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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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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윈윈’ 소리 내며 달린다

등록 2004-11-04 00:00 수정 2020-05-03 04:23

나진~핫산간 현대화 합의로 ‘철의 실크로드’ 가속도… 부산항이나 해운이 죽는다는 기우 버려라

▣ 나희승/ 한국철도기술연구원 남북철도기술개발사업단장

지난 6월17~18일 서울에서 열린 ‘ASEM 철의 실크로드 국제심포지엄’에서의 일이다. 당시 심포지엄에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회원국에 덧붙여 철의 실크로드 노선이 통과하는 북한, 러시아, 카자흐스탄, 몽골, 체코, 폴란드 등 비회원국을 합쳐 모두 아시아·유럽 25개국의 정부 관계자, 민간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북한 대표로 참석한 대외철도국 박정성 국장은 “남북 철도 연결은 물론 시베리아 철도 연결 사업도 중단 없이 진행할 것”이라고 밝혀 기대를 모았다. 북한 대표단은 이날 다른 해외 초청자들과 함께 4월에 개통한 경부고속철도에 탑승하기도 했다. 북한의 변화를 곁에서 직접 지켜보다 보니 새삼 감회가 새로워졌다. 북한이 철도와 관련해 서울에서 개최된 국제행사에 대표단을 보낸 것도 이례적이었을 뿐 아니라 2년 전 ‘유라시아철도 국제심포지엄’ 때보다 훨씬 유연해진 태도가 감지됐기 때문이다.

러시아, 발벗고 나서다

2000년 6월 경의선·2002년 9월 동해선 연결 작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미래는 장밋빛으로 보였다. 한반도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연결하는 ‘철의 실크로드’ 사업은 금방 손에 잡히는 현실로 다가올 듯했다. 하지만 북핵 위기로 남북 철도 연결 사업은 한동안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낙후된 북한 철도 현대화도 재원 문제로 탄력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TKR-TSR 연결 사업의 역동성뿐 아니라 국제 환경에 따른 불확실성을 동시에 경험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철도 사업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난 4월 모스크바에서 남·북·러 3자 철도 전문가 회의가 열린 데 이어 7월엔 북-러간 나진~핫산 철도 구간 현대화 합의가 이뤄졌고, 9월엔 노무현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탄력을 받게 된 것이다.

지난 2003년 한해 동안 시베리아 철도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럽으로 연간 약 12만개의 컨테이너를 운송했는데, 이 중 80%가 가전제품·자동차부품이 주종인 우리나라 화물이었다. 시베리아 철도쪽에서 보자면 한국은 절대 놓칠 수 없는 최대 고객인 셈이다. 부산항에서 떠난 화물 컨테이너는 블라디보스토크항까지 배로 간 다음 다시 철도로 갈아타고 유럽까지 달려간다. 만약 TKR와 TSR가 연결된다면 배의 선적·하역 절차가 불필요해질뿐더러 부산항은 유라시아 철도망의 출발지이자 종착점이 된다. TKR-TSR 연결에는 철도 번영에 같은 이해관계를 지닌 러시아도 동반자이다. 러시아는 TSR 활성화를 위해 전철화, 화물 위치 추적 같은 인프라 개선뿐 아니라 매년 시베리아철도운영협의회(CCTST)를 개최하여 화주와 운송업자에게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노력해왔다. 옛 소련 붕괴 뒤 마피아 출몰, 화물 도난 등의 문제는 옛 이야기가 돼버렸다. 또 화물량은 매년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 러시아 철도는 앞으로 컨테이너 화물을 연간 50만개까지 운송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극동 개발과 맞물려 러시아가 TKR-TSR 연결 사업에 발벗고 나서는 것도 이런 이유다.

하지만 문제는 노후화된 북한 철도다. 국제화물 철도망의 평균속도가 40km/h 이상인 데 비해 북한은 오랜 경제난으로 제대로 보수 유지가 되지 않아 20km/h 이하인 구간이 상당수다. 그동안 러시아는 북한과 공동으로 북한 철도 실태를 조사한 결과 현대화 비용에 24억달러가 들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러시아가 혼자 감당하기엔 부담스런 비용이다. 북한 철도 실태조사 뒤에도 현대화 작업이 이뤄지지 않자 두 나라 사이의 불편한 관계도 커져갔다. 러시아는 현대화 비용 부담을 위해 한국을 포함한 국제 컨소시엄을 제안하고 있지만 아직 적극적인 참여국이 없는 상태다.

북한 철도 노후 문제 해결 보여

이런 맥락에서 지난 7월 북·러 두 나라 사이 나진~핫산 구간 현대화 합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일단 56km에 이르는 이 구간이 철로 보수가 이뤄지고 개량되면, 러시아에서는 이미 포화 상태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항의 대체항으로 나진항을 활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고, 북한은 일부라고 하더라도 철로 현대화의 혜택을 보게 된다. 하지만 나진항이 활성화되면 부산항·광양항이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일부 언론의 우려( 2004년 10월11일치)는 기우일 뿐이다. 나진항은 국제화물을 유치할 수 있는 항만시설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부산·광양항으로 오던 화물을 나진항이 흡수할 역량이 안 될뿐더러, 1천만개의 컨테이너를 처리하는 부산항과 12만개를 다루는 TSR 노선과는 경쟁 관계가 아닌 보완적 관계일 뿐이다. 따라서 나진~하산 구간이 현대화된다고 해서 남한이 TKR-TSR 연결의 주도권을 뺏긴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러시아도 단기적으로 나진항을 이용하지만 잠재 시장인 중국 동북3성의 화물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유치한다는 전략이다. TKR 노선 예정지로 중국과 나진이 한번에 이어지는 평라선 노선을 러시아가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도 블라디보스토크~유럽으로 이어지는 TSR의 우위를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오히려 나진~핫산 구간 현대화 합의는 우리에게도 긍정적인 요소가 많다. 나진~핫산간 현대화 사업이 이행되면 불편했던 북-러간 신뢰 관계도 회복될 것이고, 나진-TSR간 국제연합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이사회(UNESCAP) 북부 컨테이너 시범운송 사업도 가능하다. 조만간 남북간의 경의선과 동해선 시범운행도 예정되어 있다.

이처럼 나진-TSR 국제 컨테이너 운송 사업과 남북 철도 연결 사업은 국제사회에서 북한 철도 현대화 및 TKR-TSR 사업을 가시화하고 국제 협력 분위기를 조성하는 긍정적인 효과로 작용할 것이다. 한국은 남북 철도 시범운행과 국제 컨테이너 시범운송 사업을 적극 추진하여 모두가 윈윈하는 플러스섬 게임을 주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위해 한-러간의 철도사무소 설치도 필요하다.

국제 화물을 원활히 처리하기 위해서는 고속화뿐만 아니라 대용량 화물처리 능력도 개선돼야 한다. 2002년 12월 러시아는 자국의 철도 발전과 국제 철도 연결 사업을 위해 TSR 전 구간 전철화 사업을 완성했다. 그 결과 시베리아 철도는 한번에 70~100개의 컨테이너를 수송할 수 있다. 반면 남북 철도는 20개의 컨테이너만을 수송할 수 있다. 남북 단절로 도로 위주의 수송체계이다 보니 국내 철도 투자에 소홀한 결과이다. 이제부터 국제 철도망 연결을 고려한 한국 철도의 인프라 개선과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유라시아 공동체 네트워크

혹자는 TKR-TSR 연결 사업의 타당성과 관련하여 철도 운송이 해운 운송보다 경쟁력이 없는 것으로 평가한다. 또 철도가 뜨게 되면 해운은 죽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경제적 실익에 따라 우리 컨테이너 화물이 TSR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TSR의 최대 수혜국은 통과국 러시아와 종착지인 핀란드이며, 수혜 지역은 향후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로 확대될 것이다. 이처럼 철의 실크로드 사업은 차별화·특화된 지역을 따라 신규 수요를 창출하면서 유라시아 지역을 잇는 국제 철도망으로 발전할 것이다. 남북 철도가 연결되면 서쪽으로는 중국과 연결되는 인적·물적 고속철도망이 형성되고, 동쪽으로는 시베리아 철도와 연결된 유라시아 고속화물 철도망이 완성될 것이다. 철도 운송은 해운 운송과 경쟁 또는 대체 노선도 아닌 보완 노선으로써 복합 물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부산항은 동북아 물류 중심항으로 다시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철의 실크로드’는 비용 절감과 수송시간 단축 등 물류기능으로서의 경제적 효과뿐 아니라, 동북아의 긴장 해소, 한반도의 평화 정착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익에 덧붙여 시베리아의 자원과 에너지를 실어나르는 수송로를 확보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는 유라시아 지역의 경제·기술·문화 공동체를 형성하는 핵심적 네트워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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