’이라는 꼭지에는 조루와 발기부전을 이야기하는 ‘남성 연구’가 실렸다. 연재가 짧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남자의 패션, 남자의 감성을 말하다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남성 청중이 질문했을 때 프랑스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는 “당연하지요. 세상에 그것밖에 없으니까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끊임없이 고민하지 않는다면 정론, 진실, 정의를 내세운다는(!) <한겨레21>도 남성 잡지일 수밖에 없다. 여전히 남자 기자가 대세였지만 창간 1년과 3년차의 1년을 제외하면 ‘남성 중창단 시대’는 끝낼 수 있었다. <한겨레21>이 ‘남성 잡지’가 되지 않는 최선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시선이 남성적임을 선언할 때였다. 권력자인 ‘남성’을 인정할 때 그 남성은 여성을 전제로 한 ‘타자화된 남성’이 된다. <한겨레21>은 적어도 남성을 인정했기에 ‘마초’는 되지 않았다. ‘남성, 소수’를 보여주었고 가부장제 폭거 아래의 다른 ‘남자들의 목소리’를 낸 것들, 그들 자숙의 목록은 길었고 현명했다.

20호(1994. 8.4) 특집은 ‘성형수술, 그 욕망의 두 얼굴’이다. “성형수술에 남성들도 예외가 아니다”가 기사의 원동력이었지만, 여성이 드러누운 사진에 부위별로 성형수술 정보를 새긴 화보가 눈에 거슬린다. 소주 광고에 “남자들이여, 지문을 찾자!”라는 광고로 으샤으샤 하던 시절이었는걸, 세월을 좀 빨리 돌려보자. 57호(1995. 5.4)에는 ‘섹스 어필의 시대’가 등장했다. 그때 박진영이 엉덩이를 쓰다듬는 춤을 췄고 김원준이 ‘치마 패션’을 하고 나와 춤을 추었다. 지난 1년간 성 관련 기사들의 보충판이자 남성의 시선에서 벗어나 써나간 최초의 기사였다.

71호(1995. 8.10) ‘파격, 95 서울 여름의 패션’도 같은 맥락이다. 배꼽티, 슬리브리스, 핫팬츠, 초미니스커트가 서울 패션의 상징이 되었다는 기사 한편에 반바지에 샌들이 남자 대학생들의 교복으로 등장했다고 전한다. 이어지는 남성 트렌드 기사는 ‘김경의 스타일 앤드 시티’(467호·2003. 7.17~558호·2005. 5.10)가 대놓고 멋진 남자, 섹시한 남자로 변신을 주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염 기르기(559호·2005. 5.17), 카고 바지 등 밀리터리 룩 강세(584호·2005. 11.15) 등 최근에도 남성 트렌드를 좇아다녔다. 이런 트렌드만 있지 않았다. 310호는 수다스럽지 못하다는 말은 재미없다는 말과 통하는 젊은 남자들의 ‘수다 감성’을 특집으로 다뤘다. 제419호(2002. 8.1)는 월드컵 뒤 ‘멋진 반항아’ 김남일을 조명했다.

‘아이 낳지 않을 권리’의 혁명

115호(1996. 7.4)는 ‘성비 파괴 가상 시나리오’가 표지이야기다. 성비 파괴로 미래에 끔찍한 대재앙이 온다는 ‘위협’이다. 127호(1996. 9.26) ‘아내는 연애 중’은 드라마 <애인>이 방영되며 인기를 끌던 때에 나왔다. 의도는 ‘외도가 남성만의 특권이 아니라는 것’이지만 ‘아내는 연애 중’이라는 제목으로 남성(!)의 불안감을 겨냥했다. 175호(1997. 9.25) ‘아내의 반란’도 ‘남성 불안감 조성’ 기사다. 20년 이상 결혼생활을 해온 여성들의 이혼이 늘어나고 있다는 내용이다. ‘95년 인구동태’의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결혼한 지 20년 이상 된 40·50대 부부의 이혼이 1986년 전체 이혼의 4.5%에서 95년 9.1%로 2배 이상 뛰었다. 특히 이런 이혼의 80%는 아내가 제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453호(2003. 4.10)의 무자녀 부부들의 결단을 다룬 ‘아이 낳지 않을 권리!’는 우선 제목의 시선이 평등하다. 563호(2005. 6.14) ‘불행한 동침’은 부부 강간의 처벌을 명시한 가정폭력특례법 개정안 준비 과정에서 드러난 실태를 다뤘다. 국민 81.3%가 ‘부부 강간을 처벌하라!’고 목소리를 높인 설문조사를 발표했다.

1997년 말에 밀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는 한국에 성찰적인 문제들을 던져주었다. 고개 숙인 남자도 그중 하나였다. 227호(1998. 10.1)는 퇴출당하는 위기의 40대가 주제다. “병적일 정도로 지나친 경쟁심에 얽매여 살아야 했다” “장남이라는 책임감에 짓눌려 한시도 자유롭지 못했다”던 남성은 가부장제의 또 다른 희생자라는 것이다. 384호(2001. 11.22) ‘남자의 눈물엔 향기가 있다’는 좀더 진보한 접근이다. 남성에게 평생 세 번만 울라는 세상은 ‘남성 파괴적’이다. 대기업 남자 사원 3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80% 이상이 “울고 싶을 때 참는다”라고 말했고, 64%가 1년 이내에 운 적이 없다고 말했다.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 38.5%가 ‘남자는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되므로’, 31.8%가 ‘우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라고 대답했다. 24.3%의 남성이 “1개월 이내에 울고 싶”었지만 실지로 운 사람은 14.7%였다. 595호(2006. 2.7) 특집 ‘다섯 개의 아버지에 대한 고해성사’는 부재가 불행이지 않을 수도 있는 아버지에 대한 남성들의 애증이 교차하는 비망록이다.

남성 기자의 육아휴직 땀방울

가사노동을 여성의 전유물로만 여길 수 없다. 360호(2001. 5.31) 표지이야기는 ‘생식기로 할 일을 나누지 말라’는 성역할을 파괴하는 사람들의 실례가 실려 있다. 여자 옷을 입고 무대에 서는 이대학씨와 전업주부로 살고 있는 오성근씨 등 여성의 영역에 들어선 남자들을 소개했다. 김창석 기자는 343호(2001. 2.1) ‘별아 아빠는 최선을 다했단다’에서 출산 현장에 뛰어들었다(‘기자가 뛰어든 세상’의 첫 회). 김 기자는 ‘진통’ 대신 ‘자궁 수축’이라는 말을 하면, 웃긴 이야기를 하면 고통을 던다는 등 ‘이론가’의 면모를 보이지만, 땀방울은 ‘대략 난감’으로 맺힌다. 김 기자는 연이어 육아휴직(366호·2001. 7.12)에도 뛰어든다. 오래 아이를 품에 안고 있으려니 인대가 늘어나는 ‘직업병’도 얻었다. ‘아빠 엄마의 파업 시대’(399호·2002. 3.14)도 육아 휴직을 다루었다. 바뀐 가족 가치관과 육아비의 상승 등으로 무자녀를 선호하는 세태를 분석하고 제도적 장치의 완비와 육아휴직을 쓰는 데 망설이지 마라고 제안한다.

꾸준한 ‘남성’ 자각으로 선명한 상승곡선을 유지하더니 429호(2002. 10.17) ‘2002 가을 조선 녀자’ 등에서 삐끗하기도 했다. 북한의 ‘미녀 용병술’이 남남(南男)들에게 적중해버린 것이다. 이후 또 다른 ‘미녀 용병술’이 빛을 보았다. 김소희 기자의 ‘오 마이 섹스’(561호·2005. 5.31~)는 ‘여성 성기’ 중심의 성을 적나라하게 내보이면서 변화된 여성·남성상을 담았다. 현재도 열혈 연재 중이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