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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걸고 고속철을 팔아라

등록 2004-11-04 00:00 수정 2020-05-03 04:23

중국 등 거대시장 놓고 선진국들 피말리는 경쟁…민·관·정 협력조직이 전방위 활동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최근 일본 니가타의 대규모 지진 이후 송달호 철도기술연구원장은 일본 철도종합기술연구소 소장에게 팩스를 보냈다. 지진 사고를 위로하고 빠른 복구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얼마 뒤 답신이 왔다. 위로에 감사한다는 인사말과 함께 “큰 지진에도 사망 사고가 없어 신칸센의 우수성이 다시 한번 입증됐다”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그 와중에 신칸센 자랑을 하는, 치열한 고속철 경쟁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떠오르는 고속철 시장, 중국

고속철이 본격화된 이후 세계 철도시장은 ‘철도 르네상스’라고 부를 만큼 성장하고 있다. 2000년 기준으로 700억달러(약 84조원), 건설 등 인프라를 제외한 철도 제조업체의 규모만 따져도 250억달러(약 30조원)였다. 2006년에는 철도 제조업 분야가 460억달러(약 55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고속철도 차량은 전체 시장 규모의 6%에 달한다. 이 중 프랑스의 알스톰(TGV)이 40%가량을, 일본 미쓰비시·가와사키 중공업(신칸센)과 독일 지멘스(ICE)가 각각 12%와 7%를 차지하고 있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고속철들이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지는 불과 10여년 전 우리나라 고속철 도입 과정을 떠올려봐도 알 수 있다. 당시 프랑스의 TGV와 일본 신칸센, 독일의 ICE는 ‘삼국지’를 떠올릴 만큼 경쟁이 심했다. 이들의 수주 경쟁을 위한 움직임은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공약으로 고속철 도입을 내건 즈음부터 본격화됐다. 독일의 경우 과학기술성 장관이 방한해 대중교통 기술 상호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독일의 고속철, 혹은 자기부상열차 등에 관해 공동 연구를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당시 국내에는 고속철에 대한 현황 파악이나 연구가 전혀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찌감치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결국 입찰 과정에서는 기술이전에 소극적이었던 신칸센이 가장 먼저 떨어져나갔다. ICE는 기술성과 기술이전 부문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경제성과 재무성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TGV에 밀렸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이런 수주 경쟁은 1994년부터 대만에서 재연됐다. 수도인 타이베이와 제2의 도시 가오슝을 연결하는 고속철 사업에서 일본이 참여한 중화고속철도연맹이 프랑스·독일이 참여한 대만고속철도연맹을 누르고 사업자로 선정됐다. 1980년대 후반 대만 서부 지역의 경제발전에 따른 교통 수요 증가에 대처하기 위해 고속 교통수단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이전부터 시작된 일본의 노력 덕분이었다. 일본은 대만에서 기술교류회와 세미나를 여는가 하면 고속철 관계자를 비롯해 정부·언론계 인사들의 신칸센 시찰을 추진하면서 지진 대비 안전장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인 대만의 고속철은 내년 하반기에 개통될 예정이다.

현재 고속철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곳은 중국이다. 중국은 철도망 중장기 계획을 통해 2020년까지 철도를 10만km 연장하기로 했다. 올해 투자액만도 15조원에 달한다. 우선 수도인 베이징과 상하이를 연결하는 징루 고속철 사업(1300km)을 확정짓고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시스템 기종과 사업자를 선정할 전망이다. 이 밖에도 터키와 말레이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국가에서도 고속철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국가지도자와 정부가 적극 나서다

우리나라의 경부고속철 사업의 총사업비가 18조4천억원인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고속철은 기본적으로 조 단위의 엄청난 국책사업이다. 그만큼 철도 선진국들은 철도사업을 국가 기간산업으로 육성하면서 고속철 사업을 따내기 위해 정부와 기업, 민간이 한 몸처럼 움직이면서 외교 역량을 총동원해 피말리는 전쟁을 벌인다.

일본은 1964년 신칸센 개통 이후 1965년 운수성(현 국토교통성)과 일본국유철도(현 JR그룹)가 중심이 되어 만든 해외철도기술협력협회(JARTS)라는 사단법인을 만들어 신칸센의 해외 진출을 모색해왔다. 이 기구는 한국 시장 진출을 위해 1970년대부터 한국의 철도 수송 능력에 대한 조사에 참여했다. 중국과도 1979년 중·일 철도기술협력계획을 마련하고 양국 공무원은 물론 철도 전문가들의 교류에 힘써왔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부분적으로 기술이전을 하면서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다. 30여년에 걸쳐 중국 시장에 공을 들여왔지만, 일본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 등 중-일간 외교 갈등이 고속철 수주 경쟁에 약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프랑스는 자국의 고속철 해외 진출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선다. 일본의 해외철도기술협력협회와 비슷한 ‘시스트라’라는 회사가 있지만, TGV의 한국 진출시 미테랑 대통령이 직접 외규장각 도서 반환 의사를 밝히면서 정서적 접근을 시도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국가 지도자들이 직접 나서기도 한다. 프랑스 알스톰사는 최근까지 모두 11개의 합자회사를 중국에 설립했다.

독일은 일본이나 프랑스 같이 고속철 해외 진출을 위한 민·관 합동기구는 없지만 국가 지도자와 정치인들이 전면에 등장한다. 2002년 슈뢰더 총리는 독일의 자기부상열차 기술로 만들어진 상하이 트랜스라피드 개통을 앞두고 정·재계 고위 인사 47명을 데리고 중국을 방문해 독-중 외교 사상 최대 인사 방문으로 주목받았다. 독일의 지멘스 등 철도 관련 기업들은 광저우에 철도정보센터를 세우고 광둥성 정부와 도시간 고속철도 논의를 시작했고 이후 독일의 총리가 방문해 힘을 실어줬다.

고속철 사업을 따내기 위한 각 나라의 움직임을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고속철 사업 논의가 본격화되기 수년 전, 길게는 수십년 전부터 ‘작업’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즉, 계약을 둘러싼 경쟁 시점이 프로젝트가 구체화되기 훨씬 이전인 아이디어 출현 단계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잠재적인 고속철 구매 국가에 대한 조사는 물론이고 고속철 사업을 추진할 의사나 능력이 있는지 등을 꼼꼼히 파악해 치밀한 조사를 벌여야 한다.

한국도 ‘협력포럼’ 정력적 활동

또 다른 공통점은 입찰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장조사나 인적 네트워크 구축 등이 비공식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정부나 개별 기업이 나서기에 적합하지 않아 민·관·정 협력조직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해외철도기술협력협회나 프랑스의 시스트라가 좋은 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고속철 개발은 늦었지만 고속철의 국내 활용과 해외 진출을 위한 고민은 거의 동시에 시작되고 있다. 이원우 전 금호그룹 부사장, 서선덕 한양대 교수, 차동득 전 대한교통학회장, 이용상 철도기술연구원 정책연구실장 등 철도·교통 관련 인사들이 모여 민간기구의 필요성을 고민했고, 철도청장 출신인 김인호 중소기업연구원장과 여론 조사전문가 김헌태 사무처장이 합류하면서 2004년 4월 국제고속철협력포럼을 만들었다. 이 포럼에서 대외협력과 기획조정을 담당하고 있는 김헌태 사무처장은 “포럼은 한국 철도와 고속철 산업의 해외 진출과 한반도 연결 국제철도망 건설 촉진을 위한 민간기구 성격으로 올 11월께 가칭 국제고속철협력재단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해외 철도 진출을 위한 국가별 현황 조사와 고속철 프로젝트의 경제성·타당성 조사, 국내 철도 관련 기업 지원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김 처장은 “현재 포럼에는 철도·교통 전문가뿐만 아니라 외교안보와 경제통상 전문가, 철도 관련 기업인, 정치인과 학자들 100여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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