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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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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맹세문은 전체주의적이다”

등록 2006-01-04 00:00 수정 2020-05-03 04:24

국기에 대한 맹세문 지은 충남교육청 장학계장 유종선씨 최초 인터뷰
1972년 문교부가 충남 맹세문을 수정해 확산시키면서 더욱 국수주의적으로 변화

▣ 대전=글·사진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대한민국 정부도, 대한민국 정부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수구보수 세력도 관심 없었던 국기에 대한 맹세의 저자를 <한겨레21>이 찾아냈다. 유종선(85)씨. 그는 1968년 충남도교육청 장학계장으로 일하며 교육감의 지시로 맹세문을 지었다. 그러나 그의 술회는 충격적이었다. 그는 지난 12월27일 인터뷰에서 “지금의 맹세문은 전체주의적”이라고 말했다.

유씨는 그해부터 충남 각급 학교에서 시행되던 맹세문이 1972년 문교부가 전국 학교로 확대하면서 일부 문구가 수정돼 의미가 변질됐다고 증언했다. 그는 1921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줄곧 교육 관료의 길을 걷다가 퇴임해 현재는 소일하고 있다. 인터뷰 장소인 대전 유성구의 한 음식점으로 자전거를 타고 온 그는 40년이 다 돼가는 기억을 더듬더듬 풀어내기 시작했다.

‘정의와 진실’ 대신 ‘몸과 마음을 바쳐’로

정부 공식 자료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가 1968년 충남 학교에서 먼저 시행됐다고 나와 있다.

=1968년 1월 조중엽 충남도교육감이 부임했다. 조 교육감은 교육지표로 ‘충무정신’을 내세웠다. 그리고 애국애족, 자주자립, 창의창조, 염결무사, 감투필승 등 충무의 5대 정신을 제정했다. 학생들에게 충무정신을 가르쳤고, 충무소년단을 만들었고, 아산 현충사 옆에 충무수련원을 지어 아이들을 입소시켰다. 이와 더불어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제정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경례만 했지, 맹세문을 낭송하진 않았다. 이때부터 충남 각급 학교에서 맹세문을 낭송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손수 챙기며 충남 아산 현충사의 성역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던 때였다. 조 교육감도 여기에 호응하기 위해 충무정신 교육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던 것 같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거기서 비롯됐다.

맹세문은 누가 만들었나.

=조 교육감이 애국애족을 해야겠는데, 맹세문을 만들어 보급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추진 부서가 중등교육과로 떨어졌고, 당시 장학계장이던 나와 사회과 담당 장학사인 김아무개씨가 상의해 만들었다. 미국의 일부 주에서 행해지고 있는 맹세문을 참고했다. 유럽도 찾아봤는데, 대부분 국가에는 없더라. 조 교육감은 이미 숨졌다. 살아생전에 자신이 맹세문을 만들었다고 말을 하고 다녔다. 나는 공무원으로서 상부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다.

학계나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했나. 전 국민이 외우고 있는 맹세문인데 최소한의 연구나 토론, 의견 수렴 등의 절차가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런 건 없었다. 당시엔 ‘집안일’이라고 생각했다. 충남 지역 학교에서만 시행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한 달 만에 과장과 국장의 결재를 마쳤고 교육감도 좋다고 말했다.

그런데 충남도에서만 시행되던 맹세문 암송이 어떻게 전국적으로 퍼지게 됐나.

=구체적인 계기는 나도 잘 모른다. 다만 충남도교육위의 맹세문 암송이 모범적이라고 봤기 때문에 1972년 문교부가 전국적으로 확대한 것 같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당시 김종필 총리가 충남 당진의 한 초등학교에 가서 국기 게양대 아래 맹세문이 써진 것을 보고 다른 학교도 충남을 따르라고 지시했다는 말도 있더라.

현재의 맹세문을 보면, 충남 도교위의 맹세문의 뼈대를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충남 맹세문과 몇 가지 표현이 다르다. ‘조국의 통일과 번영’이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으로, ‘정의와 진실로서’가 ‘몸과 마음을 바쳐’로 바뀌었다.

외부인사 만난 것은 처음

=전체주의적인 냄새가 나지. 나는 정의와 진실이라는 문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정의와 진실로서 충성을 다한다는 것이라면, 국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는 충성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다른 말로 국가의 행위가 정당할 때에만 충성하겠다는 것인데. 정의와 진실을 향한 애국이 무조건적인 애국으로 둔갑했다.

=그렇다. 사실 나도 맹세문을 작성할 때 ‘몸과 마음을 바쳐’라는 문구를 넣을까 고민한 적이 있었다. ‘충성을 다한다’는 문구와 대구가 맞았으니까. 하지만 전체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이라서 그만뒀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문교부가 최종 확정한 맹세문에서 그 문구가 살아났다. 씁쓸했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거부하다가 피해받은 사람이 많다.

=우리야 교육감이 시켜서 맹세문을 만든 것이다. 문교부에서 전국적으로 확대했을 때는 우리의 손을 떠나 있었다. 그렇게 정치적으로 이용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때가 그런 시대였다.

1972년 문교부에서 맹세문을 수정 확정해 전국 학교에 지시할 때, 충남 맹세문의 작성 경위나 의미 등에 대한 문의가 있었나.

=나로선 그런 문의를 들어본 적이 없다. 문교부에서도 전문가를 참여시켜 맹세문을 제정하진 않았을 것이다. 충남 맹세문을 조금 고쳐서 냈을 뿐이지.

맹세문 제정 이후 30여 년 동안 정부나 국책 연구기관에서 사료 정리를 위해 찾아온 적이 있나.

=없었다. 국기에 대한 맹세문에 대한 일로 외부 인사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박정희 유신 체제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한다는 것도 섬뜩하고. 강압적인 내용의 맹세문을 바꾸거나 폐지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나. 한자로 알 ‘인’(認)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나. 말씀 언 변에 참을 인 자가 붙어 있다. 내 마음이 그렇다.

1968년 충남도교육위 국기에 대한 맹세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써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1971년 전남도교육위 국기에 대한 맹세

나는 태극기 앞에 몸과 마음을 바친다. 나는 나라와 겨레를 지킨 태극기 앞에 몸과 마음을 바친다

1972년 문교부 국기에 대한 맹세(현재 시행 중)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교육관료와 유신체제의 합작품

박정희의 현충사 성역화 작업에 편승해 충남 교육감이 충무정신을 내세워

국기에 대한 맹세는 교육관료의 충성 경쟁과 유신체제의 애국주의 드라이브가 결합돼 탄생됐다.
박정희 애국주의의 주요 역할 모델은 충무공 이순신이었다. 그는 충남 아산 현충사를 민족의 성역으로 만들었다. 그는 1966년부터 1977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현충사 성역화 작업을 시도하면서 성역화 실무자회의에도 참가했고, 공사현장에도 자주 모습을 비쳤다. 박정희는 재임 18년 동안 충무공 탄신일 행사에 14번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충사에는 박정희의 친필 현판이 달려 있다.
충남 제2대 교육감 조중엽씨가 1968년 1월 부임하자마자 “충무정신 이어받아 충남교육 건설하자”는 교육지표를 내세운 것은 이러한 최고 통치자의 정서에 부합하자는 전략이었다. 조 교육감은 1971년 충남도청에 들른 대통령 앞에서 관련 브리핑을 하고 모범 충무소년대원의 일화를 보고했다.
“지난해 10월 중학교 3학년에 재학하고 있던 강석호군은 모범 소년대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부조리한 생활을 해 항시 어린 가슴을 조이고 괴로워해야만 했습니다. 우연히도 강군은 불치의 병마에 걸려서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됐을 때, 병석에서 아버지를 불렀다고 합니다. ‘아버지! 아무리 사회악이 심하다 할지언정 이순신 장군과 같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르게 살아가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머리를 현충사 쪽으로 향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강군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피어린 충고를 듣고 학교에 찾아와 두 명의 장학금을 기탁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충남에서 교육지표로 충무정신을 내세운 것은 대단히 좋은 착상이다. 이 갸륵한 학생의 이야기를 산 교재로 채택해 이용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충무정신 교육의 전국적인 확대를 지시했다. 충남에서만 시행되던 국기에 대한 맹세도 그해 전남도교육위에서 자체 작성해 시행하더니, 이듬해에는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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