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전 “이젠 살았다”며 기뻐하던 북한 고위관료는 왜 보름만에 흑빛 얼굴로 바뀌었을까
▣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
1988년 그의 아버지가 미 합중국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부시(bush)란 그저 ‘덤불숲’에 불과했다. 물론 그 앞에 the를 붙여봤자 ‘아프리카 오지’를 넘어서지 않았다.
2000년 10월12일 나는 평양을 방문 중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날 밤 북한 고위관료들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나중에 남북 장관급 회담 북쪽 대표가 된 김령성 민화협 부회장이 종이 한장을 들고 뛰듯이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조-미 공동코뮈니케’가 들려 있었고 그의 얼굴은 ‘이젠 살았다’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공동코뮈니케는 북한과 미국간의 제반 현안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며, 특히 클린턴 미 대통령의 방북을 위해 조만간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를 전범으로 고발했다
평양의 고위관료들이 끝없는 터널 속에 갇혀 있다가 이제 밝은 빛이 새어나오는 출구 근처에 도달한 것 같은 표정을 지을 만도 한 것이었다.
11일 뒤인 10월23일 약속대로 미 국무장관은 평양을 방문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울브라이트 한 사람을 위해 모란봉 경기장에서 10만명이 출연하는 카드섹션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이자 끝이었다. 보름 뒤에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된 아들 부시는 북한이 터널 밖으로 나오는 것을 반대했다. 양국간의 공동코뮈니케는 휴짓조각이 되었고 클린턴은 평양에 가지 못했다. 그 뒤 4년 동안 북녘 사람들에게 덤불숲은 철의 장막과 다름없었다.
2003년 3월20일 새벽 부시의 군대는 이라크를 침공했다. 3월27일 나는 그를 국제형사재판소에 전범으로 고발했다. 재판은 시작되지 않았으나 1년 뒤 미 상원은 부시가 유죄라는 보고서를 채택했다.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내세운 두 가지 이유, 즉 대량학살무기와 테러조직과의 연계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확인한 것이다. 역사의 법정은 이미 부시의 이라크 침공이 유죄라는 판결을 내렸다.
영화 의 감독 마이클 무어는 부시의 재선에도 불구하고 손목을 그어서는 안 될 17가지 이유 중에 3선 연임 금지 조항으로 이번이 그의 마지막 임기라는 사실을 들고 있다. 자살하지 말고 4년만 더 참자는 말이다. 무어 감독의 인내심은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 4년을 기다리기도 어렵고 4년 뒤엔 나아진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부시에 대한 반감은 케리라면 좀 낫지 않을까 하는 야릇한 기대감을 낳는다. 그러나 이 역시 근거 없는 낙관이다. 다른 나라의 주권과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무시로 짓밟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항하는 길은 자주노선밖에 없다. 미국의 패권주의가 저지르는 범죄에 가담하지 않고, 미국의 부당한 개입과 간섭을 물리치는 자주노선이 절실하다.
부시는 미국 백인의 88%가 지지하여 재선됐다지만 부시를 부시답게 만든 데에는 우리의 책임도 있다. 센 몸한테는 고개 숙이는 게 상책이고 간과 쓸개를 내주더라도 센 놈한테 붙으면 안전과 떡고물을 챙길 수 있다고 믿는 노예근성이 부시를 더 강한 부시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의 노예근성을 반성하자
정의가 마침내 이긴다는 믿음이 있다면 미국의 대선 결과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잘못 걸어온 지난 50년을 반성하고 잘못 만들어져온 낡은 한-미 동맹을 새로운, 대등한 한-미 관계로 발전시키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역사의 기관차를 덤불숲이 가로막은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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