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미국에서 50살 이상 중고령 인구는 전체 인구의 27%에 불과하다. 하지만 소비시장에서 ‘큰손’으로 군림하고 있다. 미국의 ‘50대 소비파워’는 몇 가지 지표로 한눈에 드러난다. 미국의 연령컨설팅업체인 에이지웨이브에 따르면, 미국의 50살 이상 중고령자는 미국 전체 자산의 70%를 보유하고 있고, 금융자산의 77%(뮤추얼펀드의 40%, 주식보유자의 66%), 약국에서 파는 단순·일반의약품(OTC) 소비의 51%(처방약 시장의 74%)를 차지하고 있다.
2010년부터 ‘시니어 마켓’본격 성장
우리나라에서는 어떨까? 국내 50살 이상 중고령자는 전체 상장·등록 주식 중 37.5%(2003년 말·주식 수 기준)를 보유하고 있다. 또 전체 요양급여 중 46.4%(2003년 기준·9조5천억원)를, A시중은행의 1억원 이상 수신고 중에서 69%(2004년 말·금액 기준)를 차지하고 있다. 50살 이상 중고령자가, 경제력과 생물학적 능력이 향상되면서 점차 주력 소비계층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통령 자문 ‘고령화 및 미래사회위원회’에 따르면 2002년 현재 요양·정보·여가·금융·한방산업 등 8대 고령친화산업(65살 이상 대상) 시장규모는 약 6조3천억원에 이른다. LG경제연구원은 50살 이상 가계의 소비 규모는 올해 82조3천억원에서 2010년 117조6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중고령자층이 두터워지면서 50살 이상 중고령자가 소비의 주체로 떠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LG경제연구원 양희승 연구위원은 “2010년이 되면 50살 이상인 시니어 세대 비중이 30%에 육박하기 때문에 전체 소비 규모는 수십조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50대 후반 이후 자녀부양 의무 등에서 해방되면서 ‘재량적 소비’가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고령층이 ‘부양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소비시장의 주력부대로 등장하게 되는 두번의 전환점은 ‘올해’와 ‘2028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와 2028년은 ‘1차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와 1차 베이비붐 세대가 낳은 자녀들인 ‘베이비붐 에코세대’(1979∼86년생)가 각각 50대에 진입하는 시기다. 베이비붐 세대가 50대에 들어서면서 직장에서 본격적인 구조조정 압력을 받게 되면 고령자 라이프사이클이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올해는 이런 변화의 원년이라고 할 수 있다. 1차 베이비붐 세대가 점차 ‘생산’에서 퇴장할 시기를 맞으면서 고령화 시대 ‘소비’의 기폭제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령자들이 소비의 주역으로 떠오르면서 해외에서는 ‘시니어 마켓’이 점차 주목받고 있다. 일본에서는 고령자에게만 특화시켰던 실버산업이란 개념 대신 50살 이상 중고령자까지 포함하는 시니어 마켓이란 용어를 광범위하게 쓰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은 우리나라 시니어 마켓이 2008년 도입기에 접어들고 2010년부터 본격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때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하기 시작하고 노동소득 이외의 소득원, 예컨대 국민연금·개인연금 지급도 본격화되기 때문이다.
시니어 마켓은 요양·의료 서비스 및 건강보조식품 등 기존의 고령 관련 사업 분야 외에 재테크·교육정보·여가오락 분야까지 포함한다. 재테크로는 자산관리서비스·투자 대행·역모기지론 등을 들 수 있고, 교육 분야는 노동의 질을 높이기 위한 평생교육 수요를 꼽을 수 있다. 미국 보스턴의 ‘엘더 호스텔’(세계 최대의 시니어 생애학습 서비스기관)은 학생들이 캠퍼스에 없는 방학 때 기숙사와 강의실을 빌려 건강·기술·정보 등을 주제로 강의해 한해 매출 140억달러를 달성했다. 참가조건은 ‘55살 이상일 것’ 한 가지였다.
흥미로운 건 시니어 세대의 소비 행태가 젊은 층보다 더 다양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왜 그럴까? 시니어 세대는 충동구매 등 쏠림 현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극도의 다양성을 보이는 게 일반적이다. 오히려 젊은 층이 유행에 따라 천편일률적이라고 할 수 있다. LG경제연구원은 “일본에서 2차대전 전후에 집중적으로 태어난 단카이(團塊) 세대의 경우 많은 동년배가 있음에도 소비 행태가 천차만별로 나타나고 있다”며 “우리나라에서도 시니어 마켓이 극단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형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일본의 화장품업체인 시세이도는 1997년 ‘아름다운 50대가 늘어나면 일본은 변한다’는 광고 카피를 통해 시니어용 신제품을 판매했으나 ‘50대’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느낀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해외기업들의 ‘연령관리 경영’
물론 우리나라 중고령자의 경우 소비계층으로의 전환이 아직은 더딘 편이다. 고령화가 진전될수록 저축률이 감소하고 은퇴 뒤에 소비를 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소비가 늘어나는 게 일반적인데, 우리나라는 오히려 중고령자 계층의 소비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조기 퇴직에 따른 소비여력 감소, 중고령층의 임금수준 저하(저임금 비정규직 집중) 탓이 크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데 반해 직장에서 밀려난 ‘젊은 노인’이 양산되면서 노동생애와 은퇴 뒤의 기간이 비슷해지고, 남은 30여년을 실업자로 보내야 하는 상황에서 노후 불안감 때문에 중고령층의 소비가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중고령자들의 노동시장 탈락으로 노후 불안이 확산되면서 55살 이상 가구주의 저축률은 2002년 이후 급속히 높아지고 있다. 2003년의 경우 전체 평균저축률((가처분소득-소비지출)/가처분소득)은 25% 수준인데 55살 이상 가구주의 저축률은 33%에 이른다. 중고령자의 소비지출액도 떨어지고 있다. 1991년의 소비지출액을 100이라고 할 때 전체 평균 소비지출액과 55살 이상 가구주의 소비지출액은 1998년까지 거의 같았으나 2003년에 전체 평균 소비지출액은 250인 반면 55살 이상 가구주는 200에 그치고 있다.
그럼에도 중고령자들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빠르게 늘면서 중고령자들이 가장 큰 소비주체로 떠오를 것은 틀림없다. 해외 기업들은 고객기반이 고령화되고 고객의 연령층이 다양해지자 ‘연령관리 경영’(Age Management)에 나서고 있다. 영국의 대형 할인점인 ‘테스코’과 미국의 슈퍼마켓 체인인 ‘세이프웨이’는 직원 15∼16%를 50살 이상으로 채용하고 있고, 영국의 소매 체인점인 ‘마크 앤드 스펜서’도 65살 이상 고령 직원이 증가하고 있는데 모두 고객만족도가 증가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고령화된 시장’의 욕구를 신속히 받아들여 상품기획·판매에 반영할 수 있도록 임직원 연령구성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유니버셜 디자인, 노인층을 겨냥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2002년 노인층을 겨냥한 ‘유니버설 디자인’(누구나 쓰기 쉬운 간편한 콘셉트) 제품이 휴대전화에서 등장한 바 있다. 휴대전화를 쉽게 걸고 받을 수 있도록 중고령자를 위해 문자판 크기를 키우거나 조작을 간편하게 한 ‘실버폰’이다. 도요타자동차는 시니어 세대가 쉽게 타고 내릴 수 있도록 차문 설계를 바꾼 ‘라움’ 모델을 내놓아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은 “삼성생명 공익재단에서 운영하는 고품격 실버타운인 ‘삼성 노블카운티’의 경우 사회 공헌을 통해 기업 이미지를 높인다는 차원도 있겠지만, 시니어 마켓을 새로 떠오르는 시장으로 보고 ‘사업 기회’로 선점하고 있는 사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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