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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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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족했지만 자존심은 꽝이었다

등록 2005-05-24 15:00 수정 2020-05-02 19:24

1960년대, 80년대, 2000년대 카투사들의 만남
“개인적으로는 자랑스러웠으나 국가적으로는 이제 없어져야”

▣ 진행 ·정리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사회 섭외율 100%였다. 전화 한통에 모두 응낙해주셨다. 하실 말씀이 많을 것 같다.

이근창(이하 이) 내가 카투사 한 걸 어떻게 찾았나 몰라.

사회 네이버에 물어보다가…. 쓰신 책 <빈곤을 극복한 삶의 지혜, 고통을 이긴 삶의 보람>에 카투사 얘기가 나와서 알게 됐다.

사단장 철학대로 뽑다가 시험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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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투사가 뭔지도 모를 때였다. 5·16 나고 다들 군대 가라고 했다. 영어교사 하고 있었는데 끌려가기 전에 가야겠다 싶었다. 은사 중 한명은 경제학 박사였는데 대학 강의 중에 끌려가기도 했다. 1964년 우리 국민소득이 100달러였으니까 61년이면 80달러쯤 됐을 거다. 3사단 부관부 장교계에 근무했는데 한달에 서너명을 카투사로 뽑아보냈다. ‘백’이 많이 작용했다. 사단장 철학에 따라 제각각이었는데 우리 부대는 시험 봐서 뽑았다. 군생활 6개월 뒤에 차출됐다. K-MAG이라고 미 군사고문단 본부에 배치됐다.

황부영(이하 황) 역사책에 나오는 그 K-MAG! 우리 땐 공모제였다. 85년 9월부터 88년 2월까지 근무했다.

사회 ‘카고시’ 시절이다. 카투사 가기가 고시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던.

80년대 중반은 반미 감정이 높을 때라 심적 갈등이 많았다. 논산에서 6주 훈련 마치고 평택 캠프 험프리 KRTC(카투사 리세션 트레이닝 센터)에서 3주 교육 받았다. 미군은 부대에서 써먹기 좋은 스킬을 가르치려 하고, 카투사 교관은 정신교육을 강조해 양쪽 기싸움이 좀 있었다. 솔직히 양놈들. 걔들은 영어 잘하는 것 빼곤 독도법이니 뭐니 가르쳐봤자 돌탱이였다. 그런데 한국 애들은 딱 3일만 가르쳐도 되거든. 우린 교련 배웠으니까. 한국군인 카투사 교관들은 정신력을 유독 따졌는데 지금 보면 어설픈 민족 감정이다. “몸은 미국에 팔려가도 정신은 한국군이다” 뭐 이런 식이었다. 교육 중에 영어시험 쳤는데 1, 2등은 단본부, 3등부터 10등까지는 용산 이렇게 배치했다. 이와 별도로 테니스장에 모아놓고 키 크고 인물 좋고 집안 좋은 애들은 따로 분류했다. 난 시험에서 4등인가 해서 용산 정보처 땅굴탐사반에 배치됐다.

최봉준(이하 최) 땅굴도 찾아다녔나?

겉으로는 정보병이었지만 실제로는 따까리였다.

2001년 9월부터 2003년 11월까지 동두천 미 2사단 캠프 케이시에서 군종 생활했다. 토익 성적 확 낮춰 지원받아 뺑뺑이 돌릴 때였다. 교육은 의정부 캠프 잭슨 내 KTA(카투사 트레이드 아카데미)에서 받았다. ‘좌향좌 우향우, 줄줄이 가’ 이런 거 영어로 듣기, 사격훈련 등 딱 4주간이었다. 보직 교육은 없었다. 성적순도 아니었고 그때그때 사람 빈 곳에 배치되니까 어딜 갈지 몰랐다. JSA(공동경비구역) 근무랑 군종병은 심사를 했다. JSA는 키가 커야 했다. 그래서 군종병 지원했다. 가톨릭, 개신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한 예배당에서 시간 바꿔 예배 보는데 예배 세팅하는 일을 했다.

K-MAG 본부 배차계에 가라더라. 미군이 30만이던 시절이니까 운전병도 많았다. 180명 가운데 80∼90명은 보초 서고 40명은 행정 봤다. 행정병들은 2층 침대 썼다. 보초병들은 단층에 모포 깔고 잤지. 진짜 행정의 파워는 서무계였다. 통역 겸 타이핑을 했다.

‘미제의 방위’라는 질시 받았다

사회 왜 카투사를 선택했나.

안 됨 말고 되면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땐 영어 잘한다는 것도 메리트 중 하나였다. 실제로는 미군이 쓰는 욕을 주로 배웠지만.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원칙적으로 주말 쉬고 미국, 한국 공휴일 다 쉬고, 5시에 퇴근하고. 하지만 칼퇴근은 아니었다. 카투사들은 열심히 일한다. 아무리 영어 잘해도 미군보다는 못하니까 빨리 일을 배워 섹션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지가 강하다. 그래서 악착같이 한다. 일과 뒤에는 공부하거나 놀았다. 미군하고도 잘 어울렸다. 주말에 패스 받고 집에도 자주 갔다.

집에서 나중에는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웃음) 우리도 미군과 업무 경쟁이 많았다. 하지만 개인적인 존재감과 사회적 존재감이 충돌한다고 할까. 꿀리지 않으려고 뭐든 기를 쓰고 했지만, ‘얘들이 나보다 영어는 잘하지만 일은 못해’ 하는 경쟁심과 ‘그래봤자 양놈 좋은 일 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함께 들었다. 난 84학번인데 굉장히 엄숙하던 시절이다. 카투사를 보는 시각은 두 가지였다. 군대 생활 편히 한다는 부러움과 미제의 방위라는 질시. 87년 6월항쟁, 대선 다 군에서 겪었다. 87년 대선 끝나고 용산에 유리창 깨진 막사가 즐비했다고들 한다. 카투사들도 피끓는 젊은이들이었으니 결과에 대한 반발이었지. 다음날 집합 때 안 나간 카투사도 많았다. 그때만 해도 군에서는 누굴 찍으라는 지시가 은밀히 왔다. 용산에서는 그게 안 통했다. ‘반동표’가 딱 두표 나왔다. 그 중 하나가 내 직속 쫄따구였는데 걔는 내내 인간 취급 못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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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나?

도움이 많이 됐고 미국도 알던 시절이었지만 제대하고 다시는 이태원(서울 용산 소재)에 가고 싶지 않았다. 3년 내내 미군과 한방을 썼지만, 술 먹으러 나가면 내국인 출입을 금지하는 곳이 많았다. 그게 참 자존심이 상했다. 두어해 전 우연히 이태원에 갔더니 내국인 출금 장소가 거의 없더라. 15년 사이에 많이 바뀐 거다.

우리 땐 아예 그런 술집이 없었지. 이태원도 그리 큰 길이 아니었고.

미군 부대 내 아리랑택시가 미제 차에서 국산 차로 바뀌었더라. 나라가 고맙다까지는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나아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카투사 갔을 때 물질적으로 충격받는 게 많았다. 막사가 우리 집보다 더 좋았다.

60년대 초반만 해도 카투사 온 사람 중에 무학자가 많았다. 내가 놀란 건 밥이었다. 한국 부대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보리밥에 멀건 된장국. 꽁치 냄새는 나는데 꽁치는 없는 그런 밥 먹다 갔으니까. 심지어 숟가락도 없이 군번 인식표로 먹었다. 미군 서무계 시절 내 사무실이 (좌담을 하던 중국음식점 방을 가리키며) 여기보다 컸다. 혼자서 썼다. 서무계 책임자는 미군 중위였는데 운전병들 구별을 못했기 때문에 실무는 다 내가 했다. 휴가처리, 사고처리, 인사처리까지 내 맘대로 했지. 한마디로 오야붕이었다. 하지만 월급은 한국군하고 똑같았다. 130원.

사회 당시 보통 월급쟁이랑 비교하면?

64년 제대 뒤 천양산업에 취직해서 8천원 받았으니까 지금하고 비율은 비슷할 것 같다. 반미 감정은커녕 오히려 미군을 존경했다. 미군을 잘 사귀고 친구 만들려고 애를 많이 썼다. 부대 생활도 풍요로웠다. 도서관도 잘돼 있고 음악감상실, 극장, 오락실도 있고. 한국 부대에서는 구타를 많이 했지만, 미군 부대는 때리는 게 없었다. 카투사들 사이에서 때리는 건 있었지만, 단체 기합이지 한명을 때리진 않았다.

‘정의로운’난동에 관한 추억

그래서 백 쓰고 돈 써서 갔나 보다. 70년대 논산에서 있는 집 자식이 선 줄에 끼어 있다가 그 줄이 몽땅 카투사로 빠지는 덕에 카투사 간 경우도 있다는 얘길 들었다. 용산 기지 내 클럽 중에 도박하는 곳이 있었다. 거기서 일하는 분들 말이 ‘카투사 시험 봐서 오니까 슬롯머신에 매달려 있는 애들이 없다’는 거다. 그 전 카투사들은 돈 있는 집 자식이 많았으니까 도박을 했겠지. 나 병장 때 7천원하고 동전 몇개 월급으로 받았는데 그걸로 어떻게 도박을 하나. 80년대 중반 넘어가며 카투사 처우도 많이 변한 걸로 알고 있다. 86년부턴가 이발병도 없어졌다. 대걸레 빠는 데서 간이로 머리 디밀고 깎았는데, 쿠폰을 줘서 바버숍에서 깎게 됐다. 하지만 극장 갈 때는 카투사들이 먼저 도착해도 미군 먼저 다 들어가고 남는 자리 있으면 그때야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똑같이 줄서서 들어갔다.

극장표가 중대에 몇장씩 나온다. 서무계라 내 몫은 꼭 한장씩 있었다. 시레이션(전투식량)에 대한 기억은 선연하다. 한달에 한번씩 나오는데 화랑 담배 30갑이 들어 있었다. 나오면 뜯지도 않고 그대로 팔지. 훈련장에 아줌마들이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 시절에 사고 치면 원복시킨다(한국군에 돌려보낸다)는 말은 정말 위협이었겠다.

큰 위협이었지.

우리는 반복해서 배웠다. 카투사 인사권은 한국군에 있다, 징계권도 한국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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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복시킨다는 말 미군에게 들어본 적 없나?

그런 말은 금지돼 있었다.

여건이 참 달라졌다. 일병 땐데 피크닉 에어리어에서 바비큐 파티하던 날이다. 스와이처라는 미군이, 이름도 그렇게 괴상했는데, 큰 카세트를 들고 왔다. 컨트리풍 노래였는데, 가사가 골때렸다. 한국에 오면 이쁜 여대생들과 씨 뿌리며 잘 수 있다, 이런 유의 심한 내용이었다. 그 자리에서 테이블 엎고 맥주캔 던지고 카세트 발로 찼다. 정의로운 난동이었지. 그 일로 시말서 썼다. 징계는 안 받고 카투사 군기교육대 가서 봉체조 몇번 했다. 근데 그날 밤, 그 다음날 밤 막사에 미군들이 술병 들고 줄줄이 찾아오는데 히스패닉과 흑인들이었다. 스와이처는 백인이었다. 미군 내의 인종차별 때문이었겠지. 꼭 잘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신나긴 했다. 원복이 걸렸다면 몸 사렸겠지.

원복 그것 참…. 제일 가슴 아픈 일은 운전병들이 기름 빼 팔아먹는 거였다. 거짓말로 출입증 끊고 휘발유 팔러 나갔다 오는 거야. 문제는 그러다 교통사고가 나는 거다. 안 그래도 서툰 운전에 조바심을 내다 보니까. 사고 치면 그걸로 원복이다. 무조건이다. 웬만하면 내가 변명조로 보고서 써주지만, 서전이 같이 조사 나가면 어쩔 수 없을 때가 많다. 원복시킬 땐 정말 가슴 아팠다. 우리가 못살아서…. 여의도 벌판에서 천막 치고 훈련하던 날, 한 운전병이 천막을 훔쳤다. 싣고 나가서 한강 백사장에 파묻었다. 천막 하나면 값이 꽤 나갔다. 카투사들은 그 사실을 알았다. 내 위 영어 한마디 못하는 한국군 중사는 보고하라고 했지만, 보고하러 가는 척하고는 딴 데 갔다 왔다. 그땐 한국 사람들끼리는 도둑놈 취급 안 했다. 미군 거 훔친 거니까. 다음날 미군 마스터 서전이 뭘 트럭에 싣고 나가는 걸 봤는데 무슨 일이냐는 거다. 할 수 없이 사실대로 보고했다. 헌병대가 곧바로 와서 걜 데리고 갔다. 8군 헌병에게 인계하면서 영창에는 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도둑질한 녀석을 사회 나와서 만났는데 그렇게 고마워하더라.

카투사 나왔단 말 못 꺼내던 시절

그런 얘기는 신기할 따름이다. 80년대랑 지금은 생활 조건은 큰 차이가 없지만 시각은 참 다른 것 같다. 황 선배는 뭘 위해 우리가 이 일을 하나, 갈등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한국군을 위해 있는 것이고 미군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분명히 했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그런 모양이다. 우리 땐 도덕적 부채감이 있었다. 한 친구도 카투사였는데 89년 말 한 대기업에 입사했다. 부서 신입사원들이 아무도 군대 얘기를 안 하더란다. 그래서 ‘방위였나 보다’ 여기다가 친구가 먼저 ‘난 카투사 나왔다’고 얘기했다. 그제야 다들 자기도 카투사 나왔다고 입을 열었다고 한다. ‘모두 미군 방위 출신이네’ 하면서 웃었다더라.

길 가다 보면 ‘헤이 카투사’라고 부르는 미군이 있다. 그러면 ‘우리 이름은 카투사가 아니다. 계급과 이름을 똑바로 불러라’라고 말한다. 카투사는 원하면 미 하사관학교 초급지휘자 양성과정(PLDC)에도 갈 수 있다. 거길 통과하면 노란 바탕에 검은색 호랑이 문양인 휘장이 나온다. 그런 거 붙이고 싶어하는 카투사도 많다.

사회 2002년 장갑차 사건 났을 때 내부 분위기는 어땠나?

위험 등급이 아주 높이 올라갔다. 절대 사람들 많은 데 가지 말라, 절대 군복 입고 나가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광화문, 대학로 이런 데 가지 말라고 금지 지역도 정해줬다. 일부 미군들은 동두천 시내에만 나가도 어떻게 될 거라고 무서워하기도 했다. 어떤 내용인지 모르는 미군들이 많았다. 두 소녀가 사고로 죽었다, 반미 감정 심하다, 이런 식으로만 전달받았으니까.

걔들은 기본적으로 한국에 별 관심이 없다. 미국이 그라나다 침공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침공’을 ‘엔터’라고 표현하더라. 일본이 만주 침략을 진입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맥락이 같다.

나는 카투사에서 큰 소득을 얻어서 나왔다. 운명이 달라졌다. 캠프랑 시내 돌아다니는 ‘섹 버스’ 터미널에 광고가 붙어 있는데, 오늘의 명언 같은 걸 크게 써붙여놓곤 했다. 어느 날 막걸리 마시러 명동 나가는 길이었다. ‘기회는 준비하는 사람에게만 온다’는 말이 붙어 있는 걸 봤다. 그게 딱 가슴에 와 닿았다. 난 사실 교사 하기가 싫었다. 선생이 등록금 독촉하던 때다. 페이퍼 워크도 쩨쩨하고 답답했다. 그 문구를 본 뒤 많은 시간을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지적 수준이 있는 미군도 적극적으로 사귀었다. 제대하던 해인 64년에 1억달러 수출탑이 처음 만들어졌고 남대문에 수출공사도 생기며 사회 전체가 들썩였다. 무역사 제도라는 것도 처음 시행됐다. 내가 우리나라 무역사 1호다. 나중에 부도나긴 했지만 천양산업이라고 수출 실적 1∼4위를 다투던 회사에 톱으로 뽑혔다.

사회 카투사의 법적·제도적 근거가 없다고 한다. 법적 근거를 만들고, 인원을 지원해준 만큼 미군의 인건비 절감액을 방위비 분담금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1대1 인건비로 하면 안 되지. 미군보다 두세배는 더 일하는데.

우리 행정반 사람들 거의 다 출세했다. 미국 유학 가서 박사학위 받고, 국제적으로 활동한 이들도 많다. 그런 힘이 우리 사회를 이끈 동력이 됐다. 미국이 잘못한 것도 있지만 감사해야 할 것도 있다. 미군이 6·25 때 참전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틀림없이 공산화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얼마나 비참하겠나. 미 원조물자로 연명했던 고마움도 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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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도 공짠데 몸도 공짜로 대줘야 하나?

고마움을 잊지 않고도, 할 말은 해야 하지 않을까.

미국은 일방적으로 우릴 도와주려고 주한미군을 유지하는 게 아니지 않나. 자기의 이해관계가 있으니까 전략상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그런 조건을 이용하는 거다.

그렇지. 도와주려고 있는 건 아니지. 미국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드디어 교수님 입에서 카투사 용어가 나왔다.

미국이 고맙다고 했지만 미군들이 못되게 굴어 꼴보기 싫었던 것도 많다. 무역회사 미국 주재원으로 있다가 68년 귀국할 때 노스웨스트 항공 타고 김포 비행장에 내렸다. 활주로에 내려 버스 타려고 걸어가는데, 스태프 서전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막 내린 미군 20여명 앞에 서서 이러는 거다. “웰컴 투 가비지 컨추리.”(쓰레기 나라에 온 걸 환영한다) 얼마나 울화통이 터지던지 얼굴이 다 벌게졌다. 그 서전이 특히 나빠서가 아니라 미군들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다른 고마움이 많지만 그 말은 정말 맺힌다. ‘그러니까 저 녀석들이 세계 곳곳에서 양키 고 홈 소리를 듣지’ 싶었다.

그 말 들었다면 나는 막 욕하면서 달려들었을 것 같다.

나는 따졌을 것 같다.

개척정신과 개인주의가 미국의 정신인데, 지금 미국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이 아닌 것 같다. 이라크 침공 보면서 부시를 무지 욕했다. 아무리 후세인이 못된 놈이라고 해도 어떻게 남의 나라를 침공해서 그 많은 사람을 죽이는지. 부시는 지옥 제일 먼저 갈 놈이다 했지. 부시가 전쟁을 2년 전부터 준비했다는 거 아닌가. 오펙 석유회사들이 로비하고.

미군들하고 얘기하다 보면 답답하다. 이라크에 나가 있는 것도 한국에 온 것도 다 지켜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너희 힘을 유지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냐고 해도 도통 말이 안 통한다. 생각들이 없다.

사회 카투사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

법적인 근거를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카투사 인건비를 돈으로 내놔라 하면 우리쪽 부담도 더 늘어나지 않나?

방위비 분담금 간접 비용에라도 포함시키자는 말이다. 아닌 말로 땅도 거의 공짜로 대주는데 몸도 공짜로 대줘야 하나.

그건 말이 되겠네.

군대의 여러 탈출구 중에서 카투사만 한 곳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과거에는 방위비 분담을 안 했지만 이젠 분담하니까, 우리도 쓸 돈 쓰되 계산은 분명히 했으면 좋겠다. 또 이제는 미군 문화가 새로운 게 아니다. 영어든 국제적 감각이든 물질적 풍요든 굳이 불공평한 관계를 이어가며 배울 필요가 없지 않나.

중요한 것은 미군이 줄고 있다는 거다. 카투사가 공급 과잉이다. 카투사끼리도 얘기하지만, 자주국방 실현되면 언젠가 미군도 떠난다. 카투사 한 사람에게는 자랑스럽고 좋은 경험일 수 있지만 제도는 국가적으로 볼 때 없어져야 한다.

카투사 신조 배웠나? 우리 땐 ‘주인정신을 갖자’가 있었다.

‘민간외교관이다’ 이런 말은 없었나?

그런 거짓말은 있어도 기억 못하겠고. (웃음)

어? 난 뿌듯하게 생각했는데. 달리기할 때 한국 노래도 오기로 하고 그랬다. 만화 주제가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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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조건이 카투사보다 좋아져야

60년대에는 어떤 점에서 군인이 민간인보다 수준이 높았다. 여러 역사적 평가가 있겠지만, 미군 영향이었다고도 할 수도 있다. 카투사도 일조했다. 고칠 것은 고치되 평가할 것은 제대로 해줘야 한다.

카투사가 다른 나라에는 없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카투사보다 한국군의 조건이 좋아져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카투사는 미군의 파트너다. 카투사가 없으면 미군 전력에 막대한 차질이 생긴다. 하지만 미군은 일상적인 립서비스만 그렇게 하고,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얘기 안 한다. 그런 현실이 제도에 정확하게 반영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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