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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은 우주에 있는 줄 알았다

등록 2005-08-18 00:00 수정 2020-05-03 04:24

‘인간어뢰’ 부대에서 훈련받다 8·15 맞은 할아버지 시노하라 가즈오
그때 일본은 통제사회였고 전쟁이 좋은지 나쁜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 도쿄=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이쇼의 아버지이자 다이가의 할아버지인 시노하라 가즈오(78)다. 1927년에 태어났다. 우리는 전쟁이라는 단어에 익숙한 세대다. (할아버지는 태평양전쟁도 대동아전쟁이라고 불렀다) 전쟁 하면 우리 세대는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을 먼저 떠올린다. 그만큼 전쟁에 익숙한 세대였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은 학교 다닐 때부터 자세히 배웠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쌀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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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17살 때였다. 시가현에 있는 해군항공대에서 근무했다. 수천명 규모의 부대였다. 그때 우리는 전장에 파견되기 위한 훈련을 반복했다. 이륙하기 전에 비행기 프로펠러를 돌리는 연습, 비행기 낙하 훈련, 모르스 훈련, 깜깜한 밤중에 신호를 보내는 훈련 같은 것을 반복했다. 가미카제 특공대가 만들어진 때였다. 어느 날 밤 연습장에 사령관이 들어왔다. “일본이 위험하니 지원할 사람 나와라”는 연설을 했다. 불려나온 사람이 모두 250명 정도 됐는데 모든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그런데 훈련하는 중에 사람들이 자꾸 줄어들었다. ‘인간어뢰’라는 수상특공대로 사람들이 자꾸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인간어뢰는 한 사람이 타는 잠수함인데 그것을 타고 미군 함정에 부딪쳐서 자폭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위험한 군대였기 때문에 남자가 여러 명인 집안에서는 셋째아들을 먼저 군대로 보내고 둘째아들, 장남 순서로 군대를 보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 ‘덴노’(천황)가 방송을 했다. 정오에. 덴노의 목소리는 난생처음 들었다. 그 방송을 들으면서 든 느낌은 단 한 가지였다. ‘아, 이제 끝이구나’ 하는 안도감이었다. ‘아, 우리가 당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 뒤로 1주일 정도는 ‘다시 특공대가 나가야 한다’ ‘누가 또 전쟁을 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1주일이나 10일 정도 지난 뒤에야 좀 안정이 되고 안도감이 들었다.

그때 우리는 천황이 우주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렇지만 천황을 위해서 싸운다는 생각보다는 내 주변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라는 생각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일본 본토에서는 부인들이 죽창 연습을 할 정도로 미국에 끝까지 저항하도록 요구받았다. 그래서 항복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여자들이 그 정도인데 병사들이 항복을 인정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천황이 항복 연설을 한 게 아닐까 한다. 도대체 누가 그 상황을 설명할 수 있었겠는가. 병사가 인정 못하는 내용이지만 ‘신’이 설명하면 납득할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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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또래 다른 사람들은 한국·중국·말레이반도까지 가서 그 나라 사람들을 죽이는 비참한 경험까지 해야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끝내 답변하지 않았다.) 사실 그때 일본은 통제된 사회였다. 제한된 정보로만 판단할 수 있었다. 나는 학문을 한 사람도 아니다. 세상과 사회에 대해서 잘 몰랐다. 전쟁이 좋은지 나쁜지 판단할 수 없었다. 아들이나 손자가 전쟁에 대해서 안다고 말하지만, 관념적으로만 이해할 것이다. 나는 국내 피해 상황도 잘 몰랐다. 도쿄대공습 같은 것도 보지 못했다.

8월15일 당일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날씨가 참 좋았다. 무척 바빴던 날로 기억한다. 군대에서 이것저것 정리하고 결국 나도 8월26일에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8월 말에는 쌀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은 농사를 지었는데 먹을 쌀이 없었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국가의 명령으로 공출을 하던 시절이었다.

데모하던 아들, 어느 쪽이 옳은가

전쟁 뒤에는 경찰직에 종사했다. 그날그날 사는 게 어려운 시절이었다. 1985년에 은퇴했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지낸다. 보통 시간이 너무 많아서 한가롭게 지낸다. 일본에는 “노인이 되면 ‘오차’(한국의 녹차 같은 것)를 새벽에 마신다”는 얘기가 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일은 못한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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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일본이 재생해야 하는 시기에 자라서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고방식은 우리와 많이 다르다. 아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데모하던 애였다. 대학 시절에는 아마 절반 이상을 데모하면서 보냈을 거다. 자유주의·공산주의·미-소간 대립 같은 게 있었다.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틀리다고 얘기하기 힘들었다. (아들을 바라보며) 내가 데모하면 안 된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나? ‘그렇게 사회와 맞서도 되는 것이냐’고 얘기한 적은 있는 것 같다. 1960년대에는 자가용이 있는 집이 거의 없었다. 도쿄올림픽 이후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올림픽 전과 후가 정말 많이 달랐다. 삶의 내용이 달라졌다.

(아들이나 손자 세대가 할아버지 세대를 이해할 수 있냐고 묻자) 잘 모르지 않겠나. (웃음) 주변에 조선 사람도 없어서 한일합방 뒤에 조선에 끼친 가해 내용은 잘 모른다고 하는 게 솔직한 얘기다. 잘못된 것이 있다는 점은 알고 있다. 2년 전 한국에 간 적이 있다.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언제라도 갈 수 있지 하는 마음에 방문이 늦어졌다. 그런데 다른 나라 같지 않았다. 규슈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말은 안 통했지만, 필답 대화도 가능했다. 친근감이 들었다. 둘째아들은 한국 친구도 있는 눈치였다. 관광 갔다가 알게 돼서 친하게 지낸다고 들었다.



보급없는 전투, 나는 지옥을 보았다

[인터뷰/ 평양전쟁의 최전선에 참전했던 아사히 아키라]

조선여성 위안소 갔던 부끄러운 경험… 신사참배하는 고이즈미 납득 못해



시노하라 가즈오와 같은 세대인 아사히 아키라(82)를 만난 건 8월6일 오후 2시께 시노하라의 집에서였다. 그는 19살 때인 1942년 말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태평양전쟁의 최전선에 참전했던 병사다. 그는 전쟁 과정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이 있는 위안소를 찾았던 얘기까지 털어놓았다. 그는 인터뷰 도중 눈물을 내비치기도 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942년 말부터 싱가포르~말레이반도~타이~버마로 이어지는 전선에 있었다. 최전선 부대에 물자를 공급하는 수송부대였다. 말과 자동차가 주요 운송수단이었지만, 산악지대였기 때문에 때로는 코끼리를 이용했다. 인도와 버마의 접경지대인 인팔 지역에서의 전투는 태평양전쟁에서도 가장 참혹했다. 인도는 그때 영국의 식민지여서 영국군이 지키고 있었고, 일본군은 중국에서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와 마오쩌둥의 공산당 군대와 싸우던 때였다. 영국군이 장제스 군대에 물자를 지원하고 있어 일본군은 물자보급 루트를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됐다. 문제는 그곳이 해발 2천m 이상의 산악지역이었다는 점이다. 일본군 4개 사단이 산악 깊숙이 들어갔다가 보급이 끊겨 대부분이 굶어죽거나 병에 걸려 죽었다. ‘보급이 없는 전쟁이 어디 있냐’면서 저항한 간부들은 교체하면서 말도 안 되는 무리한 전투를 벌인 탓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지옥’을 봤다. 전사자 수도 파악되지 않아 당시에 ‘백골가두’(죽은 이의 뼈가 길을 만들었다는 뜻)라는 말이 있었다.
1945년초 싱가포르 간부후보생 사관학교에 있을 때였다. 하루는 동료 한명이 불렀다. 10명이 모였는데 한명이 “몸 상태가 안 좋은데 아무래도 여자 경험이 없는 ‘숫총각’이어서 그런 것 같으니 위안소로 가자’고 했다. 일본 여성 위안소는 높은 계급만 상대해서 어쩔 수 없이 조선 여성들이 있는 위안소로 갔다. 한국에서 온 기자 앞에서 이런 말을 하니 정말 부끄럽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인 나가사키로 돌아왔다. 그런데 슬픈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와 장인 될 분 모두 원폭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원폭은 참혹한 범죄지만, 원폭을 떨어뜨리게 만든 일본 육군과 정치 요직에 있던 사람들에게 더 화가 난다. 전쟁을 빨리 끝냈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거다.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을 쉽게 생각해 신사참배를 하는 고이즈미를 납득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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